나는 방금 종이에 손가락을 베였다.


책 만지는 일을 하루이틀 해본 것도 아니면서 가끔 이렇게 종이에 손가락을 베이곤 한다. 조심성이 부족해서인 것 같다. 약 1년쯤 전에도 서두르다가 손가락을 깊게 베인 적이 있었다. 1년만에 다시 깊은 창상(베인 상처)을 입었다. 고작 종이에 베인 정도를 창상이라 표현한 것은 살갖이 좀 깊게 벌어져서 잘 아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정도 상처가 아물려면 아무리 트롤(아내는 상처가 빨리 낫는 편인 나를 보고 트롤이라고 부른다.)이라 불리는 나라고 해도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베인 상처를 입고 보니, 상처가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들면서 갑자기 나를 제외한 모든 세상이 잠시 느려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까 종이에 베일때에도 그랬다. 아무생각없이 종이를 꺼내다가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날카로운 종이 날에 베이는 순간, 문득 감각이 예리해지면서 찰나의 고통과 함께, 머리 속으로 생각이 빨라졌다. 일단 상처를 확인. 살갗은 벌어져있지만, 아직 피는 올라오지 않았다. 곧 피가 솟아 올라오리라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피가 솟아올라서 작업하고 있던 책을 못쓰게 만들기 전에 빨리 휴지를 찾아야 한다. 일단 피가 올라오면 먼저 지혈부터 해야겠지. 아니 그전에 물로 한번 씻고 소독을 하는게 더 좋을까. 소독약이 있었던가. 아니 없는 것 같아. 지금은 약국에 갈 여유가 없으니, 빨리 휴지를 찾아 지혈부터 하는게 더 좋을거야. 아주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리속을 빠르게 스쳐간다. 잠시후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해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슬아슬하게 휴지를 찾아 손가락을 감싸쥔다. 따뜻한 핏물의 온도가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두어 차례 크게 베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마다 늘 비슷한 경험을 했던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무언가 만들기 위해 문구용 칼을 긋다가, 동생이 갑자기 발로 차고 지나가는 바람에 왼손 엄지를 그어버렸다. 뭔가 따끔한 감각이 잠시 들었다가 말았다. 아프지는 않았다. 잠시 후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가 방 바닥에 흘러 주변을 흥건하게 적시기 시작했지만, 나는 당황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칼에 베이고, 아픔을 느끼고, 피가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그 짧은 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던게 기억이 난다. 이게 정말 베인건가. 피가 안나니까 그냥 살짝 아프고 만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암튼 그 상처는 아주 컸다. 지금도 손가락의 절반가량 선명한 흉터가 남아있다.

 

대학시절 농활가서 왼손 검지를(또 왼손이다. 이 수난의 왼손!) 낫에 베였을 때도 그랬다. 이번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한 순간의 따끔한 아픔이 지난 후에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갑 때문에 상처가 직접 보이지 않아서 혹시 큰 상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잠깐 가져봤다. 하지만 잠시 후 피가 솟기 시작하자 순신간에 장갑이 붉게 물들어버릴 정도로 상처는 컸다. 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나이였다면 당연히 병원을 갔어야 했다. 나는 솔직히 별로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놔두면 저절로 아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깊이 벌어진 상처가 저절로 아물거라는 철없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농활 인원이 아주 적었기 때문에 선배들도 후배를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며칠 더 일을 했다. 한 선배는 설겆이 하기 싫어서 일부러 다친게 아니냐는 말까지 했다. 농활을 끝내고 돌아올때까지도 손가락은 낫지 않았다. 상처를 본 어머니는 크게 화를 내며 당장 병원으로 데려갔다. 파상풍 때문에 자칫하면 큰일 날뻔 했다고 의사도 야단을 쳤다. 내가 시간을 끌었던 탓에 상처부위를 매끄럽게 꿰매지못하고 살갖의 일부를 잘라냈다. 덕분에 나는 손가락을 매끄럽게 굽히지 못하게 되었다. 약 1년 정도 왼손 검지를 늘 펴고 살았다. 검지 손가락의 윗부분을 주욱 가로지르는 이 흉터는 엄지에 난 매끄러운 곡선의 흉터와 달리 지그재그, 삐뚤빼둘이다. 꿰멘 흔적도 양 옆으로 남아있어 아주 보기 싫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양 손에 자잘한 흉터들이 여러개있다. 이런 상처들은 언제 어디서 다쳤던 것인지 일일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오늘 다친 상처는 흉터가 남을 정도는 아닌 듯하다. 작년에 다친 상처도 이 보다는 더 컸는데, 흉터가 남지는 않았다. 어라 그러고보니 그때 다친 곳이 정확히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 다쳤다고 인식하는 순간,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것 처럼 느껴지는 것.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인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데서 누군가가 차에 치이거나, 죽음에 임박했을 때, 그런 장면을 종종 보여주는 것 같은데, 이건 내가 그런 장면을 많이 봐서 그렇게 착각을 하는건지. 아니면 누구나 그런 경험을 겪기 때문에 작가들도 보편적인 경험의 결과로서 그런 장면을 연출하는건지 모르겠다.

 

 

※ 작년 가을(10월 25일) 다른 블로그에 쓴 글. 해당 블로그 서비스가 종료되어서 여기로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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