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 김갑수의 음악과 사랑 이야기
김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작가와 같은 연배의 남성 독자라면, 두루두루 공감은 못하더라도 감정 이입은 좀 될 법한 책인 거 같다.
역으로 말하면, 나는 감정 이입까지는 좀 그렇고, 뭐, 문학과 음악에 자칭 조예가 깊다는 어떤 아저씨의 개인 기록 노트를 훔쳐보았다는 느낌이다. ‘훔쳐보다’라는 표현은 여기서 썩 어울리지 않는다. 독자들 읽으라고 펴낸 책을 당당하게 본 것인데...무슨....하지만, 훔쳐본 느낌이 드는 까닭은.... 흡사 다른 이의 일기를 몰래 엿봤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받아서이다.

“좀 편벽된 나에게는 일없이 전화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단 한 명(‘소리의 황홀’의 윤광준)의 친구만을 만나면서 지내는 생활을 몇 년째 하고 있다고 말한다.
김갑수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적잖이 섭했을 거 같다. 그렇게 단칼에 말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꼭지꼭지마다 틈만 있으면 김갑수를 떠나간 옛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현재 의사 부인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두었다는데,) 보통 그 옛날 죽고살자하던 과거지사 애인에 대한 이야기가 후일담 형식으로 전해질 때는, 대개 “그땐 그랬지...”조로 덤덤하게 서술되던데, 김갑수 씨는 아직도 상처입은 사슴 모양새이다.
“베티는 죽었다. 그녀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한없이 캄캄한 베티. 그런데 정작 그녀는 귀국해서 아들 낳고 강남에서 잘 산다더라. 바보 같은 거지 같은 베티. 나 자신의 누추한 살아 있음이여.”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에고고...

그러나, 영화 <러브레터>를 보고 많이많이 울었다는 이 아저씨, 통속과 순수를 이제 양극단에 놓고 보지 않을 만큼의 나이를 먹은 사람의 이야기. 세월을 되돌이킬 수 없듯이 그렇게 마음이 낡아가는 쓸쓸함을 말하는 이 아저씨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마음에 착착 와닿는지....

“그렇다고 싸구려 인생론에 젖어들지는 말아야지. 어떤 삶을 지향할지, 어떤 자아와 스스로를 동일시할 것인지 쉽사리 해답을 구하려 들지 말아야지. 결핍은 나의 힘!”

“고상과 우아를 견지하느라 애써 피하는 것이 신문, 텔레비전 저녁 약속 같은 것들이다. 끊임없이 알려 주는 신문, 사정없이 보여 주는 텔레비전, 한없이 불러내어 먹어대는 저녁 약속 같은 것에 휘둘리면 세월이야 잘도 가련만 허망함만이 남는다. 세상 돌아가는 걸 꼭 알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

맨 마지막에 ‘에필로그를 대신하여 클레식 음악 편지’라는 챕터가 있는데, 이 장이 그래도 제일 제목과도 맞고, 내용도 걸출하다. 그는 소나타 형식의 음악을 들을 때는 ‘주제의 제시부, 발전부(전개부) 따져 가면서 피곤하게 음악을 공부하며 들을 필요야 없겠지만, 작곡가나 연주가의 생애와 성향, 음악사적인 맥락 같은 인문적인 사항을 많이 읽고 친근해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데, 옳은 말씀인 것 같다. 물론 순서는 그 역일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음악을 듣다보니, 자연 뮤지션에 관심이 가게 되고, 뮤지션의 생애라든가 음악 이야기를 찾아 읽게 되고, 그렇게 찾아 주워들은 지식 때문에 같은 곡인데도 배경을 몰랐을 때와는 또 달리 귀에 감겨 들리게 되는 것.

그의 인생에 여자들을 설명하는 챕터도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의 모든 여자는 정확히 두 종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여자와 그렇지 않은 일상의 여자. 물론 대부분의 여성들이 일상파로 보인다고.... 그러면서 그는 영화 속의 여자들을 불러 모아 소개해 준다.
닥터지바고의 라라, 개선문의 조앙 마두, <겨울 나그네>의 여주인공 다혜, 베티블루 속 베티, 그렇게 많고 많은 속에서도 홀연 <조지아>속의 새디...를 말하는 부분에서 확 시선이 집중되었다. 욕망의 키에 미달하는 자신을 못 견디게 괴로워하는 한 자아의 몸부림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조지아 동생 새디. 우상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언니에게 자신의 자아 정체감을 의탁해 놓은 미운 오리새끼.

나는 잠깐 착각했다. 김갑수는 새디라는 메타포를 통해 우리(김갑수거나 독자 나이거나)의 실체랄까 하는 것을 말하려고,  영화 <조지아>를 꺼냈다는... 이 책의 시작이든 중간이든 귀결이든 그 속엔 두루두루엔 ‘새디’로 통하는 길이 사방으로 있는 게 아닐까.

못 부르는 노래를 부르지만 않는다면 새디도 최소한 조롱은 면했을 것이다. 과연 새디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다른 일로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가령 착실한 직장인이 되었거나 얌전한 주부가 되었거나 그냥 부유한 언니집에 얹혀 잔일을 거들며 살았다면 새디는 불행을 모면할 수 있었을까. 사람이 느끼는 행복감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일까. 짐작건대 새디는 어디서 무엇을 하건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을 것 같다.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는 자아 집중형 인물들의 공통점이 그것이다. 그들은 실패와 좌절 혹은 타인의 손가락질이라는 외형을 선택해 내면의 평온을 얻는 기이한 존재들이다.
그들의 겉은 불행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내면에는 뜻밖의 충족감과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평온함이 있다. 좌절감, 열등감, 패배감의 외피 속으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정반대의 통로가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다. 거기에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적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심리 세계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어떤 깊숙한 자기 충족의 기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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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7-21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비교적 안쓰럽게 생각하는 여자들이군요. 하늘하늘한 쉬폰 소재의
여린 여자들..그러나 그런대로 잘 사는 여자들..남자들은 이런 여자들에게
관심이 가나봐요. 그렇다면 나도?..아서라. 생긴대로 살자꾸나....^^

비로그인 2005-07-2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리뷰가 정말 장난이 아닌데요. 뭐냐, 이거..절정을 맞은 듯 매우 단호해 보이구 강해진 듯한 이카루표 리이뷰우~
세상 속의 두 여자의 부류. 전 지금도 후자이고, 앞으로도 후자이고, 계속 후자처럼 살래요! 아, 글고 이 책, 쿠오레(로드무비님 서재)에서 봤어요.

2005-07-22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7-22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7-22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이안님의 페이퍼에서 <조지아>의 새디에 대한 부분을 읽은 적이 있는데, 마지막 문단을 읽고보니 꼭 보고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웃사이더라고도 할수 있을까요?

icaru 2005-07-22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 님... ㅎㅎ.. 세상 모든 남자들의 선호도가 그렇지는 않겠지...라구 바랄 뿐인데... 타인의 취향을 가타부타 할 수도 없고 참...글쵸... 아서라...저두 생긴대로 갑니다~~

복돌 언니... 전 정말 님이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에고 띄워 주시기까지 하시고... 고마 어지럽소... !!

속삭이신 님 아!! 바로잡았습니다... 저는 또 이럴 때가 젤루 기쁩니다...
지적이 아니셨음... 저는 알아채지 못했을 겁니당 ^^

잉크냄새 님.... 아.. 저도 이안 님의 페이퍼 인상 깊게 보았었댔죠... 새디 역을 했던 제니퍼 제이슨 리를 예전에 아주 많이 좋아했었는데.... 글쎄....페이퍼를 읽어 보니, 이안 님도 그러셨더라구요.... 아 글고 그 영화, 기분 꿀꿀할 때는 피하세요... 자학용이니까요 ^^


로드무비 2005-07-22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남의 일기장을 훔쳐 읽는 듯 재밌었죠?
근사한 리뷰여요.^^

hanicare 2005-07-22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갑수씨도 이 리뷰를 보면 반가와하실 훌륭한 리뷰입니다. 하지만 볼지 안 볼지 모를 김갑수씨는 저기 밀어놓고 사실은 제가 좋은 리뷰보고 즐겁답니다. 바로 조 위의 로드무비여사서재에서 읽고는 장바구니에 넣었던 기억이 나요.후후...

2005-07-23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