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사실 이 즈음에 읽는 정장본 프랑스 작가의 소설은 절반치만 신뢰하고 대한다. ‘차에 치인 개’가 그랬고 암퇘지가 그랬다. 책 뒷면, 날개에는 각종 유력 일간지들의 쏟아지는 찬사로 도배되어 있다. 이 책에도 여지없이 있다. 똑같다. 서른이 못되는 나이에 발표한(꼭 서른을 기점으로 나이를 운운한다. ) ‘콧수염’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200페이지 분량의 줄타기를 하는 천재라는 것이다.

다 읽고 나서의 느낌은, ‘아 그래도 이 책은 좀 다르다.’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소설 취향 같은 걸 알아버렸다. 나는 사건이 일어난 지점(인물의 관계망이 뒤섞인 지점)으로부터 주인공이 공간적으로 멀리 빠져 나와 저만치 멀리둔 최초의 사건에 대해 재해석을 하고 관조하는 패턴을 좋아한다.
일테면,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도망치듯 파리를 벗어나, 공항에 가고 좌석이 남아 있는 비행기라면 아무 행선지나 잡아타고 (홍콩), 그렇게 찾아간 홍콩의 어느 호텔에 장기 투숙하면서 보내는 부분. 하는 일이라고는 구룡 반도와 홍콩섬을 왕복 운행하는 페리를 수십 번씩 갈아타며,
 
“페리선은 그의 마음에 들었다, 단박에 마음에 들었다. 왔다갔다 하는 그의 마음에 틀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동전만 넉넉히 있으면, 망설이다가 욱하면서 다른 생각이 들어도 행동으로까지 옮기지 못하고 지금처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라고 말하는 부분이 좋다.

내 맘대로 분류에 의하면, 이 책은 적의 화장법 류의 작품인데, 줄거리라고 할 것도 없는 줄거리를 말하자면 대충 이렇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은 아내를 깜짝 놀래주려고 10년 넘게 기른 콧수염을 깎는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 그녀 앞에서 그는 초조해진다. 아내의 무관심을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아내는 정색을 하고 콧수염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한다. 친구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콧수염을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여기까지....

사실 나는 이 부분까지는, 정말 간신히 간신히 읽었다. 콧수염이 있었고, 없었고 하는 게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아내와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가 , 뭐 이런 소설이 다 있어! ....  ‘내가 나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라는 정체성의 혼돈과 입증의 문제라고 들었는데, 정말 말이 거창하기도 하다고 생각되었다. (요로코롬한 사고 방식으로 소설책을 읽으면 재미가 반감된다... 이런 방식은 극구 피해야 한다. ^^)
그런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는 지점은... 어제까지도 전화 통화를 했던 아버지가 오늘 아내 말에 의하면 돌아가신지 1년이 되었다 하고.... 자바섬에 놀러 갔었다는 과거의 추억마저 엇갈려 버린 마당에서부터였다...... 아내 아니면, 내가 미친거다.
급기야 나는 아내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와 짜고 ‘나’를 정신병원 영원히 넣어버리려고 이런 음모를 펼쳤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가정은 사실 여하를 차치해 두고, 인간 불신 극도의 상황이랄 수 있다. 가장 사랑하고 존엄하게 생각하는 두 사람이... 나를...

콧수염을 가졌다고 생각하는(생각이 아니라 그게 사실인건지 어쩐건지는 나도 모른다...여튼...) 이 주인공 사내는 사실 정신병원이 가장 두려웠던 것이다...  (누군들....당연하지...)
그래서 그는 페리를 타면서 시계추를 떠올리는 것이다. 마치 페리선처럼 무감각해진 미치광이들의 뇌 속에서 절대 지치지 않고 평화롭게 왔다갔다 하는 모양새라고 그는 생각한다.
 
아무도 ‘나’를 내가 알고 있는 ‘나’로 받아주지 않는 상황.은 정말 끔찍할 것이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뭐 대입해 놓고 보기에 그닥 적절한 사례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아무튼 이 작품은 정체성을 말하는 서스펜스류의 소설이 되려고 그랬는지, 주인공 ‘나’는 어느 순간 더 이상 나의 친구와 아내와 소통하여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회피하고 이들에게 음모가 있다고 생각하고 홍콩으로 날아가버린다. 우리에게 일어난 실제 상황이었으면, 아마도 더 집요하게 따져 물었을 것이다. 콧수염을 깎았다는 것을 알아 줄 때까지 새초롬하게 기다릴 게 아니라, 콧수염이 있던 시절의 증거를 들이대고 좀더 집요하게 진실을 추궁했을 터인데.......!

주인공 ‘나’는 주변인들을 떠보고, 지레 짐작한다. 좀더 추궁하지 않고, 겉으로는 덮어두었다고 말하며, 마음 속으로는 큰 의혹을 잠재우지 못하기 때문에, 의혹은 눈덩어리처럼 불어간다. 이 소설이 결말이 어떻게 나려고 이렇게 흘러가는 것인가.

그런데 그 결말이란 게 참... 

마지막 장면의 좀 억지스러운 것만 빼면 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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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9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6-09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런 패턴을 좋아하신단 말이죠?ㅎㅎ

미네르바 2005-06-1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참 재미있겠는걸요? 아무도 '나'를 내가 알고 있는 '나'로 받아주지 않는다면... 아마 미치겠죠? 그런데 콧수염 자른 사내는 그냥 회피하고 마는군요.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네요.

2005-06-10 0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6-1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수정했어요...!! 헥헥헥... !
로드무비 님... 옙...프랑스 중위의 여자도 그랬고.... 마구스도 그랬고... 중간에 장소가 바뀌는 걸...좋아하는... 이거도 패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는 몰라도요...
미네르바 님.. .하하... 그렇다면 아마 미치고 펄쩍 뛰겠죠...ㅋㅋㅋ
속삭이신 님... 맴매예요!!!

비로그인 2005-06-1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가스등>을 보는 거 같아요. 아내를 미치광이로 몰아가는! 결국, 콧수염이 있었던 건가요, 없었던 건가요? 실제로 음모가 있었던 건가요, 백모증이었던 건가요? 이거 스포일러인가요, 아닌가요? 지금 비가 오나요, 그쳤나요? @,.@ 딸꾹~

2005-06-10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6-12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리뷰 하나 쓰면~ 낚시줄에 대어 낚듯,,,, 엮어서 건지게 되는 것들이 많다니깐요~ 오늘은 복돌언니 추천... 가스등야요!!

속삭이신 님... 흐흐... 작가 뺨 치는 댓글이세요...
사실 저도 콧수염에 달린 님들의 댓글에... 대한 댓글을 썼는지 안 썼는지 알쏭달쏭해 하다가 .... 이제사 씁니다...

sayonara 2005-06-16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염얘기는 뭐니뭐니해도 유럽의 잔혹동화 '푸른 수염'이 최고죠. 어린 시절 그 작품을 그림책으로 읽고 일주일동안 악몽에 떨었던 기억이...(지하실에 매달려있는 XX들...)
이카루스님의 리뷰가 (아마도) 원작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것 같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