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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야기 - Shakespeare's Complete Works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 외 옮김 / 달궁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그리스 로마 신화는 ‘아직’ 입문 전이다. 무작정 집쥐처럼 긁어 모아 두고 본격적으로 읽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나의 ‘추리 소설책’들처럼, 이윤기 님 번역 ‘그리스 로마 신화’ 또한 앞으로 읽어야 할 목록 꾸러미 속에 일단 놓아 두고 본다. 허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그렇게 느껴지듯, 그리스 로마 신화 또한 읽지 않았으면서도 읽은 거 같은 느낌이다.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왜 신화를 읽는지를 물으면 그런 말들을 한다. 신화 속에 인간사 모든 것이 다 있다고. 물질과 정신, 사랑과 증오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며, 인간에게 부여되는 의무와 권리에 대한 법률적 해석 등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낭만적인 줄거리에 감미로운 장면이 간간이 삽입된 전형적인 로맨틱도. 인간사, 사람의 현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 안 빠지겠느냐? 라고.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 'H 서류'는 호메로스가 한 사람이었는지 여러 사람이었는지 학자들이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말하자면 일리아스 오딧세이아를 호메로스 혼자서 쓴 것인지, 아니면 여러 사람이 쓴 것을 그가 편집한 것인지 조사하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는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의가 있어 왔다고 말한다. 게다가 셰익스피어의 초기 작품 두 편은 고대 로마 작가 플라우투스와 세네카의 작품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만큼 그리스로마 신화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모태가 되었고, 또한 그리스 로마 신화 그리고 그리스 로마의 문화에 정통했던 작가가 셰익스피어였을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그리고 로마의 문화를 모르고는 셰익스피어를 읽을 수 없다고 한다면 과장이다. 하지만 신화와 문화를 알게 되면 셰익스피어를 읽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이윤기는 작품에 들어가기 전 앞부분에서 신화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얼개를 짜서 읽는 것을 춘향전을 읽을 때, 중국 고전을 이해하고 읽으면 더 실감이 나는 것과 비교하였다.
이몽룡이 경치 좋은 곳을 찾아드는 부분에서,
“기산영수 별건곤에 소부허유 놀고...”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서 ‘기산영수, 소부허유’라는 압축된 여덟 글자의 사연을 아는 자는 행복한 압축 파일을 푸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작품 춘향전을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적용해 말하자면, 그리스로마 신화를 잘 아는 만큼, ‘겨울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 질거라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실상 작품을 보면, 즉,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배경 지식이 있어야 이 작품의 소화가 쉬운 것이 아니라, 반대로 겨울 이야기를 읽고 나서, 비로소 <피그말리온 이야기>나, <오이디푸스왕 이야기>가 궁금해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역자 이윤기 씨의 노고를 알 수 있는 것이,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가 400년 전에 쓴 것이기에 번역이 쉽지 않았을 것임에, 학문적 접근에서의 번역이 아니라, 읽히는 셰익스피어 쪽으로 기울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각주나 미주가 많이 따라 붙어야 했을 것이 분명하나, 독자들의 가독성과 읽는 재미를 위해 각주를 붙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컬러 삽화로 눈의 긴장을 풀어주는 면 구성이 돋보이는 책이다.
다음 글은 여주인공인 헤르미오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비운의 스파르타 공주인 헤르미오네와 동일한 여인이고, 그 운명 또한 비슷)가 남편인 왕에게 부정한 여자라는 오해를 받고, 만인 앞에서 하는 최후의 진술의 일부이다. 말맛의 자연스러움을 이 인용글을 통해 소개한다.
“내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나에게 부여된 혐의를 부정하는 내용일 수밖에 없고, 내 대신 증언해 줄 수 있는 이도 없을 터이니 ‘무죄’라고 주장해도 별 소용이 없을 듯합니다. 나의 진실이 모두 거짓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니, 내가 하는 진실한 말 또한 모두 거짓말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진술하는 것은, 거룩한 신들이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계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들 앞에서는 결백이 그릇된 의심의 얼굴을 붉게 하고, 인내가 가혹한 처사에 무릎을 꿇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저의 삶은 순결하고 진실합니다. 지금 저의 삶은 관객을 즐겁게 하기 위해 교묘하게 꾸며진 비극보다도 더 슬프고 불행합니다. 하지만 지금 슬프고 불행한 만큼이나 순결하고 진실했습니다. 보세요. 국왕의 반려로서 왕좌를 공유했던 왕비이자 대왕의 딸이자 전도유망한 왕자의 어미가, 바라는 사람이면 누구든 방청할 수 있는 여기 이 법정에서 목숨과 명예를 지키고자 떠들어대는 꼴을 보세요. 목숨이라면 저는 슬픔 같은 것으로 여겨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예는 저로부터 저의 자손으로 대물림되는 것이어서 그것만은 지켜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