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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6 ㅣ 범우 한국 문예 신서 56
장정일 지음 / 범우사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진정으로 책과 바람이 난다면... 아마 나는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무쟈게 편애하는 사람이 될 거 같다.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그렇게 훌륭하냐고 묻는 것은 우문이다. 사실.... 세상의 모든 독서일기는 다 훌륭하다. 내가 지금껏 먼지처럼 쌓아놓은 리뷰들도 그냥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처럼. 장정일이라는 한 개인이 특별히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가 꾸준히 일기를 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독서일기를 높이 사는 이유는 다시 읽는 의의가 있고, 한 권의 책에 대해서도 내 생각의 변화를 그의 일기를 통해 지표 삼을 수도 있지 않은가. 가령 그의 서평일기 책 중에서 이미 읽은 책들은 내 느낌과 비교하며 읽으니까 재미있고, 이 느낌이라는 게 일치할 때는 되게 반가운데(윤광준의 소리의 황홀에서 일치함.) 완전 어그러질 때도 있다.(암퇘지와 냉정과 열정 사이는 서로 딴소리...)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은 소개를 받으니까 좋고.
이번 6권을 통해 만나니, 장정일이 조금 변했다. 그의 독서관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을 좇아가는 독서에서 약간 다른 것으로 진화했다.
“민주 사회란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시민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愚衆)이 된다. 책과 멀리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사회 관습의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기 십상이고 수구적 이념의 하수인이 되기 일쑤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밀한 정신의 쾌락을 놓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나쁜 시민이다.”
(이 사람 어째 책을 읽을수록 점점 목뼈가 뻣뻣해지는가 보다.) 선택한 책들도, 황간의 <주자행장>, 소동파의 <마음 속의 대나무> 같은 중국 고전도 있다. 좀 이례적이다. 문화일보에서 <삼국지>를 연재하기 위한 준비 작업의 일환이려니 싶은데....
154쪽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 처음 읽는 시오노 나나미의 이 글들은 무척 쉽게 그리고 즐겁게 읽힌다. 뿐만 아나리 몇몇 감상문은 어떤 글에서도 읽어보지 못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본 많은 관객들은 키팅 선생의 열정에 찬사를 보내며 그런 선생이 성공하지 못하는 융통성 없는 교단과 창의력이 말살된 교육을 비난하기 쉽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키팅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그의 비현실적인 교수법을 문제 삼는다. 키팅식의 교수법은 가르치는 쪽이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야 하고 게다가 학생들의 잠재된 욕구를 자극해야 하기 때문에 커리큘럼 순으로 소화해 나가는 일반적인 교사와 달리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한 반도 아닌 대 여섯 개의 반을 그렇게 가르친다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학교의 선생들은 아주 여유만만하게 “그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그 영화를 태연히 학생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학교 교육은 ‘뼈대’를 세우는 데 목적이 있으며, 학교에서 기대할 수 없는 ‘피와 살’은 학교 이외의 장소에서 보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교과서 이외의 책이 존재하는 이유는 키팅 선생적인 것을 갈구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존재했기” 때문이며, 바로 그것이 “교과서외의 책이 출판되는 이유”라고 말한다. 그래서 ”키팅 선생에게 공간을 제공해 줄 학교는 없다. 그는 작가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는 결론은 퍽이나 수미일관하게 여겨진다.
......"인간이란 나이를 먹을수록 많이 보고 느껴야 한다. 젊은이의 감수성이란, 정신적인 나태에 빠진 어른들의 일시적인 항복 상태의 징표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예민하고 깊은 감수성은 진실로 어른들에게만 허락되는 신의 선물이 아닐까”
- (아아, 얼마나 확신에 찬 발언인가! 이 문장의 끝에는 일말의 주저함을 보여 주는 물음표조차 없다!)
읽고 싶은 책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이완 맥완의 <암스테르담>
주명철의 <지옥에 간 작가들>
제임스 리어단의 <올리버 스톤>
p.브루노의 <천재와 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