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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그리하여 난 비로소 삶과 죽음 사이의 갈림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계속 살아갈 자들은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고, 오직 죽음을 앞둔 자의 눈만이 햇발을 뚫고 태양을 볼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요전 날에 본 쿵푸 허슬 생각이 마구 났다. ‘악다구니, 허풍’ 그런 것들이 닮았다. 쿵푸 허슬의 유쾌 통쾌함은 좀 예외로 둔다면 둘 다 중국 민초들의 대륙성 기질다웠기에 그리 느꼈었던 것 같다고 돌려 말해도 될까.
위화는 이제 나이 40대 초반이라는데, 쓰는 글을 보면 인생을 살만큼 다 살아본 사람 같다. 이 소설은 광림이라는 어린 소년이 청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일을 생각나는 대로 쓴 회상 소설이다. 생각나는 대로라 하는 것은, 시간을 이리저리 오락가락 하면서 이야기를 꺼내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속세의 원한과 은혜를 뛰어넘어 저 홀로 오는 것이기 때문인지라, 광림은 아버지나 형에게 맞은 기억,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기억을 생각해 내고도 노여워하거나 복수의 눈빛을 다지지는 않는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몇몇 인물은 어찌나 파렴치인지, 주인공 광림이의 아버지 광재는 자신의 아버지 유원이 늙어서 일도 못하고 밥만 축낸다고 온갖 잔머리를 써서 자신의 늙은 아버지가 밥을 못 먹게 수작을 부린다. 할아버지도 할아버지 대로 잡아떼거나 골탕을 먹이는 은근한 방식으로 아버지의 하극상에 우스웁고 완곡하게 대응하는데 이게 또 이 소설의 재미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계신데도 불구허고, 과부와 정을 통하여 바람을 피우는데 설상가상으로 형마저도 그 과부와 정을 통한 사이라, 어머니와 과부가 한 판 붙었을 때 두 남자는, 과부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어머니를 보호해 주지 못하고 줄행랑치기에 바쁘다. 공중에 방 떠버린 허망한 어머니. 이 모든 것을 속수무책으로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는 나는 숫기 없는 천덕꾸러기이다. 이런 아버지가 최후의 운명을 맞이할 때는 똥통에 빠져 죽는다. 아버지는 파렴치한 잡범 같은 사람이었으나,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또 비참하고도 어이없게 죽음을 맞이하는 불쌍한 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허삼관 매혈기>처럼 해학과 풍자가 넘실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중국적인 것 대륙적인 것을 잘 보게 하는 소설이지만, 어째 유쾌해지지만은 않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