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살바도르 달리 - 어느 괴짜 천재의 기발하고도 상상력 넘치는 인생 이야기, human RED 001
살바도르 달리 지음, 이은진 옮김 / 이마고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달리가 쓴 자신의 이야기이고, 그의 작품은 한 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책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무엇은 얻어가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더라?
일단 기대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첫째 그의 나이 36세 때에 쓴 것이기 때문에 한창 조명 받던 인생 후반기(그는 84까지 살았습니다.)에 대해서 들을 수 없다. 즉, 달리가 달러와 예술성을 맞바꾸었다는 평가에 대해 이 책에서 그 이야기의 진원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둘째, 달리는 자기가 ‘세계의 배꼽’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도취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여느 자서전에서 볼 수 있는 한 인물 개인의 고뇌와 회고 같은 걸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기대하여 들을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달리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나와 같은 사람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그러니까 달리에 대한 특별한 배경 지식 없이도 읽을 수 있을만큼 부담을 주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한 인물의 ‘천재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했다는 것. 그의 특이한 행동들을 통해서....진짜...괴상망측한 사람이로구나...
달리는 천재였다. 이 천재라는 말 뒤에, 광대, 쇼맨, 괴짜 세 단어도 붙여 주어야 할 듯하다. 만약 하느님이 우리에게 천재성을 주겠노라고 한다면 오롯이 그 천재성을 받아들이겠다고 할 수 있을까?
외줄을 타는 것과 같은 험하고 아슬아슬한 길을 걸어나갈 수 있는 용기가 내겐 없을 것 같다. 달리가 싫어하던 말, ‘둥글둥글 세상 그렇게 사는 거야’라던, 나는 그렇게 사는 게 천성이고 팔자 같아서. 하지만 이렇게 튀어나온 못과 같은 예술가의 삶의 접하노라면, 마음 속에서는 이상한 일렁임이 일어난다.
“나는 오직 두 가지만을 원한다. 내 아내 갈라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불가능하고 미묘한 기술, 늙어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달리의 천생배필이었던 아홉 살 연상의 여인 갈라는 이 책에서 달리 못지 않게 중요한 인물. 스물 두살에 달리는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이후 갈라는 달리가 유년과 청소년 시절의 자뭇 철없어보이는 각종 기행들과 무분별과 빠이빠이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는 갈라를 통해 생을 사는 기쁨의 원칙들을 다시 배운다. 그는 그의 개성을 몰살시키지 않고도 그를 괴롭히던 여러 괴벽들을 내던졌다. 이 모두가 갈라 덕택이었다.
“<기억의 영속성>은 달리의 그림이 반대중적이라 팔리지 못한 것이라 예언했던 쥘리앙 레비의 빗나간 예측을 입증하지 못했고 팔리고 또다시 팔리면서 결국에는 현대 미술관에 안착되었다. 내 그림은 그 미술관에서 필경 가장 대중적인 작품일 것이다. 나는 지방 아마추어 화가들이 그 그림을 모사한 것을 자주 목도했는데 흑백 사진으로만 나의 그림을 보았던 화가들인지라 색깔은 마음대로 칠해져 있었다.”
---> 우리에게 ‘잃어버린 시간’이라고도 알려진 그의 흐물흐물한 시계 그림은 그의 초기 작품이었다. 이 그림은 사실 한번 보면 잘 잊히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달리가 두통에 심하게 시달리던 어느 날, 식탁에서 치즈를 보다가, 잎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올리브 나무를 보다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무슨 계시처럼 어둠 속에서 흐물거리는 시계 두 개가 떠올랐고, 두통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이것을 그림에 옮긴 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기억의 영속성>이다. 이 당시만 해도 달리는 유명세는 있었는데, 수중으로 돈이 들어오지는 않았던 모양으로 이 책에서는 돈에 쪼들려하는 달리의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달리와 갈라는 그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도록 내색하지 않는 것이 자신들의 힘이라고 생각한듯하다. “옆사람의 동정은 사람을 죽인다”라고 갈라는 달리에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진짜 힘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마지막까지도 천재성과 기품을.)
“스페인 내전은 나의 사고의 흐름이나 그 상승 곡선을 바꿀 수는 없었다. 다만 내 마음속에 모든 혁명에 대한 혐오감을 더욱 강렬하게 심어놓았다. 그렇다고 반동이 되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불활성 물질처럼 피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늘 달리이고 싶었다. 내 주변에서는 하이에나 같은 여론이 내게 선택을 강요하며 짖어댔다. 히틀러냐, 스탈린이냐., 나는 오직 달리일 뿐이다.”
--->그의 나라 스페인이 내전과 세계 대전을 치루며 죽음과 파괴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달리는 르네상스라는 미래의 스핑크스에 대해 골몰했다. 그는 얼핏보기에 반인도주의적이다. 실용적인 실리주의의 세계에 반대하는 사치스러운 상상력의 복수의 카드를 내밀곤 하는 인물이다. 귀족적이고, 미학적이며, 편집증적이다. 이것이 그의 독창성의 전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