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도 길을 잃는다 - 창비장편소설
박정요 지음 / 창비 / 1998년 1월
평점 :
품절


 

나도 후배가 이 소설을 권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작가도. 작품도. 게다가 구입한 책이 최근 것인데도 아직 1998년이 초판인 상태이다. 제목에선 얼핏 ‘어른들은 몰라요’ 같은 청소년물 같은 분위기까지 느껴지는데...  읽어보기 전까지는 전말을 어찌 알았겠는가...


작품 속 면면히 흐르는 해학과 입심좋은 천부적인 이야기꾼의 나붓나붓한 전라도 사투리는 낯설지만 말맛이 오지게 좋다. 그리고 땅끝마을에 대한 유래. 배추 한포기 속 배추벌레가 징그러운 벌레 마법에서 풀려나 초록날개를 달고 훨훨 나비로 하늘을 날 듯이, 넓은 새벌이 원래는 바다였는데 꼬막이 되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가면서 바닷물을 물고가 바다가 뻘이 되어버려 생겨진 들판이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마을이 생겨 났다는 이야기에 신기해하며 밤잠을 설치는 여자아이가 주인공이다. 농림학교를 다닌데다 다소 낭만적인 데가 있던 아버지는 팔 남매가 태어난 때마다 기념으로 나무 한그루씩을 심었다는데, 이것이 바로 그 말로만 듣던 내내무 전통일 것이다. 첫딸은 벽오동 나무를, 두 번째 아들은 은행나무를 둘째딸이 태어났을 때는 살구나무를 셋째는 무화과나무를....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네의 풍속과 풍부한 토속어의 한없는 세례를 받게 되었다. 


전라도가 고향인 친구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고장 친구들은 초등 학교에서부터 대학 강의에 이르기까지 동학 농민 혁명과 그 정신을 기려 배운다고 했었다.


탐관오리들의 포악한 정치에 견디다 못해 힘없는 백성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서 관군에게 대항을 했다던, 녹두장군 동학군 이야기. 전쟁이 끝나고 난리가 평정되다보니 관군한테 대항했던 사람들이 모두다 역적이라. 그들과 그 후손들은 저기 땅끝 해남으로 밀려와 자리잡았던 것이었고,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거슬러 올라가는 지점이기도 하다. 


“앞으로 사는 것이 힘들 때마다 저 새벌을 봐라. 잘 보믄 끙끙 돌을 져나르고 둠벙을 파고 씨를 뿌리는 거인들이 보일 것이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대역죄인이란 누명까지 모든 것을 옛일로 돌려버린 어른들이시다. 느그도 그렇게 살어야 한다.”


그렇게 모여 살던 사람들이 6. 25 난리를 만나고, 제 편인지 남의 편인지 구분하기 위해 쏘아대는 총구에 에먼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 난리 중, 제가 살기 위해 같은 동네에서 같이 자란 친구들을 바닷물 속으로 밀어버려야 했던 사람이 있었다. 알고보니 그는 ‘나’의 아버지였다. 세상을 향해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의좋은 형제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몰래 가져다 나르던 아버지와 노인(바닷속에 밀어 죽은 친구들의 아버지)의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결국 아버지의 위선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 하루아침에 드러나 버린 것이다. 할머니는 인간의 도리를 다했노라 주장했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보상 심리에서 비롯된 것일 뿐. 마음 속에 죄책감을 그런 식으로 갚아왔던 것이다. 백일하에 드러난 아버지의 위선은 우리가 가난뱅이가 되고 아버지가 간첩 혐의를 받아 뼈가 녹는 고초를 겪고 이웃의 경원을 당하고 언니들의 앞길이 망가지고 ‘나’와 제남이가 외톨이로 소외된 그 어느 것보다 나쁜 일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아버지를 오래 전에 용서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번 굴절된 삶의 궤적은 한계 밖의 것이 되어버렸고, 아버지는 자신의 그런 생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다 못해 술의 힘을 빌린다거나 변명 한마디조차 없이,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해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끝내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고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묶었던 올가미와 궤적뿐 아니라 온갖 체제와 규범과 가치, 세상 자체를 부정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부지런하셨던 아버지가 맥아리 없이 드러누우시고 쓰다달다 말한마디 없으셨다.


검은눈에 나돌기를 좋아하던 ‘나’는 흉폭한 몇몇 일들을 겪으면서, 인간이란 도대체 구원이 없는 존재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토록 황당하고 조잡한 이념들의 올가미에 꿰어 허우적이다 결국은 그렇게 허무한 것으로 사라져야 한다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슬픈 짐승인 것 같은.


“산다는 건 그렇게 부질없이 길기만 한 지루한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핍박과 수고뿐이던 조상들의 삶도 아버지의 좌절도 잘못 꾼 나쁜 꿈인지 모르는 것이다. 노인이 왜 민들레가 보여준 그 텅 빈 것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말라고 했는지, 종일댁의 죽음도 보지 말라고 했는지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보아버렸다. 미래라고 해 봐야 양상을 달리한 그것들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아주 우울한 소녀였다.”


마무리를 우울하게 해 버린 것 같다. 이게 다가 아닌데, 이게 끝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조카 나대를 업고 들판을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태어난 이상 생존의 게임은 불가피한 것이고 우리는 어차피 아버지가 물려준 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아버지’는 아직도 저 들판 새벌을 서성이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를 통해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한번 태어난 이상 우리는 조상의 피를 다시 살고 극복하고 완성하는 과제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새벌은 아직 생명의 가망이라곤 없어 보이는 검은빛으로 낮게 엎드려 있다. 그러나 머잖아 햇빛 따뜻한 봄이 오면 겨우내 얼어붙었던 저 땅의 온갖 슬픔과 분노는 흔적조차 사라지고 푸른 새 생명들이 힘차게 솟기 시작할 것이다. 차갑고 사납던 바람의 기억은 그 생명들을 더욱 강하고 푸르게 일어서게 할 것이며 불불이 일어난 생명의 숲은 더욱 은성한 물결을 이룰 것이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leinsusun 2005-02-01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어난 이상 생존의 게임은 불가피한 것이다' - 끄덕 끄덕.
근데...아주 훌륭한 소설 같은데 좀 무거울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읽으면서 계속 고민을 하게 하는 소설....읽고 싶은데 약간의 두려움이...

icaru 2005-03-05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제가 무겁기그지없게 리뷰를 썼네요...
읽는 순간순간 나를 궁지로 내모는듯한 그런 작품...절대 아니예요..한때는 부유했던 집안의 팔남매 중 일곱째 여자아이가 '나'로 등장해 좌우대립과 남녀차별의 역사에 대해 눈떠가는 과정을 토속적인 느낌을 실어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지요~ 남도 땅은 한국근현대사의 축소판이더만요~ 음..

별다섯인 이유는, 몰랐던 작가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대어를 낚은 강태공의 심정이었답니다... 물론 후배를 통해서였지만...

hanicare 2005-02-0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들여 쓰신 리뷰. 복순이 언니님은 폭넓은 독서를 하시네요.덕분에 좋은 작가이름을 하나 알았네요.^^

미네르바 2005-02-0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가의 이름은 처음 들어보네요. 좀 무거울 듯 하지만 또 읽어보고 싶어지는군요. 님은 독서의 폭이 굉장히 방대해요. 문학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그래서 굉장히 부러워한다는...^^) 그리고 읽은 즉시 열심히 리뷰도 쓰시고. 참 부지런하신 것 같아요. 이 책 도서관에 있을까 모르겠네요. 최근에 책을 너무 많이 사서 이제 책사는 것은 자제해 보려구요.(잘 읽었어요. 추천!)

잉크냄새 2005-02-01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저한 자기 부정, 갈팡질팡하는 삶의 허우적거림...살아가면서 한번쯤 심하게 도전받고 유혹받는 부분이 아닌가 싶네요.

icaru 2005-02-01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니 케어 님.. 읽어 주셔서 그리고, 머리카락과 문장들을 쥐어뜯으며... 썼다는 걸 ..파악해 주셨네요..
미네르바 님... 제가 넓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도 깊지도 정확하지도 않다지요 ^^
저도 최근에 읽지도 않을 책을 너무 많이 사버려서 방바닥 여기저기에 책들이 지적난민처럼 널부러져 있어요^^

잉크냄새 님... 술로도 달랠 줄 모르는 철저한 자기 부정, 휴우.. 너무 강직해도 세상살기 어렵지 싶어요...

내가없는 이 안 2005-02-02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불이 일어난 생명의 숲은 더욱 은성한 물결을 이룰 것이다...
이 마지막 문장 너무 맘에 들어서 저 가지고 갑니다... ^^
가끔 마음에 남는 작가들 있어요. 저도 며칠 전에 읽은 소설이 하나 있는데, 순우리말이 데굴데굴 나뒹구는 공들여쓴 소설인데다 구성도 탄탄하지, 입심도 훌륭하지, 그런데 막상 그 작가, 제가 뭐라고 걱정이 되는 거예요. 책이 많이 팔리진 않겠다 싶어서... 그렇게 때려죽여도 가볍게 쓸 수 없는 작가들이 있더군요...

2005-02-02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02-0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라도가 고향인 친구의 말은 과장이 아닐까 싶네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말들을 통해서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동학운동이나 5.18을 마음 깊숙이, 그리고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교육받고 되새김질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제 기억 속에서는 특별한 가르침을 받아본 기억이 없습니다. 제 주변의 사람들이 좀 색다른 사람이었을련지 모르겠지만. 부마 항쟁이나 제주4.3 항쟁과 무게가 다를 필요도 없을테구요. 아마 피해의식이나 자존심 정도로 남겨져 있을련지는 모르겠습니다. 국사책을 보면서 광주학생운동에 스스로 자랑스럽게 느끼듯이, 내 주변의 고장에서 무슨 자랑스런 일이 일어나면 뻐기고 싶어하고,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면 창피스러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터이니 말입니다. 분명 지역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사건들이 있을 수 있으나, 단순히 그 지역색으로만 보아서는 안될 거대한 흐름같은 것도 함께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체 리뷰와 상관없는 지엽적인 것에 마음이 쏠려서 그만... 으, 이것도 어쩜 또 다른 피해의식 비슷한 것일련가 모르겠네요.^^;

icaru 2005-02-0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네~ 하루살이님...
제 친구는 고향이 익산인데~ 그 친구에게는 그랬나보아요~ 정말 지엽적인 이야기지요... 제가 리뷰에 그렇게 쓰고 나니, 일반화가 되어버리고...선입견의 단초을 제공했는가요..?? 앗 나도모르게 그만, (이거 복학생 멘트 아니고요...^^;;)

저 부분을 쓰면서..좀 걸린다 싶었는데.. 하루살이 님께...딱 걸렸어요!!!

icaru 2005-02-03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 저도 이 작가의 작품을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좋은 소설이었어요~ 진짜....
하지만...현실은...그렇죠... 좋은 소설과 잘 읽히는 소설은 따로따로 인거 같아요...

토란잎 2008-12-21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최근에 이 소설가를 잘 아는 후배가 권해줘서 지금 주문했어요.
님의 독후감 읽으며.... 빨리 읽고 싶어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