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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림원 / 1999년 11월
평점 :
품절
옮긴이는 이 책을 사랑과 섹스와 결혼의 상관 관계 내지는 그 모순을 다룬 소설로 일목요연화시켰지만, 내게는 좀 다르게(아니 같은 건가,) 읽혔다. 남보기엔 부러울게 없는 30대 후반 남자의 뒤늦은 정체성 찾기의 스산스러움 뒤의 감회랄까.
30대 후반의 주인공 하지메는 자신 안에 결락이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치명적인 굶주림과 같은 허무이다. 왜 이런 결락이 생겼을까. 그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언제나 어떻게든 다른 인간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늘 어딘가 새로운 장소에 가서, 새로운 생활을 손에 넣고, 거기에서 새로운 인격을 갖추려고 해왔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장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퍼스너의 교환 같은 것이었다. 8년을 지겹게 교과서 편집을 했지만, 유키코를 만나면서 튼실한 재력을 갖춘 장인까지 얻게 되었고, 독창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없고 지겹기 짝이없던 그 일을 과감하게 접는다. 장인이 차려 준 가게를 늘리고 제법 규모있게 운영해가고, 딸아이 둘에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때로는 장인으로부터 고급 증권 정보를 얻어듣고, 고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그의 결혼 생활은 그야 말로 아무 문제는 없고 평탄했고, 모든 것이 너무나 순조로웠다. 하지만 이게 문제였다.
20년전 어린시절 속에 각인된 여자 친구가 어느날 카페에 등장하는 것으로 차츰 정체성이 흔들린다.(아니 반대로 정체성 없이 살았던 것을 자각하고는 결혼 생활 동안 자신의 생활 속에 평안함은 있었지만, 열정이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20년전의 영원한 여인상 시마모토를 통한다면 빈 가슴을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세상은 그런 게 아닌 것이다.)
홀연 시마모토도 떠나고, 하지메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본래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현실에 다시 충실하게 되기를 아내 앞에서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말을 한다. 다시 한번 당신(아내)에게 상처를 입히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하겠노라고.
인생의 서른 후반이 되면 어떤 감정의 국면을 달리고 있을까. 그 즈음이 되면 독자 또한, 문득 이렇게 지금까지 꾸려온 것은 껍데기인 것만 같고, 느닷없이 나타난 누군가의 옆얼굴에 처자식(?)을 버려도 좋다는 생각을 먹을수도 있게 될까? 아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심심한 상상을 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