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 개정판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2001년 9월
평점 :
절판


 나의 친한 벗이 말하기를, 자신이 살아온 나날 중에서 들었던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은 고등 학교 다닐 적 어느 선생님의 우연한 다음과 같은 한마디였다고 한다.

“너희들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가 되거나 그런 인부의 아내가 될 것이다.”


친구의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시는 인부였다. 친구의 아버지는 우직한 농사꾼이셨지만 자식들의 학업을 위해 시골에서 농사를 접고 서울로 상경하시었었다. 배움이 없고, 가진 기술이 없어 공사장 막일로 아내와 자식들을 건사하셨지만, 부지런하시고 정직한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를 사회에서 패배한 낙오자 정도로 일갈하는 선생님에게 친구는 뭔가를 보여 주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고, 기분이 퍽 가라앉음을 느꼈다. 이 글은 전태일 자신인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 대해 고(告)함이다. 전태일은 독자인 나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사람이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전태일에게, 그리고 이 평전을 기술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조영래의 사랑과 투쟁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느낀다.


노예로서의 고통과 굴욕으로 가득 찬 지루한 나날을, 아무런 의의도 보람도 기쁨도 없는 껍데기의 삶을 애걸하며 또 애걸하며 비루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쉽게 사로잡혀 있는 약한 자인 나에게 “인간의 존엄을 버리지 않고 인간다운 대접을 요구하며 싸우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었다. 

 

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가? 왜 눌린자는 계속 눌리어 살아가는가?

 

여기 고통 받는 한 사람의 의식을 살펴보자. 그가 태어났을 때 고통에 찬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 현실 속에서 자라나면서 그는 그 현실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에게 강요된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사실은 바로 ‘인간’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된다. 이 거대한 힘에 비하여 볼 때, 자기 자신은 너무나도 약하고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로 느껴진다. 조만간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현실의 사회 구조와 질서 앞에 무조건 머리를 수그리고 거기에 순응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고 느끼게 되며, 따라서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기가 죽어서 비굴해진다. 현실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무모한 짓으로 되며, 자신에 대해서는 불성실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도덕으로까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비판 정신의 싹은 자신의 의식 속에 싹트기도 전에 잘라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명령, 모든 가치관, 모든 선전을 받아들여 순한 양이 된다.

 

전태일이 위대한 것은 순한 양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든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스스로 “불행한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과거는 너의 영역에서 영원한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정도로 불우한 환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해주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장기표 씨의 후기에서 “인간이 명석하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전태일을 보면서 민주화를 생각한다. 민주화란 무엇일까? 이 글에서 조영래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흔히 수없이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줌도 못되는 소수의 억압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말하며 또 그러한 사례를 수없이 본다. 영화 같은 데서 수많은 노예들이 채찍에 시달리며 묵묵히 중노동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때 어째서 저 많은 노예들이 불과 몇몇의 감독자들에게 굴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 본다. 인간 사회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실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사회적 민주화의 장애가 되고 있는 나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원인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특히 들어볼 만한 설명은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는 아무리 많아도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이야기해야 할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노예 의식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노예 의식을 벗어던지고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정당한 권익을 위하여 주장하고 투쟁할 결의에 차 있다면 그들의 조직화는 시간 문제일 것이며 조만간에 그들은 ‘조직화된 다수’로서 ‘조직된 소수’인 억압자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민중 운동의 전진이며, 이것이 바로 민주화이며, 어떻게 보면 이것이 바로 진보인 것이다.

 

 

밑줄 그은 문장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 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것일세.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재단사 일자리에서 쫓겨난 전태일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어느 인부를 보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아의 좁은 환상에 집착하여, 그 속에 밀페되어 껍질을 쌓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참으로 소망할 수 없다. 일상 생활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희망하고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부와 권력과 명예와 미모의 이성과...... 그러나 그것들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더욱 처절한 고통과 고독의 심연으로 몰아넣는 허구의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탐욕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전태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268쪽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04-05-27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류의 숭고한 의미를 내포한 책들은 함부로 말하기가 참 어려운 일이죠.
"순한 양이 되기를 거부한다." 사회의 모든 가치관에 스스로를 기계 부속인양 맞추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많은 의미를 주네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icaru 2004-05-27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에... 정말 좋은 책이었습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전..이런 책의 리뷰는 밑줄긋기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네요....내내 그러네요~!

설박사 2004-05-27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태일이 20대 초반에 자살을 했지요? 저도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 구조적 부조리함에 대해서 많이 느끼지만... 글쎄요... 제 생각에는 전태일이 살아있었으면 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hanicare 2004-05-28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태일 평전과 노자의 도덕경.두 권 모두 읽고 난 뒤의 세상이
읽기 전의 세상과 달라져 버렸던 책이었고, 뭐라 아직도 정리할 수 없는 책이군요.아마도 용기를 내어 쓰신 리뷰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icaru 2004-05-2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설박사님...음....님은 기독교인이셔서(맞죠?), 죽음이라는 수단을 택한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법합니다...아..음..전태일의 죽음은 일단 개인적인 울분의 자살이 아니었구요....해도해도 방법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마침 박정희 정권을 존속시키려는 선거철을 당하여.....전태일이 제시하는 근로기준법에 맞게 처우를 개선해 주겠다고 기업주들이 거짓 약속을 했지요....그래서...전태일은 궐기를 보류하기도 했었어요...하지만..선거가 끝나고 박정희가 당선되자 언제 그런 약속이나 했냐는듯...기업주들은 돌변했죠....그래서...전태일은 목숨을 내건 시위를 했던 거지요...목숨을 내걸었기에...그나마 오늘날처럼 처우가 약간 개선되었을듯해요..

icaru 2004-05-28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anicare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압니다....예...저도 충격이고 감동이었습니다...이 평전이 제 마음을 어지간히도 들쑤시더군요....님도 아직 뭐라 정리를 못하고 계시다고요....아..님의 말씀처럼...저 또한 책에서 받은 감동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도 못하네요....이 내용 정리...곧 '리뷰'라는게요...^*

2004-05-30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4-05-3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언니님, 이 책 참 부끄러운 마음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전히 전 그 모양으로 살고 있지만... 조정래님, 전태일님, 읽는 내내 가슴을 쥐어짜더군요. 님의 리뷰, 그리고 고등학교 적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

icaru 2004-05-3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배혜경 님께서 친히(?) 코멘트 남겨 주셔서..더없이 기쁘네요 ^^
아...저도 이 책을 읽고 조금이라두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여 본답니다....

책읽는나무 2004-06-01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책들은 가슴이 아프고 숙연해지는 그느낌을 글로 표현한다는것이 참 어려운데...님의 리뷰 멋지군요!!.....님의 그가슴아픈 느낌이 바로 전해지는듯합니다......ㅡ.ㅡ;;
물론 전태일의 죽음을 다시 한번더 생각해보아야할 문제이기도 하구요!!...요즘은 노동자들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생각이 참 많아지네요.....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한순간에 해결되지 못하는것이 아주 그냥 체기가 생긴것같이 답답할따름입니다....ㅠ.ㅠ
리뷰 잘읽고 갑니다.........^^

icaru 2004-06-01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책읽는 나무 님...좋게 읽어 주시니...정말 기뻐요^^
너무 인용만 해댄 것 같아, 조금 부족한 글이지 않나 싶었지요..

설박사 2004-06-02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의 리뷰에 당선되셨네요. ^^ 축하드립니다.

icaru 2004-06-02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고마워유~! 박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