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거포스트, 1663 - 보급판 세트
이언 피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핑거포스트”가 이렇게 대단한 작품일지, 일단 읽어보지 않고 어떻게 알겠는가? 이런저런 매체에서 아무리 광고를 해대도 내 머릿속에서의 “핑거포스트”는 마케팅에 “티핑포인트”와 혼선을 빚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마케팅 용어가 웬 역사 추리 소설 제목에..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참 무식한 건데..)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소설의 역사적 배경은 내란과 혁명, 공화정의 실험으로 범벅된 17세기 영국이고, 살인 사건의 배후에는 역사적 진실이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의회파와 왕당파의 갈등, 국교회와 가톨릭 사이의 갈등 신학과 철학 대 근대 과학과 의학의 충돌(합리적 이성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 등) 등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가 있기도 하다.  

 

이 책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4명의 인물이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을 서술한다.

 

1장에 서술자 '콜라'는 붙임성 있고, 친절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호감을 갖게 하는 순진하고 선량한 과학도이지만, 과연 이 모습이 진실일까. 베네치아 출신의 이방인 콜라와  영국인 의사 로어는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둘 사이에 끈끈한 우정이 싹튼다. 그러나 오해와 다툼이 생기고 결국엔 그 오해를 풀지 못하고 헤어진다.  이 둘의 이야기가 흥미로운데 서로 다른 말을 하고 다른 결론을 내고 있지만, 각각은 모두 진실이다.  

2장을 읽는 독자들은 서술자 '잭 프레스콧'을 교수형 직전까지 갔었지만, 풀려나고 파란만장한 과정 끝에 한 재산 모은 재력가로 자신을 소개하기에 그런 줄 알지만, 사실은...

3장에는 암호 전문가이자 수학자 '월리스 박사'가 증거를 서술한다. 수학을 통해서만 완벽의 기쁨을 느끼고 오직 관념을 사랑할 뿐 마음이 너무 맹목적이다.  범인이 노린 사람은 자신인데 그로브가 대신 죽었다는 수위가 지나친 망상에서 시작하여 복수를 하려는 데까지 이어지니, 적잖이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4장의 서술자 '우드'의 이미지는 이미 1장을 읽을 때, 콜라에 의해 '수다쟁이요, 소심쟁이인데다가 고발쟁이인 향토 사학자" 정도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급수정을 해야 했다. 앞의 3명은 자신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범인을 지목한다. 4장에 나오는 인물은 자신이 “범인을 폭로해봤자 얻을 게 전혀 없는 완벽하게 독립적인 목격자”라면서 앞에 나온 인물들의 증언을 종합하며 진실(?)을 밝힌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베이컨은 다양한 범주의 증거를 조사하여 그것이 모두 결함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어떤 증거도 확실성을 갖지 못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역시 각각의 증언들은 시장의 우상, 동굴의 우상, 극장의 우상에 빠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읽어가야 한다. 여기서 종족의 우상은 빠져 있는데, 과연 4장을 종족의 우상을 염두하고 읽을 것인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바.


이 인물들 외에도 언급하지 않으면 큰일(??)나는 중요한 인물이 있다. 바로 사라 블런디.

콜라에게는 호감이 가는 동정의 대상으로 서술되고, 잭 프레스콧에게는 주술을 걸어 자신을 괴롭히는 마녀로, 월리스에게는 자기가 잡아 처단하려는 급진파의 주요 인물이고, 우드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었던....

 

물론 이렇게 사람마다 다양하게 해석되는 인물이 사라 블런디만이랴. 살인을 당한 그로브 박사 또한, 월리스 박사는 호감가고 배려 깊어 우정을 나누었던 인물로 진술하였고, 우드는 상대를 곧잘 비참한 기분에 빠져들게 하고 자신은 타인의 고통에서 오히려 매력적인 기쁨을 느끼는 잔인함의 예술가로 진술하고 있으니.

 

그리고, 실존 인물 중에 과학책에서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하여, 우리가 잘 알 법한 "로버트 보일"이 나오는데, 이 인물은 예외로 네 사람 모두 사려 깊고 명석한 사람으로 진술한다. 과학자인 동시에 신학자의 면모를 갖춘 무지 훌륭한 사람으로...(그러나 사건과는 별 관련이 없고 주인공들의 조력자 쯤의 역할을 하는 인물)

 



416쪽

'인류가 악에서 벗어나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될 때까지, 세대가 바뀔 때마다 메시아는 다시 태어나고, 다시 배신당하고 죽고 부활할 것이다.' 이것이 그가 한 말이었다. 사라도 불과 며칠 전에 똑같은 말을 했기 때문에, 나는 이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놀랐다.




454쪽

“그 여자는 결백합니다. 저는 그걸 알고 있습니다.”

간단한 문장이었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것은 벼랑 끝까지 걸어가서, 필연적으로 뒤따를 파멸의 구렁 속으로 내 몸을 내던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결코 내가 용감하거나 고결하거나 불굴의 정신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놈인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나는 영웅이 되도록 태어나지도 않았고ㅡ 후세가 귀감으로 삼을 만한 위인도 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나보다 나은 사람이라면 좀더 일찍 그 말을 했을 테고 진땀을 흘리며 부들부들 떠는 나보다 좀더 품위 있는 태도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타고난 분수가 있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수밖에 없다. 나는 겨우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고, 나보다 용감한 사람들은 비웃을지 모르나 그것은 내 평생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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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6-25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멋지 책이? 그랬답니다^^

icaru 2007-06-25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 님에게 역시 그랬군요 ^^
보통...전 이 정도 두께면 염증을 내고, 치워버리는데... 이책은 흠..

비로그인 2007-07-16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한 작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