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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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성적욕망처럼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것은 망자와 산자를, 실존하는 존재와 상상의 존재를, 꿈과 역사를 결합한다. (14쪽)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해 주는 문장들을 노트에 적으면서-진정한 행복은 우리가 그것을 느낄 때 깨닫는 것이다. (78쪽)

우리는 정해진 이 미래 앞에서 막연히 오랫동안 젊음에 머무르기를 바랐다. 연설과 제도는 우리들의 욕망보다 뒤처졌고, 사회가 말로 표현하는 것과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사이릐 격차는 당연했으며, 그것은 메울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95쪽)

그녀에게 학업이란 가난에서 벗어나는 수단만이 아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여성성의 담보와 한 남자에게 빠지는 유혹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특별한 무기다. 결혼할 마음도,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고 모성애적인 행동과 지성의 삶은 양립할 수 없다고 여긴다. (107쪽)

그녀가 진짜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녀가 혼자 있을 때나 아이와 산책할 때 찾아온다. (중략) 그녀 자신에 대한 질문들, 존재와 소유, 실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121쪽)

우리들의 인생을 다시 돌아봤고, 남편과 아이들을 떠날 수 있음을,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그리고 잔인한 것들을 쓸 수 있음을 느꼈다. (137쪽)

지방에서 파리 지역으로 오면서 시간은 가속화됐다. 감정이 유지되는 시간이 달랐다. 저녁이 오면 신경이 곧두선 학생들과 모호한 수업을 했을 뿐,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았다. 파리 지역에 산다는 것은, 차로만 다닐 수 있는 도로망으로 혼잡해진, 지리학을 벗어난 영토에 던져지는 것이다. (158쪽)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책 한 권이 저절로 써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마무것도 없다. (178쪽)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나]와 [그녀] 사이의 선택이다. [나] 안에는 너무도 확고부동한 것들, 편협하고 숨 막히는 무언가가 있고, [그녀] 안에는 너무 많은 외재성과 거리감이 있다. (225쪽)

아노미가 이겼다. 지적인 구별의 표식으로서 언어는 더욱 현실감을 잃었다. 경쟁력, 불안정, 고용적격자, 유연성은 분노를 일으켰다. 우리는 정돈된 담화 속에 살면서 그것을 거의 듣지 않았다. 리모컨은 지루한 시간을 단축시켜 줬다. (228쪽)

우리는 어른이 된 그 아이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들을 결속하는 것은 피도 유전자도 아닌, 다만 함께 보낸 수천 번의 나날들, 마로가 몸짓, 음식들, 차를 타고 다닌 거리, 의식한 흔적 없는 다수의 공통된 경험들의 현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240쪽)

우리는 늙지 않았다. 우리 주변에 있는 어떤 것도 노화에 이를 정도로 충분히 오래가지 못하고 교체됐으며, 전속력으로 재개발됐다. 기억은 그것들을 삶의 순간에 결합시키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 (248쪽)

그녀는 하나씩 차례로 떠다니는 인생의 여러 순간 속의 자신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의식과 그녀의 육체를 사로잡는 낯선 본성의 시간이며, 그녀였던 모든 존재의 형태들이 순식간에 되돌아오는 듯한, 현재와 과거가 뒤섞임 없이 겹쳐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255쪽)

뒤섞인 개념 속에서 자신만을 위한 문장,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외치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문장을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278쪽)

해가 다르게, 아니 달이 바뀔 때마다 그녀를 둘러싼 세상은 변함이 없는데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된다고 확신했었던 사춘기 때와는 반대로, 이제는 그녀가 달리는 세상 속에서 부동의 자세로 있는 듯한 느낌이다. (293쪽)

어쩌면 언젠가는 사물들과 그것의 명칭이 불일치를 이루고 그녀가 현실을 명명하지 못하게 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재만이 남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바로 지금, 글로써 미래의 자신의 부재를 형태로 만들어 놓아야 하며, 20년째 자신의 분신이자 동시에 앞으로 점점 더 긴 시간을 보내게 될, 아직 미완성인 수천 개의 메모 상태에 불과한 이 책을 시작해야만 한다. (298쪽)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시대에 이 땅위에 살다간 그녀의 행적을 이루고 있는 기간이 아니라 그녀를 관통한 그 시간, 그녀가 살아 있을 때만 기록할 수 있는 그 세상이다.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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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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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혼자라고? 은둔하는데 명랑하다고? 그런 모순이 어딨어! 그건 불가능해! 안타깝게도, 이런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41쪽)

나는 원래 숫기 없는 성격이다. 카인과의 소통을 늘 부담스럽게 느껴왔고, 앞으로도 아마 어느 정도는 계속 그럴 것이다. 따라서 나는 혼자 있는 걸 늘 대단히 편하게 여겼지만, 그러면서도 그 상태를 만끽할 줄은 잘 몰랐다. 혼자 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초조해지지 않는 것, 연애의 틀 밖에서도 안락과 위로의 인정을 얻을 수 있다고 느끼는 것, 내가 가진 자원만으로도 -나라는 사람, 내가 하는 선택만으로도- 고독의 어두운 복도를 끝까지 걸어서 밝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 이런 것은 잘하지 못했다. (49-50쪽)

내가 마이클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특질들은 대개 나 자신에게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특질들이다. 마이클이 완벽하지 않다면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면- 당연히 나도 완벽하지 않다. (80쪽)

타인에 대한 화가 자기 자신에 대한 화를, 자신에 대한 불편함을 반영할 때가 많다는 말은 진실이라도 생각한다. (중략) 어머니라는 사람, 딸이라는 사람, 서로 상대가 이런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모습, 그 사이를 잇는 선들은 서로 교차하고 엉클어지고 겹쳐지기 일쑤다. (150쪽)

내 경우의 이 공허함은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만족스럽거나 안정적이라고 느끼기 위해서, 나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186쪽)

우리는 각자의 부모에 대해서 오랫동안 남몰래 화낸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아닌지,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지. 우리가 어떤 실망과 단절을 겪었는지, 그들이 우리를 키운 방식이 왜 이렇게 꼬여 있었는지, 이 모두에 대해서 화낸다. 이 괴로움을 놓아버리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고, 자기 인식과 성숙함과 시간이 절묘한 비율로 섞여야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혹은 왜 그 일이 가능해지는지, 부모에 대한 복잡한 감정에서 가장 아픈 모서릳르이 깎여 나가는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192쪽)

내가 그런 일을 가능케 할 만한 행동을 했던 게 아닌지, 사귀고 싶다는 신호라도 내보냈던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내보낸 것은 다른 신호들이었을 것이다. 불안정의 신호,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의 신호,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갈망의 신호, 이것은 강력한 감정들이고, 어떤 사람들은(어떤 남자들은) 이런 감정을 포착하는 능력이 남다른 것 같다. 그들은 인정 욕구를 정확히 가려내고 대상에게 접근한다. (249쪽)

어느 구석을 보나, 어느 표면을 보나 거기에는 수십 년 치의 감정이 숨어 있었다. 그러니 내가 내 집에서 발휘하는 정리벽은 그에 대한 아주 강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내가 내면의 무질서와 격변처럼 느낀 상황에 대한 방어 행동이었다. 그것은 두려움에 압도된 나머지 통제력을 갈구하는 행동인데, 나는 과거에 거식증을 겪을 때도 그랬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혼돈으로 느껴질 때, 우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을 통제하려고 든다. 무엇이든 좋으니 무언가를 이를테면 자신이 섭취하는 칼로리를, 자신의 몸무게를, 자신의 환경을, 공황에 빠진 사람은 이상한 짓도 하게 된다. (267쪽)

근육을 혹사함으로써 다른 상태가 되고 싶은 바람, 그와 더불어 충분함에 대한 의문으로 괴로워하는 마음마저 없애버리고 싶은 바람이다. 운동은 얼마나 열심히 해야 충분할까? (중략) 대체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지? (중략) 운동이 나 자신을 벌주는 방법, 말 그대로 나 자신을 때려눕히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311-312쪽)

우리의 마음 또한 여러 면에서 하나의 근육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체육관에서 운동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체육관 밖에서도 돌봐야 하는 근육이라는 것이다.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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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시 말들의 흐름 3
정지돈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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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이름만으로 사랑에 빠지기.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애정이자 무언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15쪽)

나는 대부분의 영화를 컴퓨터 모니터로 봤고, 요즘은 핸드폰 액정으로 본다. 이건 어떤 면에서 독서와 동일한 개념이며 그래서 많은 경우 내게 영화는 책이기도 했다. 파일화된 영화는 언제나 멈출 수 있고 다시 볼 수 있으므로 그건 나를 자유롭게 했다. (17쪽)

그러므로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영화와 시를 좋아하는 것(또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 내 과제다. 즐기고 공감하고 감동받는 것으로 끝내기. (인디아나 존스)를 보던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19쪽)

뉴욕의 일상과 점심시간이라는 찰나 동안 잠깐 부상했다 사라지는 감각을 포착하는 데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의 중요한 특징은 무엇보다 자신의 사소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있다. 그는 냉소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스스로도 냉소적이라고 말했지만 (중략) 그는 삶의 사사로운 요소들에는 냉소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열광적이었다. 무언가가 지속되고 확장되며 정립되어야지 의미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에 냉소적이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시가 영원이나 상징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리얼리티‘이길 원했다. 시는 시를 읽는 지금 이 순간 삶과 함께 일어나는 일이다. (64-65쪽) * 그 = 프랭크 오하라

내가 과거에 좋아햇던 이 책을 지금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축자적 의미에 공감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말이 나왔던 세계에 감응하기 때문이다. 거창하고 확신에 찬 말, 우울하고 울분에 찬 말, 자조적이고 냉소적이고 아름답고 비참한 말, 모든 시대는 모든 시대를 꿈꾸게 한다. 이러한 종류의 꿈은 서로 다른 맥락과 선으로 얽혀서 옳고 그름을 구분하기보다 선들의 흔적을 쫓아가는 것에 의미를 둬야 한다. (90쪽)

브로드스키의 방식은 사람들 사이로 점점 퍼져나갔다. 다시 말해 (1)사회의 전형적인 롤모델을 따르지도 않고 (2)사회를 비판하거나 저항하지도 않으며 (3)자신만의 시공에 존재하기. (중략) 이런 식의 행위 모델을 알렉세이 유르착은 담론장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대신에, 그것을 내부로부터 탈영토화시키는 또 다른 전략이라고 말한다. 대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일탈이 주류가 될 때에야 비로소 근원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110쪽)

낡은 시네필리아는 미학적 즐거움을 특권화했고, 이는 영화를 가치 매기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네필리아는 영화의 즐거움과 가치에 관한 더욱더 폭넓은 개념으로 영화를 본다. 주변화된 사람들의 삶, 주체성, 경험, 세계가 곧 그들의 중심이다. (130-131쪽)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방향성이다. (중략) 모른다는 것은 몇 안 남은 축복이다. 알아가는 것은 몇 안 남은 기쁨이다. 대상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대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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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인문학 - 서울대 교수 8인의 특별한 인생수업
배철현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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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들 중 하나는 인간만이 최선을 상정하고 그것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선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19쪽)

우리는 인문학적 소양을, 내가 더 강해져 남을 쉽게 이기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 번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을 배웁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배우는 이유는 나 자신을 벗어나 남의 입장에 서보는 연습을 함으로써 인간 마음에 내재한 ‘컴패션‘을 ‘밖으로 꺼내기e-ducation‘ 위함입니다. 최고의 인문학적 소양이란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암기나 이해가 아니라, 바로 자신을 없애고 타인을 내 삶의 중심으로 삼는 ‘컴패션‘입니다. (35쪽)

인류 역사상 오랜 기간 동안 우리는 ‘잘 사는 것‘에 대한 평가를 사회적 기준에 의해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별 이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더 이상 사회적 기준이 적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객관적 상황이 아무리 나빠지더라도 내가 행복하다고만 생각하면 나는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은 거꾸로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면 나는 어떤 조건에서도 결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나는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해서 실제로 행복해질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59쪽)

미움의 대상은 이미 내가 볼 수 없는 다른 곳에 있거나 아니면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미워하는 감정을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이 힘든 게 아니라 내가 힘든 게 현실입니다. 따라서 미워하는 감정을 해결해야 하는 건 온전히 내 몫입니다. 그러니 그 짐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자비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70쪽)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치열했던, 너무도 격렬했던 분노의 끝은 그래봤자 ‘죽음‘이라는 것이지요. (120쪽)

아무리 치욕적이고 부끄러운 과거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기억하고, 반성하고, 성찰하고, 교육할 때에만 지나간 역사는 오늘날 새로운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171-172쪽)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은 서구인들이 자기 중심적인 시각에서 동양에 대해 갖는 편견을 말하는데, 우리 또한 알게 모르게 그런 서구중심주의에 물들어 우리 안에 오리엔탈리즘이 깊숙이 자리 잡게 됩니다. 사실 그것이 무서운 일이지요. 스스로를 긍정하지 못하고 비화하는 것 말입니다. (202쪽)

여기서 남과 북은 구체적으로 후진국(약소국)과 선진국(강대국)을 가리키는데, 이 글에 ‘예외La exception‘라는 제목이 붙여진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남과 북이 여전히 동등한 조건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새로운 시각으로 라틴아메리카를 바라고보고자 하는 시도들의 궁극적 목표는 이런 예외적인 상황을 보편적 현실로 변화시키는 실천적 작업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4쪽)

‘탄생‘은 본인의 선택일까요? ‘탄생‘은 선택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삶‘은 선택일까요?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크든 작든 선택의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은 어떤가요? ‘죽음‘은 선택일까요?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는 죽음 이후의 삶을 알 수가 없습니다. (247쪽)

인간은 진리보다는 정신적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권위주의적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정신적으로 성숙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권위에 대해 무비판적이 되게 만들고 또한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나 이데올로기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인간이 되게 합니다. (299쪽)

이러한 소유양식의 반대가 존재양식인즉, 존재양식의 삶을 살 때 사람들은 다른 인간들이나 사물들과 대립되는 협소한 자아에서 탈피해 자신뿐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자의 신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다른 인간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며 그들의 성장을 도우려고 합니다. 소요양식은 쾌감을 낳는 반면에 존재양식은 기쁨을 낳습니다. (중략) 기쁨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304-305쪽)

현재의 시간은 항상 과거로 넘어가기에 현재는 항상 지나가 없어져버린다는 말이지요. 다른 각도에서 보면, 시간이 비존재를 향해 간다는 것은 곧 시간 속을 사는 우리는 지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존재인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즉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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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누구인가? - 시대가 묻고 신학이 답하다
김동건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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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론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서술하거나 진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략) 서술의 방법도 신앙적 고백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논리와 근거를 제시하는 방식입니다. (15쪽)

삶이 달라지면 인간의 종교성과 그에 응답하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당연히 기도하는 방법, 신앙을 고백하는 형식이 달라지고, 설교를 듣는 신자들의 마음의 자세도 달라집니다. (23쪽)

매 시대는 성성의 그리스도와 대화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문화 안에서 새롭게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때 그리스도는 생기 있고 살아 있는 방법으로 그 시대에 현재합니다. 과거의 그리스도론이 새로우 ㄴ시대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 시대와 괴리가 있는 그리스도론은 활기를 잃은 그리스도론이며, 그런 그리스도론으로는 그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그 시대와 대화할 수 있는 그리스도론이 없으면, 기독교인은 활기를 잃게 되고, 자신의 시대에 해야 할 소명과 과제를 상실하게 됩니다. 교회가 시대정신과 괴리가 있을 때 위기가 오고, 반면 교회가 살아 있는 선포는 역사를 바꿉니다. (26쪽)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 나라라는 종말론적인 지향점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역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의 섭리와 구원은 ‘역사적 구조‘를 가집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이 역사 안에서 체험됩니다. 구원은 역사와 시간을 벗어난 구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구원은 이 세상으로부터(from)의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과 함께(with)하는 구원입니다. (57-58쪽)

이제 교회는 구원이 삶의 다양한 차원에서, 즉 사랑의 행위, 정의로운 행위, 선한 행위, 생명을 살리는 행위 같은 삶의 영역에서 체험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66쪽)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현재 역사 안의 가능성에 따라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그것이 옳으면 행합니다. 즉 종말론적인 신앙은 미래에 명목상의 개념으로 존재하는 거싱 아니라, 현재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74쪽)

즉 인간은 신앙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기다리며 서두르는 관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며 오류입니다. 인간은 서두르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변증법적 관계 안에서, 어느 순간 인간은 하나님과 결정적인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87쪽)

목회자가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교인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방향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배만 드리는 공간이 아니라, 교회에서 배운 신앙을 삶에 적용하는 훈련을 제공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중략) 교인들도 끊임없이, 성서의 말씀과 교회의 선포를 자신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삶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할지를 고심해야 합니다. 신앙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그냥 성장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삶 속에서 훈련됩니다. 훈련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관이 세워지고, 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100쪽)

성서에는 신앙적 선포도 있고, 교리적인 것도 있고, 신학적으로 설명해야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중략) 한국교회의 문제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믿음‘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신자들의 자신의 시대 속에서 마주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 그 대부분은 ‘신학적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신자들의 의문에 대해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치부하면 안 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교회는 신자들에게 신뢰를 잃게 되고, 교회의 사회적 역할도 위축됩니다. 목회자는 이 시대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답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21세기의 목회자는 영성과 지성을 겸비해야 합니다. (101-102쪽)

즉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으로 오용했습니다. 악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죄성, 인간의 사악함, 그리고 피조세계가 가지는 한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모순된 현실의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6-107쪽)

하나님이여, 왜 악을 허용하십니까? 이렇게 물을 것이 아니라, 질문은 우리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허용했는가? 왜 우리는 악과 타협했는가? 이런 큰 물음 외에도, 수도 없이 많은 질문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의 삶 속에 던져입니다. 우리는 왜 가정폭력을 눈감고 있는가? 왜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친구를 외면하는가? 왜 세제를 함부로 사용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를 파괴하는가? 이것이 죄입니다. 이 모든 무책임함이 모여서 악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때로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형태로 폭력, 증오, 살상과 같은 악의 현실이 불현듯 발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명 속에서, 악한 현실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모순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원인을 찾아 담대히 맞서고 이겨내야 합니다. 이것이 악한 현실과 부조리 앞에 선 기독교인의 살아 있는 신앙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출발입니다. (109-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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