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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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건너편에 도착했다. 난 문제없이 해냈다. 지금껏 멀리서만 봤던 오두막이 몇 걸음 앞에 보인다. 저 멀리 남편과 내 아이들의 모습이 까마득하다.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호수를 건너자 내가 알던 호숫가는 건너편이 되었다. 이쪽이 저쪽이 된 것이다. (중략)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빠져들려면 기슭을 떠나야 한다. 구명대 없이, 뭍에서 몇 번 젓는지 세지만 말고 말이다. (13쪽)

이제 이 작은 사전은 부모라기보다 형제 같다. 여전히 내게 필요하고 아직도 날 이끌어준다. 사전에는 비밀들이 가득하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18쪽)

많은 열정적인 관계가 그렇듯 이탈이어에 대한 내 열광은 애착,집착이 될 터였다. 이성을 잃은, 응답받지 못하는 뭔가가 늘 존재하겠지. 난 이탈리어와 사랑에 빠졌지만 내가 사랑하는 대상은 내게 무관심하다. 이탈리어는 날 절대 갈망하지 않은 거였다. (22쪽)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일종의 추방에 익숙해져 있다. 모국어인 벵골어는 미국에서 보자면 외국어다. 자신의 언어가 외국어로 생각되는 나라에서 살아갈 땐 계속 기묘하고도 낯선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25쪽)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외부에 언제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더는 사전이나 메모장, 펜이 필요 없는 날을 꿈꾸고 살아야 할까? 내가 영어로 책을 읽듯이 도구 없이 이탈리아어 책을 읽을 수 있는 날을 꿈꾸어야 할까? 이런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는 게 옳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르는 게 많아도 나는 아주 활동적이고 열심인 이탈리아어 독자면 족하다. 나는 노력을 좋아한다. 한계가 있는 조건을 더 좋아한다. 무지가 어떤 식으로든 내게 필요하다는 걸 안다. (42쪽)

하지만 메모장에 단어들을 모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다. 나는 모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싶다. 필요할 때 단어를 퍼 올리고 싶다. 단어에 닿고 싶다. 단어들이 내 일부가 되게 하고 싶다. (47쪽)

자신에 대한 믿음과 권위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나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데 작가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는 구속받고 제한받는데도 왜 더 자유롭다고 느끼는 걸까? 아마 이탈리아어에서는 불완전할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리라. 왜 불완전하고 빈약한 이 새로운 목소리에서 매력을 느끼는 걸까?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피난처에서 노숙자나 다름없이 살기 위해 훌륭한 저택을 포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리라. (73쪽)

나는 왜 글을 쓸까? 존재의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서다. 나 자신을 견뎌내기 위해서다. 내 밖에 있는 모든 것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다. (중략) 나는 글쓰기를 통해 모든 것을 해석하려 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것은 더 심오하고 자극적인 형식으로 언어를 익히고자 하는 내 방법일 뿐이다. (75쪽)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삶은? 결국 같은 것이리라. 말이 여러 측면과 색조를 갖도 있고 그래서 복합적인 특성을 갖고 있듯 사람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거울, 중요한 은유다. 결국 말의 의미는 사람의 의미처럼 측정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76쪽)

나와 이탈리아어 사이의 거리는 지금도 극복할 수 없다. 겨우 두 걸음 나아가는 데 내 인생 절반이 소요됐다시피 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건너고 싶었고 깊은 성찰의 물꼬를 튼 작은 호수의 은유는 틀렸다. 사실 언어는 작은 호수가 아니라 넓은 바다다. 두렵고 신비한 요소,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하는 자연의 힘이다. (79쪽)

그들이 왜 날 이해하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날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벽이 있다. 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날 무시할 수 있다. 날 벼려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날 바라보긴 하지만 진정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그들 말을 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는 사실을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노력을 귀찮아 한다. 때때로 내가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말을 할 때 건드려선 안 되는 물건을 건드린 아이처럼 비난받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중략) 언어는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그 나라 말을 모르면 자신이 인정받는 당당한 존재임을 느낄 수 없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 (113-114쪽)

변신의 메커니즘은 절대 변하지 않는 삶의 유일한 요소일지 모른다. 모든 개인, 나라, 역사의 시대, 우주만물의 과정은 때로는 약하고, 때로는 격렬한 변화의 과정일 따름이다. 변화가 없다면 우린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가 변화하는 전이의 순간들이 우리의 척추를 만든다. 우리가 기억하고자 한 순간순간들은 살아남거나 사라진다. 변화가 우리의 존재에 뼈대를 만든다. 나머지는 대개 망각된다. 예술은 우리를 일깨우고, 마음에 새길 뜻을 주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찾는 걸까?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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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김진호 외 9인 지음 / 글항아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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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은 과거의 주체들인 ‘조상‘이 아니라 현재의 주체들인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물론 그 법의 표현들은 [출애굽기]와 거의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그 법은 과거의 법이 아니라 현재의 법이다. 즉 그 법령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의미는 현재의 경험 속에서 재해석된 것이며 현재를 살고 있는 이들을 성찰하게 한다. 신이 바로 그런 현재의 사람들과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법률을 말하고 있다. (10쪽)

‘하나‘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면, 유일신론과 범재신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는 사실상 ‘전체‘이자 ‘근원‘을 나타내기 위한 수학적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37쪽)

문득 나는 제2계명에 대한 데리다식 독법이 진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영감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를 교리적.교조적 음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너희가 찾을 수 있어? 그것이 가능이라도 한 것일까?"라는 의심의 해석학 내지는 "틈과 균열의 존재론으로 신을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묘한 충동으로 말이다. (43쪽)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노동과 생산성의 기준에 대한 암묵적 합의는 이른바 ‘생산적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영국적으로 열등한 사회적 지위에 머물게 하며 이들의 희생과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ㅣ 만든다는 점에서, 노동 과정 자체를 새롭게 상상하는 것이 안식일의 참 의미를 되찾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73쪽)

많은 아이가 가장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사람인 부모를 통해 가정 안에서 최초의 폭력을 경험한다는 사실과 이에 대한 충분한 인식 없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4계명이 절대 계명으로 수직적으로 선포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유해함... (101쪽)

결국 무수한 실존적 자살이 야기한 담론 현상들을 진지하게 해석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한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자살을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 틀로만 바라봄으로써 수많은 자살의 실제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중략) 즉 교회와 신학은 낡고 경직된 자살교리의 옷을 벗고 사회를 직시하면서 자살을 이해함으로써 제5계명의 재해석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117쪽)

막강한 힘을 가진 가부장들의 ‘질투심‘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로 보고, 통제하기 어려운 사적 복주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 간음의 문제를 다뤘다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다시 말해, 제6계명은 개인적 차원에서 걷잡을 수 없는 폭력을 통해 다뤄졌던 ‘간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메커니즘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읽을 수 있다. (136쪽)

고대 이스라엘에서부터 이미 그러했듯이, 십계명은 개인들의 집합적 공동체 내지는 인간들이 맺는 미시적. 거시적 관계를 총체적으로 지시하는 ‘사회‘ 그 자체에 주어진 집단적이고도 제도적인 수준의 개혁 요구다. 제7계명을 포함한 십계명 전체는 인간을 소외된 존재, 즉 노예화된 삶으로 유인하는 이스라엘의 정의롭지 못한 사회적 관계의 구조를 개혁하라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것이다. (165쪽)

정의를 ‘법의 말‘을 통한 통치, 곧 법치와 동일시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법과 정의의 관계를 숙고한 데리다는 "법은 정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계산의 요소"로 구성되는 법과 달리, 정의는 언제나 "계산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의에 관해서는 항상 아마도라고 말해야"한다. ‘아마도‘의 가능성을 벗어던진 정의, 법치의 이상과 동일시하는 정의는 ‘법의 말‘을 통한 주권자의 현 지배를 정당화하는 권력의 수사로 전락할 뿐이다. (중략)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에 이르는 참말을 하는 것이다. 참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의 말‘로 환원되지 않는 말, ‘아마도‘의 가능성을 철회하지 않는 말, 그래서 이웃을 살리는 희망의 말이다. (180-181쪽)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결혼 제도가 개개인에게 안정성과 의미를 주었지만, 21세기는 무한 경쟁이 삶의 조건이 되어버린 시절이다. 끊임없이 업데이트되지 않으면 대체되고 버려지는 세상에서, 이제 경쟁력 있는 삶의 형태는 ‘개인‘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가족이 있다는 것, 내가 돌봐야 하고 재화를 나눠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내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불리한 삶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201쪽)

10개의 계명 안에 탐욕 금기가 들어있다. 선민을 자처하던 이스라엘은 지켜야만 했던 금기가 많았다. 제의와 음식 금기를 비롯하여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규정짓는 다양한 실천은 열 계명 속에 들어가기에 충분할 만큼 중요했다. 그럼에도 이를 대신하여 탐욕 금기가 들어간 것에는 어떤 함의가 있을까. 탐욕이 지배 문화가 될 때 공동체가 즉각 붕괴됨을 예감했기 때문일까. 지금 여기, 이윤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탐욕이 퍼져 있다. 탐욕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워야 할 종교 공간마저도 욕망의 지배를 받은 지 오래다. (223쪽)

서로 연관을 맺으면서 상호작용하는 에코시스템의 원리처럼 인간은 더불어 살게 되어 있다. 서로의 관계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 이러한 삶이 바로 ‘존재로 사는 방식‘이다. 이제 우리는 관계성의 구조를 인간 공동체라는 담을 넘어 지구의 모든 존재에게로 확장하는 지점에 서 있다.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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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은 저항이다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규태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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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은 거룩한 정지 기간이요. 몸과 영혼의 무위를 계발함으로써 신성함을 계속 이어 가는 기간이다. (13쪽)

불안이 야기하는 무한 경쟁이 난무하는 현대의 정황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저항이요 대안인 행위다. 안식일이 저항인 이유는, 이 안식일이 상품 생산과 소비가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해 주기 때문이다. (16쪽)

‘새롭고 발전된‘ 생산품, 끊임없는 스타일 진보, 그리고 늘 새로운 기술은 옛것을 소유함을 부적절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결국 상품이라는 여러 잡신을 만족시킬 노력을 끝없이 하게끔, 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든다. (42-43쪽)

우리는, 우리의 경제 영역이나 우리의 인간관계나 우리 삶의 어떤 영역세서나, 바쁨과 탐욕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함이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 삶의 본질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73쪽)

생산과 소비가 정의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생산과 소비에 큰 차등이 있으며, 따라서 가치와 중요도에도 큰 차등이 있다. 이런 사회 시스템에서는 모든 이가 생산자와 소비자 역할을 잘 수행하라고-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라고 -강요당한다. (87쪽)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나타내는 유일무이한 표지요. 모세가 열거한 율법을 넘어서는 관대한 편입 행위이며, 하나님 소유인 이스라엘이 누리는 생명이 이전에는 제외당했으나 이제는 환영받는 이들에게도 부어지게 만드는 행위다. 외부인을 받아들이는 당사자가 그들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안식일을 골랐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외부인을 받아들일 공동체 구성원들은 안식일을 구성원이 되려는 자들이 갖추어야 할 유일한 특별 조건으로 만들었다. (112쪽)

나아가 우리는 솔로몬이야말로 언약과 관련된 모든 것을 무시한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 있던 상품지상주의와 쉼이 없음을 상징하는 화신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겠다. (124쪽)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그와 동시에 많은 일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야훼를 예배하는 것처럼 하면서 사실은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생식의 신이요. 언약에 따른 의무나 언약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신인 바알을 신뢰하고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스사엘이 이렇게 두 마음을 품는 바람에 안식일은 거짓 안식일이 되어 버렸으며, 실제로 언약에 맞서는 실존과 함께 나타나는 끝없는 불안때문에 진정한 노동 중단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거짓 안식일은 아무럼 쉼도 제공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이웃에게서 철저히 멀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128-129쪽)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기는 불가능하다. 안식일을 지키면서 동시에 사업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깊은 사랑을 나눈다는 사람이 내내 시계만 들여다본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예수를 찬송한다는 자가 가난한 이들을 잡아먹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동시다중 작업을 하면서 여기저기에 마음이 팔려 있다는 것은 진정 일을 그치고 쉬지 않는다는 말이요. 성공하려고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136쪽)

안식일의 쉼은 탐욕스러운 획득 행위를 그만둠으로써, 여러 사회관계를 무너뜨리고 왜곡하는 쉼이 없음에서부터 이웃이 살아갈 공간과 그의 재산을 보호해 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43쪽)

힘 있는 자들이 약자의 것을 원하고 빼앗는 행위는 모든 이에게 살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제공해 주신 창조주가 그어 놓으신 "경계선"을 넘어가는 행동이다. (153쪽)

첫째 계명이 거부하는 우상 숭배와 열째 계명이 거부하는 탐심을 동일시하는 것은 거의 우연이자, 사람들이 미처 주목하지 못한 것이다. 우상 숭배와 탐심이라는 두 가지를 동일시한 이유는 이 둘 모두가 실체를 살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는 물건,특히 금과 은을 부어 만든 물건들을 예배하는(높이 여기는) 것이다. (중략)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말하는 탐심은 이웃을 희생시켜 가며 재물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두 가지를 모두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즉, 상품을 예배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요. 상품을 추구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은 그저 거부에 그치지 않는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이웃이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라는 실체를 꾸준히, 훈련받은 대로, 눈으로 볼 수 있게, 구체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167-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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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타리안 : 솔페리노의 회상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6
앙리 뒤낭 지음, 이소노미아 편집부 옮김 / 이소노미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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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십자운동은 19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노벨평화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인도주의 운동입니다. 앙리 뒤낭의 에세이가 무엇을 담고 어떻게 적혀 있길래 그런 국제적십자운동을 촉발했는지, 그리고 집단지성으로 만들어진 제네바협약에는 어떤 정신과 무슨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전합니다. (29쪽)

저는 그저 단순한 여행자였습니다. 이런 중요한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었지요.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다가 가슴 뭉클한 장면들을 목격한 후 그 특별한 경험을 기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개인적인 느낌만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독자들이 여기에서 어떤 구체적이고 특별한 사실이나 전략적인 사항을 얻으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그런 정보는 다른 책에 있을 겁니다. (40쪽)

부모의 유일한 희망으로 사랑 깊은 어머니가 오랫동안 금지옥엽으로 키워서 조금만 아파도 겁을 내는 아들. 집에 두고 온 부인과 아이들에게 극진한 가족 사랑을 받아왔던 우수한 장교. 고향에 약혼녀와 어머니, 누이, 늙은 아버지를 남겨두고 전쟁터에 온 젊은 병사. 이런 모든 사람이 자기 몸에서 흘러나온 피에 흠뻑 젖은 채 진흙과 먼지 속에서 뒹굴고 있었습니다. 남성 답고 준수했던 얼굴은 칼과 총탄으로 사정없이 망가져서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79쪽)

카스틸리오네의 부녀자들은 국적 따위 상관하지 않는 내 모습을 봤지요. 그녀들도 국적이 모두 다르고 모두 외국인인 온갖 나라의 병사들에게 동일한 온정을 쏟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행제다."라고 그녀들은 되풀이해서 말했습니다. (104쪽)

아아, 경험 많고 자격을 갖춘 남녀 봉사원 백여 명만 이들 롬바르디아 지방 도시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들만 있었다면 그처럼 뛰어난 지휘체계가 요구되고 있는 시점에 분산된 능력과 산발적인 원조를 그들 중심으로 한테 모을 수 있었을 텐데! 똑똑하고 지도력을 갖춘 사람들은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헌신하던 대부분의 사람은 지식과 경험이 부족해서 그들의 노력이 쓸모없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중대하고 절실한 소임을 놓고 고립되고 분산되어 있는 소수의 자원자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138쪽)

만일 솔페리노 전투 시 국제구호단체가 존재했었고, 6월 24일부터 26일까지 카스틸리오네에 자원봉사 간호사들이 있었더라면, 또 같은 기간에 브레시아와 만토바와 베로나에서도 그랬더라면 그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수천 명의 부상자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 채 말로 다할 수 없는 갈증을 애타게 호소했던 그때, 비명과 구조의 손길을 목이 터져라 외쳐댔던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의 그 불행한 밤중에, 활동적이고 열성적이며 용기있는 구조대원들이 아무 쓸모없었을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하겠습니까? 축축하게 유혈이 낭자한 땅위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이젠부르크 대공과 그 밖의 수많은 불행한 부상병을 온정의 손길이 재빠르게 찾아와 좀 더 빨리 구조했더라면! 당시 여러 시간 동안 방치됨으로써 치명적으로 악화되었던 그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겠지요. (164쪽)

제6조
부상자나 환자인 전투 요원은 그들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 여부를 묻지 않고 수용해서 치료하여야 한다. (201쪽)

휴머니즘은 인간애 혹은 인류애를 뜻해요. 일반론적이며, 포괄적이거나, 철학적인 단어지요. 그에 반해 휴머니타리안은 전쟁, 기아, 질병처럼 매우 극단적인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면서 ‘도울 힘이 있는 사람이 도와야겠다며 활동하려는 마음‘을 뜻하는 것 같아요. 휴머니즘보다 실천적이며 훨씬 구체적이라고 할까요? (245쪽)

악이 발전하는 만큼 선도 함께 발전하는 것. 그게 우리 인류의 강점인 것 같아요. 핵무기 같은 전쟁기술을 통해 악의 조건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 악을 봉인하는 선함도 함께 발전시켰으니까요. 평화에 대한 열망, 민주주의, 인권의 신장, 인도주의 정신, 제네바협약 같은 게 모두 악을 봉인하는 선함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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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0 소설 보다
김혜진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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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어떤 것들을 네가 똑같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상하면서도 반가웠다. (중략) 어떤 식으로든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게 한번 생겨나면 좀처럼 없애기 힘들다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는 나이였다. (25쪽)

네가 그 이야기를 내내 내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건 나에 대한 배려였을까. 왜 그런 배려를 했을까. 왜 그런 배려가 필요하다고 느꼈을까. 생각은 빠르게 번졌고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씁쓸함이 감돌았고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다가 차츰 불쾌감으로 번졌다. (33쪽)

한 사람의 모순적인 면면 혹은 이중적인 모습들이 드러나는 순간은 개인의 선택이나 의지의 문제만으로는 해명하기 힘들다는 생각도 합니다. 시기와 상황, 처지와 형편에 따라 사람은 얼마든지 이전과 다른 선택과 판단을 내릴 수 있고, 그에 따른 결과나 책임의 양상도 달라질 테고요. 또 그걸 보는 사람들의 입장도 각자의 사정에 따라 차이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43쪽)

그리고 사회생활이라는 게 늘 합당한 근거나 논리적인 이해관계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며 능력이나 역량의 객관적 판단 같은 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아는 나이가 되었다. (82쪽)

왜 나는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을, 저 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게 된 거지? 어째서?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마음의 차이일 뿐인데, 마음은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왜 내 마음은 대체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85쪽)

나는 가끔 나를 불쌍하게 만드는 건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들의 시선이라는 생각을 한다.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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