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대지 세계문학의 숲 43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김윤진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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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는 저 모든 책들보다 우리들에 관해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대지가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장애와 맞서 겨룰 때 스스로를 발견한다. 허나, 그에 이르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다. 대패가, 쟁기가 필요하다. 농부는 농사를 지우며 조금씩 자연으로부터 어떤 비밀들을 이끌어내는데. 그 진리는 우주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항공 노선의 도구인 비행기도 인간을 저 모든 오래된 문제들 속으로 던져 넣는다. (11쪽)

처음에는 기계가 인간을 자연의 커다란 문제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더욱더 혹독하게 그 문제들에 종속시키고 만다. 폭풍우 치는 하늘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재판정에서 조종사는 자신의 비행기를 놓고 산, 바다, 폭우라는 세 자연의 신과 싸우는 것이다. (34-35쪽)

한 직업의 위대함이란 무엇보다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데 있는 것이리라. 진정한 의미의 부는 오직 하나, 인간관계라는 부유함뿐이기 때문이다. (41쪽)

그는 사람이 일단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로지 미지의 것만이 인간을 두렵게 한다. 하지만 일단 맞닥뜨리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미지의 것이 아니다. 특히 그것을 명석한 신중함으로 관찰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기요메의 용기는 무엇보다 그 올곧음의 결과이다. (54쪽)

인간이라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탓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비참함을 마주했을 때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몫의 돌을 놓으며 자신이 세상을 구축하는 데에 기여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55쪽)

완벽함이란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떼어낼 것이 없을 때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발전의 끝에 이르렀을 때 기계는 스스로 모습을 숨긴다. (60쪽)

그는 자유로웠으므로 기본적인 재산, 사랑받을 권리, 북쪽이나 남쪽으로 걷고, 노동으로 자신의 빵을 벌 권리가 있었다. 그러니 그깟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강렬한 배고픔을 느끼듯이. 그는 사람들 틈에서의 한 사람이 될 필요를 느꼈고 사람들과 엮인 사람이 될 필요를 느꼈다. (123쪽)

나는 다시 생각한다. ‘우리가 질서를 지키며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그 안에 스스로 갇혀보지 않으면 가늠할 수 없다.‘ 나는 겨우 오늘에서야 사형수에게 주어지는 담배와 한 잔의 럼주를 이해한다. 나는 사형수가 그런 초라함을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사형수는 그런 것에서 큰 기쁨을 얻는다. (162쪽)

우리의 밖에 위치한 공통된 목표로 형제들과 결합되었을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숨을 쉰다. 그리고 경험은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같은 밧줄에 매여 같은 정상을 향하고 거기서 서로 만날 때에야 비로소 동료라고 할 수 있다. (195쪽)

인간에게 있어 진리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197쪽)

인간과 인간의 욕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질을 통해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당신들이 가진 진리의 명증성을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 (198쪽)

왜 서로를 증오하는가? 우리는 같은 행성에 실려 가는 같은 배의 선원으로서 서로 굳게 결속되어 있다. (202쪽)

이와 같이 나무가 성장하는 것처럼 느리게 발전하며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것, 그것은 생명이면서 또한 인식이기도 했다. 얼마나 신비로운 상승인가? (생략) 그 어머니는 생명만 전해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들들에게 언어를 가르쳤고, 수 세기가 흐르면서 서서히 축적된 짐, 그녀 자신이 받아서 보관했던 정신적 유산, 뉴턴이나 세익스피어와 동굴에 사는 짐승들과의 차이를 이루는 작은 몫의 전통들, 개념들, 신화들을 맡겼던 것이다.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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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는 말은 무신론자나 하는 말입니다 - 요하네스 라우가 들려주는 그리스도인의 소명
요하네스 라우 지음, 박규태 옮김 / 살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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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알 수 없는 곤고함, 그 어떤 조언이나 도움조차 얻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 속에 빠져 설교는 고사하고 친구로부터 안부 인사와 몸짓과 말 한 마디조차 얻을 수 없는 사람에게도 구약과 신약의 성경 말씀은 든든한 발판이요. 의지할 수 있는 닻이요.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되어 줍니다. (22쪽)

우리의 일상에는 타인을 바라보며 나누는 일(Zuwendung)이 부족합니다. (중략) 형제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인식할 때, 비로소 타인을 형제로 바라보게 됩니다. (47-48쪽)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향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에 예민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의 올바른 초점을 인식하고, 마이애미와 플로리다뿐만 아니라 고통과 비탄과 죽음이 뒤덮은 섬들도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66쪽)

자신들을 현대인으로 여기던 나치 시대 사람들은 모세와 아브라함, 이사야와 예수의 옛 역사를 더 이상 자신들과 관련된 역사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77쪽)

하나님을 바라봄이 없이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고 자신들의 미래상을 실현하려고 할 때면, 땅 위에 천국을 만들려는 그들의 시도는 번번이 땅 위의 지옥을 만들어내곤 하였습니다. (89쪽)

그런고로 우리는 이 땅에 천국을 세우려고 할 것이 아니라, 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려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중략) 그리고 산상설교가 말씀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면, 정치는 종종 주먹을 쥔 채 그저 저항하던 입장으로부터 쥔 손을 펴고 ‘무언가를 섬기고 생각하는 존재(Fur-etwas-sein)‘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151쪽)

의(정의), 평화, 자유, 그리고 관용이라는 말은 단지 정치인들의 수사가 아니라 하나같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의라는 말을 의회에서 끌어내어 일상의 삶 속으로, 일상의 정치 속으로 가져와야만 합니다. 성경이 아는 것은 하나님 앞의 의라는 신학 개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거기서 더 나아가 일상의 삶 속에서 더 많은 의를 이루려 하고 더 나은 관계를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153-154쪽)

저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 오로지 바깥에 있는 제도 때문에 속병이 난 것처럼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159쪽)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이 세상을 떠맡아 이곳을 바꾸고 개선하며 인간이 살아갈 만한 곳으로 함께 만들어 갈 책임을 짊어진 자리입니다. (182쪽)

성찬과 사랑이라는 두 극점 사이에는 우리가 서로 섬겨야 한다는 말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의 실상이 이 말씀과 완전히 딴판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리 삶을 들여다 보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 무리, 자기 정당, 자기가 속한 사회 계층만이 이득을 누리게 하려고 발버둥 칩니다. (224쪽)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몸, 우리 몸들, 우리 지체들이 그저 서로 바라보고 서로 지배할 목적으로 존재하지 않도록 만드는 연습을 시작해야만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 몸과 지체들을 향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귀, 내 자신의 입, 내 자신의 손, 다른 사람의 발, 이것이 실은 다 한 몸입니다. (228쪽)

어느 누구도 이 교회를 자신에게 예속시켜서는 안 됩니다. 어느 누구도 이 교회를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도구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우리가 이 하나님 말씀이 자유롭다는 것을 인식하고 고백하며 삶으로 보여줌으로써 증명됩니다.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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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반역의 갈래에서 - 어느 번역가의 인문이 담긴 영성 이야기
박규태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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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 교수가 설교했던 조찬기도회처럼 우리나라에도 조찬기도회란 것이 있습니다. 특히 매년 한 번씩 대통령까지 초청하여 국가 조찬기도회란 것을 엽니다. 그러나 이 국가 조찬기도회 자리에서 볼프 교수처럼 참된 화해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국가 내부, 민족 내부의 갈등을 해결할 길을 선지자처럼 선포한 설교가 있었습니까? (39쪽)

히브리어 사전의 아버지라 불리는 빌헬름 게제니우스(1786-1842)는 옛날 프로이센 사람입니다. 그는 신학자였고 특히 고대 언어와 문화, 역사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평생을 히브리어와 아람어 연구에 바쳐 이 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많이 남겼죠. 그가 이런 연구 성과를 담아 1810년에 처음으로 내놓은 사전이 바로 위에서 말한 히브리어 사전입니다. 사전 이름이 길다 보니 보통 [게제니우스 사전]으로 많이 부릅니다. 이 사전은 원저자인 게제니우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유명한 학자들이 뒤를 이어 개정과 증보 작업을 계속 펼쳐나갔습니다. (112쪽)

정숙한 미녀라는 말은 일본의 유명한 수필가요 번역가이며 러시아어 통역가인 요네하라 마리(1950-2006)씨가 [미녀냐 추녀냐]에서 쓴 말입니다. 요네하라 씨는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유려한 번역문을 담은 작품을 정숙한 미녀로 은유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정숙함과 미모를 모두 갖춘 여성처럼 번역 작품도 정숙함(원문에 충실함)과 미모(유려하고 정돈된 문장)을 모두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을 모두 갖추는 것은 어려우며, 그럴 때에는 정숙한 추녀(원문에는 충실하나 번역문은 엉망인 번역)보다 부정한 미녀(원문에는 좀 덜 충실하더라도 번역문만큼은 유려하고 정돈된 번역) 쪽을 선호하는 것이 낫다고 권면합니다. (153-154쪽)

제 짧은 번역 이력으로 무언가 도움말을 드린다는 것이 어불성설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여 두가지만 말씀드렸습니다. 그 둘은 첫째, "번역은 해봐야 느는 만큼 번역을 많이 해보시라는 것", 그리고 둘째, "번역할 책을 찾아서 번역하려고 노력해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되는 말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번역을 하시려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봍탬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25쪽)

그러나 라우 대통령은 "독일의 수도사"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 했던 훌륭한 신앙인이었고(독일 개신교회 장로였습니다) "독일의 현자"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미래를 내다보며 약자를 돌보고 참된 화해를 몸소 실천해간 정치가였습니다. 그의 삶은 퍽 이채롭습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보통 태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이 가는 9년제 인문 고등학교 김나지움을 나왔지만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출판사에 들어가 오랜 세월을 출판계에서 일했죠.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마태복음 5-7장에서 말슴하신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정치 현장에서 그대로 이루어보려는 꿈을 안고 정치 일선에 뛰어듭니다. (233쪽)

라우 대통령은 독일 개신교회 장로였고 독일 개신교회가 2년마다 한 번씩 여는 교회대회의장을 여러 번 지냈습니다. 그런 그가 이 강론에서 말한 것은 국가 권력 역시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 국가 권력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선을 행하고 국민 전체가 안녕을 누리게 해야 한다는 것(특히 소수의 부자가 아니라 부자가 아닌 다수, 약자인 다수를 돌보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 국가의 국민 역시 국가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그 책임은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만 챙기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공동체를 중시하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런 강론 요지는 그가 몸담은 독일 개신교회 역사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가 집권했을 때, 독일 개신교회의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히틀러를 메시아와 동일시한 거짓 복음에 동조했지만, 일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이런 거짓 복음을 거부하고 투쟁했습니다. (237쪽)

종교개혁자들은 한 가지 좋은 해석 방법을 일러주었는데, 그것은 "성경에서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을 만나거든 성경에서 그 의미가 더 명확한 부분에 비추어 해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르침은 성경이 성경 자신을 충분히 설명하고 증명해준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인데, 이 믿음은 오늘날 우리가 성격을 읽고 해석할 때도 가져야 할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261쪽)

맥그라스 교수는 "누구나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명제가 살아 숨 쉴 때 개신교회도 살아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는 "누구나 성경을 읽고 해석하지 않으니" 죽어 있는 셈입니다. (중략) 한국 교회가 살아날 길은 신자들이 깨어나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개신교 역사가 그리고 "누구나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사상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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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 - 뻔하고 기대 없는 삶
마이클 켈리 지음, 배응준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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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함께하시지 않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라고 의문해야 한다. (43쪽)

우리가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는 이유는 놀라운 것들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들을 알아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정신이 멍하기 때문이다. (60쪽)

지금 우리는 개인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기도와 성경암송, 금식 등 제자의 삶의 특징이 되는 모든 것을 행해야만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훈련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영역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런 훈련들이 율법주의에 얽애인 뒤쳐진 관행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95쪽)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언젠가 당신을 영적으로 전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그들을 친절하고 바르게 대해야 한다. (114쪽)

자녀들을 올바로 키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크나큰 과업이다. (158쪽)

"어떤 사람의 일이 신성한지 속된지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 일을 하느냐이다." (207쪽)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교회가 자신의 영적인 탐색과 발전에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도 좋아하지만 교회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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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처럼 아름다운 수필
피천득 외 지음 / 북카라반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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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도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18쪽)

그러다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33쪽)

준비되지 않는 채 몸과 마음만 들뜬 아이를 마음으로 감복시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세상의 틀에 우겨 넣으려는 한, 내 중년은 아버지의 중년에 비할 수 없이 유치하다. (55쪽)

책상 앞에 붙은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 새 없이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하면서, 생활의 일이라면 촌음을 아끼고, 기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생산적이니 하는 경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에 창조적, 생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115쪽)

장애인이 ‘장애‘인이 되는 것은 신체적 불편 때문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생산적 발전의 ‘장애‘로 여겨 ‘장애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못 해서가 아니라 못 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그 기대에 부응해서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신체적 능력만을 능력으로 평가하는 비장애인들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161쪽)

그러므로 문학하는 것은 먼저 ‘사는 것‘이 아니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문학하는 것‘인가.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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