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 신학과 인문학의 대화
김용규 지음 / IVP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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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scientia prima)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세속적 세상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죄와 악의 가장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요컨대 다른 어떤 학문보다 드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다른 어떤 학문보다 폭넓은 가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학문이 그 바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9쪽)

기독교 신학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신앙과 이성, 성서의 계시와 인문학이 빚어낸 아름답고 거대한 정신적 구조물입니다. (중략) 기독교 신학은 세상에 발 딛고 있으면서 동시에 하늘나라를 향해 뻗어 있고, 인간의 학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며, 성서와 인문학을 지주(버팀태)로 하여 다분히 신성하면서도 동시에 세속적인 사역을 담당하지요. 성서를 지주로 삼음으로써 (또 그래야만)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 나라에 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을 지주로 삼음으로써 (또 그래야만) 기독교 신학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요컨대 성서와 인문학을 두 개의 지주로 삼음으로써 (또 그래야만) 기독교 신학은 성육신하신 예수님, 보다 종교적 표현을 빌린다면 하늘 보좌에서 내려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0-62쪽)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은 무엇을 뜻할까요? 당연히 그것은 2천 년 전에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겠지요? (중략) 서양 문먕을 구축하고 이끌어 왔던 신본주의 가치들이 몰락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략) 사람들은 그동안 신이라는 이름으로 추구해 왔던 신본주의 가치들에서 차츰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성, 합리성, 객관성, 과학, 계몽, 실증, 자유, 평등, 박애, 진보, 민중 해방, 혁명과 같은 인본주의 가치들을 지향하며 신처럼 숭배하기 시작했지요. 바로 이것을 두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은 죽었다는 말은‘인간이 신이 되었다‘라는 놀라운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68-69쪽)

그런데 예전에 우리는 어떻게 했나요? 자신의 진로나 결혼 상대를 결정하는 것 같은 중요한 문제는 기도 중에 하나님에게 묻거나, 교회에 가서 목사님에게 물었지요.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랬습니다. 실존주의가 유행하던 때의 젊은이들은 이른바 기획 투사(Entwurf), 즉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하여 그것에 자신을 던지기 위해-그럼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자기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하라리는 앞으로는 사람들이 아마존이나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차츰 새로운 우상으로 등극한 컴퓨터 알고리즘과 데이터의 노예로 전락할 것으로 봅니다. (83쪽)

우리는 이제 신의 은총이 사라진 하늘 아래서, 인간과의 연대와 협력이 사라진 땅 위에서 작은 이야기들이 지향하는 다양성과 상대성에 매몰되어 아무런 이정표도 없이 스스로 갈 길을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포스트모던한 시대를 맞았습니다. 시쳇말로 ‘각자도생‘의 시대가 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부모 잃은 아이들처럼 혹은 의사 없는 환자들처럼 허둥대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위험과 공포가 유행처럼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고양이에게 갈 길을 묻는 앨리스처럼 컴퓨터 알고리즘에게 살길을 묻게 된 것도 바로 그래서이지요. (96-97쪽)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의 [국가]로부터 내려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이상이 삶과 사회에 더 이상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없음이 드러날 무렵에 기독교가 등장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융합을 이루어 냄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또한 중세 가톨릭교회가 부패해 서구 세계가 칠흙 같은 어둠으로 덮여 가던 즈음에 그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일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것도 다시 떠올려야 합니다. (중략) 만일 우리가-고대에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그랬듯이, 또한 르네상스 시기에 종교개혁자들이 그랬듯이-숭고한 이상을 가슴에 품고 담대한 지적 모험을 감행함으로써 서로 대립하며 충돌하는 가치들의 통합과 융합을 이루어 낸다면 인류는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한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99-100쪽)

호모 데우스 시대의 절망을 극보하는 길은 온전한 가치의 추구와 구현에 있고, 그 첫걸음은 당연히 신본주의 가치들의 복원이 되어야 합니다. (중략) 모든 다른 가치가 신본주의 가치를 기반으로 시작해야 비로소 제 몫을 하고 보래의 의미와 가치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무엇보다도 먼저 신본주의 가치들을 복원해야 한다는 이 말은 신본주의 가치를 토대로 인본주의 가치를 복원하고, 다시 그것을 토대로 탈근대적 가치를 구축하여 ‘온전한 가치‘를 정립해 나가야 함을 뜻합니다. 그것은 동시에 탈근대적 가치는 인본주의 가치를 벗어나서는 안 되고, 인본주의 가치는 신본주의 가치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그 통합과 융합의 용광로 안에서 시대마다 새롭게 드러나기 마련인 기존 가치의 공허함과 새로운 가치의 맹목성이 상호 해소되고 보완되어 온전한 가치로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107-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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