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독서와 글쓰기는 런던 거리를 걷기부터 시작된다. [런던 유령]은 그녀가 소설들을 쓴 방식과 맞물려 있다. 특히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에서 그녀의 글 쓰는 방법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어휘 속에서 시간과 기억에 맞는 단어를 골라 적합하고 적절하게 정확하게 쓴 글들이다. 거의 자서전적인 글이라 볼 수 있다. 그녀의 글은 경계가 있으면서도 경계가 사뭇 다른 서로 침범할 수 있는 선과 악, 미와 추, 흑과 백, 육체와 정신, 내면과 외면이 있다. 우리가 집중하여 온전히 따라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책을 읽는 방법은 각각의 책은 여러 면에서 사람과 같다는 그녀는 "사람을 두고 '기묘한 일이지만 나는 당신을 좋아한다. 또는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잘 지낼 수 없다고 확신해. 나는 결코 당신을 견딜 수가 없어'와 같은 직관적인 말을 한다. 이것이 독서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187-188쪽)." 고 말한다. 그러므로 독서는 사람을 읽어내는 방식이다. 자신과 공통된 경험과 유사성을 찾아내어 타인을 읽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독서하는 방법이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런던 배회는 '그녀의 독서와 그녀의 자아들, 그녀의 사회를 여는 키' 자체였다(2240쪽)." 그녀가 다니는 것을 소위 걷기나 산책보다는 배회라고 명하니 [런던 유령]이라는 제목과 부합하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이 집 밖을 나와 다닌다는 것, 그 뿐 아니라 규범과 제약이 많이 따랐던 학교까지 벗어난 그녀는 배회를 통해 글을 썼다. 그녀의 글쓰기의 근간이 되는 배회에서 주축이 되는 세 권의 책을 천천히 읽고 싶다. "[댈러웨이 부인]은 현재에 뿌리를 내리고 과거를 머금고 있고, [등대로]는 오늘 하루에, 그리고 미래의 오늘 하루에 같은 사람들이 머물고, [ 파도]는 성장, 노쇠의 과정을 전부 보여주지만,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겪어낸 뒤의 내면을 보여준다(222쪽)." 세 소설은 우리의 삶의 과정을 보여주는 '세월' 자체라 할 수 있다. 

요즘 걷는 것에 대한 말이 많다. 심지어 광고에도 나온다. "쓰기와 걷기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에서 동격을 이루는 지극히 비슷한 행위이다(252쪽)." 그러고 보면 수많은 작가들이 걷기를 통한 사유 활동으로 창작을 했다. 찰스 디킨스 [크리스마스 캐롤]도 산책으로 탄생했다나.. 

드문드문 읽은 글에서도 "왜 여자는 아무 부담 없이 자신이 태어난 세상을 혼자 걸어서 탐험하면서 생각을 할 수 없는 걸까?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는데 말이다. 훤한 대낮에 밖에 나가 두려움 없이 걸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게 지나친 요구인가?([자기만의 산책] 중에서)"


-배회 : 아무 목적도 없이 어떤 곳을 중심으로 어슬렁거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님.

-산책 :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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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났다]는 조르주 페렉의 자전적인 글과 자전적 글 쓰기에 대한 작가의 고뇌를 기록한 글들의 모음집이다(129쪽)"

우리는 페렉이 글 속에서 말한 것처럼 누구든 [나는 기억한다]같은 글을 쓸 수 있다. 

페렉이 글 쓰는 방식의 일부를 옮겨 본다. 

페렉은 파리의 거리, 광장, 교차로 등 열 두 곳을 선정하여 자신이 간직한 추억들과 일어난 사건들, 혹은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과 연결되는 장소들을 묘사한다. 첫 번째는 바로 그 장소에서(카페 혹은 바로 그 거리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가능한 한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서 묘사한다. 상점들, 건물의 세부 사항들, 아주 소소한 사건들(지나가는 소방차, 돼지고기 가공 상점에 들어가기 전에 개를 묶고 있는 부인, 이사, 광고물, 사람들, 기타 등등...)을 열거한다. 두 번째는 장소에 상관없이(집, 카페, 사무실), 어느 곳이든 기억 속 장소를 묘사한다. 그 장소와 관련된 추억들을, 그곳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나, 다른 기억들을 떠올려 묘사한다.

그가 기록한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추억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집합 속에서 하나의 형상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기억들 사이의 간격을 채우는 묘사가 된다. 그리고 기억 속에 들어있는 망각을 대체하여 무한한 픽션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렇게 쓰인 글은 '연대'의 일부이다. 페렉 개인에서 출발하여 우리와 같은 이들에게 이동하는 움직임이다. 페렉은 이것을 공감이라 부른다. 

저자의 기억과 허구가 뒤섞인 글을 읽으면서 독자는 자신의 기억을 투영하면서 공감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자전적인 글을 쓸 수 있을까. 기껏해야 일기 정도, 하지만, 나의 글을 누가 관심이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어른들 중에 자서전을 쓴 이도 있던데 냄비 받침으로 맞춤이다... 굳이 그 좋은 나무를 베어 나까지 보탤 필요야 있을까..   

환갑이 지나면 병원과 가까워야 한다는 말을 실감한다. 오른쪽 무릎이 아파서 보니 아주 작은 혹이 생겼더라.. 거금 들여 이런저런 검사를 받아보니 아직은 착한 놈(?)이라나, 나는 혹이라 말하고 싶은데, 의사는 종양이라 한다. 이래저래 슬픔만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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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을 보는 듯 한, '기울어진'에 꽂혀 집어 든 책이다. 엉덩방아를 찧은 후, 회복이 더디다. 지팡이는 이제 내려 놓았지만, 한 쪽으로 조금 기우뚱거리며 걷는다. 그러면서 안팎으로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떨칠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어, 활동 반경도 반이나 줄어들었다. 그 간에 해 온 활동이 줄어든 게 아니라 선뜻 나설 수 없는 일들만 있는 듯 하다. 할 수 있는데도 하고 싶은 데도 하지 않는 선택의 문제와 원천적으로 할 수 없는 무능의 느낌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잠을 많이 자고 있고, 겨우 매주 한번 '논어'만 부여잡고 있다. 

'기울어진 미술관'은 남성 화가와 여성 화가, 백인 모델과 흑인 모델, 장애인과 비 장애인, 건강과 질병,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어른과 어린이, 정복자와 원주민, 예술가와 후원자, 부자와 가난한 자, 노동 계급과 부르주아, 도시화와 미 개발, 젊음과 늙음, 예술과 정치, 작품과 투자, 근대화와 환경오염, 인간과 동물, 결혼과 비혼, 부모와 자녀, 재난과 사회적 약자 등등에서 기울어진 예술 작품들이 가득하다.

그 작품 속에는 수 많은 마이너가 있다. 힘 있는 자들의 시선에 맞춰진 작품 속에서 볼품없는 그들을 끄집어 내어 보여준다.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특수 교육도 공부했지만, 이제야 겨우 장애인을 조금 이해한다면,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메이저가 되었다가 마이너가 되었다가 했다. 만약 그들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면, 별반 다를 게 없을 듯 하다. 눈에 먼저 띄는 게, 찾아서 보는 게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 나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니, 편향된 시각이 아니라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튼, 지금은 삶의 한 귀퉁이가 뭉텅 잘려 나간 듯 하다. 몇 년 전 감악산 출렁다리를 건너다가 십 년 감수한 느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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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기 전에 읽으면 좋은 책, '성경 한 걸음'이다. 성경 전체에 대한 간단한 간단한 이야기이다. 얇은 책이지만 단 번에 꼼꼼히 천천히 읽어야 한다. 잠깐이나 깜박 할 경우, 이해력이 단번에 떨어진다. 

-성경은 종교 서적이 아니며, 나의 삶과 역사를 독특하게 해석한 책이다. 따라서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로 통합되고 연결되어 있기에 처음부터 읽어야 한다. 

-그리하면 인류 전체 속에서 나의 삶이 의미 있게 보일 수 있다. 즉 "성경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그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104쪽)."

-지팡이를 짚으면서 집 밖을 나서기는 더더욱 무섭다. 그리고 너무 덥다.

-그래도 휴가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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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가장 잘 나타낸 글들이 페이지마다 가득 들어있다.

저자에게 대체할 수 없는 존재, 마망(maman, 엄마)의 죽음은 다시 볼 수 없는 존재가 되면서, 관계가 끊어지고 패인 부재의 자리, 즉 슬픔이 놓여 있는 곳이 생긴다. 엄마를 애도하는 메모 형식으로 쓴 일기는 2년 간 이어진다. 그리고 사고로 인해 사망한다. 저자는 이 글이 출판되기를 바랐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는 그 어떤 위로도 말이 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있지 않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당연한 있음의 존재였는데.....


엉덩방아를 찧어 누워 만 있는 지도 일 주일이 지나간다. 겨우 붙잡고 몸을 옮겨 본다. 누워 있으니, 필요 없는 것들이 무척 많다. 원피스, 가방, 샌들 등을 가지려고 부대 끼고 우쭐한 마음이 쓸데없고 부질없음으로 다운 다운되면서 마음은 표류 중이다. 그런데 동생 친구면서, 내 친구 남동생(일곱 번째 딸이 내 친구. 남동생은 가족이 바라던 목사가 되었는데)이 죽었다. 멍하다. 

죽음들이 너무 가까이 와 있으면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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