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의 눈과 자세로 철학을 개혁한 후설로 이해한다. 

*의식과 객관적 존재 사이의 관계에서 비주관적인 객관성, 서로 다른 세계관, 사랑을 통한 타자와의 결합으로 조화로운 공동체로 사는 세상, 그러나...


*후설은 하이데거의 스승으로 수학자에서 브렌타노의 강의 때문에 철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비주관적인 객관성이 모든 철학적 방법론적 시금석이어야 한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보는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하나의 철학적 지식이 되려면 별도의 철학적 정당화가 필요하다.  

-주관적 심적 작용과 객관적 논리적 존재 사이에는 나름의 상관 관계가 있다.

-의식은  지향성을 지닌다. 즉 모든 의식 작용은 반드시 어떤 것에 관한 의식으로서 그의 상관자인 대상을 지닌다. 

-의식 현상의 지향 구조가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단 중지(선입견들로 부터 떠나는 것)와 현상학적 환원(판단을 유보하고 의식의 지향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서로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유형의 의식이 존재한다.

-다양한 의식을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가 대상을 경험한다. 즉 내적 지각, 외적 지각, 수학적 직관, 타인 지각 방법으로 각각의 의식이 해당하는 대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과정을 '초월론적 구성'이라 한다.

-초월론적 현상학은 개별적 대상 뿐 아니라 세계 역시 나름의 의식을 지닌 것으로 본다. 세계 의식이 세계를 구성하는 장본인으로 세계 의식은 살면서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세계는 있는 것들의 총체다. 그러나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세계 의식은 주체가 경험하는 의미로서의 세계이다. 사람은 저마다 세계를 다르게 경험하게 된다. 그 이유는 각자가 서로 다르게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세계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10년 전과 지금의 세계가 다른 의미로 경험하며 살았을 것이다. 각 시기마다 의미로서의 세계가 다르고 이에 따라 세계 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의미로서의 세계는 주체가 가지고 있는 세계 의식을 통해 구성되며 계속 변한다.  

-의미로서의 대상과 세계를 구성하는 주관을 '초월론적 주관'이다. 초월론적 주관은 우리들 각자이며, 의미로서의 대상과 세계를 구성한다. 또한  의미로서의 대상과 세계를 창조하는 원천이며, 계속 재창조하므로 우리는 의식적으로 창조적인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후설은 세계를 '생활세계'로 표현하며, 이러한 생활세계의 성격을 '지평'의 개념으로 표현한다. 생활세계 개념은 주관과 객관이 하나로 통일된 세계 개념이다. 후설은 자연과학적 객관주의를 비판하면서 '학의 위기'로 규정한다. 즉 당대의 실증적 학의 인간적 삶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이로 인한 철학적 의미의 상실 등의 현상을 일컫는다. 

-생활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적 삶의 세계로서 직접적 경험 속에서 주어지는 세계다. 그런데 자연 과학의 영향으로 주관적인 세계가 아닌 객관적 세계만이 참된 세계라고 여긴다. 

-우리는 자신의 인식 틀에 따라 세계를 정형화하고 유형화해 파악하고자 하며, 최대한 조화롭고 의미 있게 이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이 세계에 친숙감을 느낀다. 즉 경험 대상들의 의미의 연관체가 바로 지평이다. 지평은 우리 습성의 상관자다.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세계'가  '생활세계'이다.

-후설은 생활세계 개념과 더불어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타자와 세계의 문제를 바라보는 '사랑의 공동체' 개념도 말한다. 후설의 존재론은 개체 중심이 아니라 공동체 중심의 전체론적 세계관을 취한다. 즉 각 개인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 존재 가치가 있으며, 타자와의 관계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나와 타자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 지가 주된 관심사다. 사랑을 통한 타자와의 결합이 인간 간의 결합의 최고 형태로 본다. 하지만 현실에서 가능할까. 

-후설은 조화로운 공동체로서의 세계가 현실화하는 모습을 목격하지 못하고 반대의 가능성만 체험하고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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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탑이 고장났다. 자본을 종교로 보면서 성경의 기도, 찬양, 사도신경, 욥의 애가를 차용하여  빗대어 쓴 글이다.

'로쟈'의 서재 글을 옮겨본다. 
마르크스의 사위라고는 하지만 두 사람의 견해가 일치하는 건 아니다. 출판사 소개 글에서는 두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원래 religion의 어원은 ‘하나로 묶는다’는 뜻인데, 마르크스는 자본이 인간을 나누고 가르고 투쟁하도록 만든다고 본다. 하지만 라파르그는 자본이 인간을 돈에 묶고, 주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을 종교의 대상으로 신앙화하는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부정적’ 탈종교화에 주목한다면 라파르그는 ‘긍정적’ 종교화에 주목하는 셈이다. 두 사람은 자본주의의 또 다른 축인 노동에 대해서도 대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는데, 마르크스가 노동을 기본적으로 긍정적으로 보면서 자본주의적 왜곡을 비판하는 데 반해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라파르그는 최소 노동을 강조한다. 특히 자본주의에서의 종교와 관련해서 마르크스는 종교를 상부 구조의 일부로 보며 “종교는 아편”이라고 주장하지만 라파르그는 자본이 바로 현대적 종교라고 주장한다.

혁명을 가능한 한 최소의 노동과 최대의 지적. 육체적 향유를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한 라파르그는 평생 일정한 일을 하지 않았다.
지금 그대의 종교는 무엇인지,
돈이 있어야 진실한 마음을 보여줄 수 있다. 더 나아가 돈의 많음이 애정의 크기까지..
주말에 다시 본 연극 '라스트 세션', 프로이트와 루이스가 신의 유무를 토론한다.
이전의 신구와 이석준, 그저께의 남명렬과 이상훈, 두 팀은 조금 달랐다. 원숙과 존경/열정과 재기 발랄 패기의 대담이었다. 더 쓰고 싶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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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 자신에게 친절하고 관대하자를 주문처럼 외운다. 이 나이쯤 되면 삶의 구멍정도는 그렇구나 하며 지나칠 줄 알아야 하는데, 아직까지 왠지 자로 잰 듯 맞춤형 위로를 해 줄 거 같은 '수학의 위로'를 펼쳤다. 

'수학의 위로' 책 표지 그림이 무엇인지 봤다. 고사리 잎이었다. 고사리 잎 모양은 점, 직선, 곡선, 면, 부피를 연구하는 산수의 기초가 되는 기하학에서 말하는 프랙탈 이론과 유사하다. 프랙탈처럼 우리의 삶은 자기 유사성과 순환성을 가진다. 비통은 여러가지 작은 슬픔으로 겹쳐있고 서로 유사하면서 연결되어 있으며 되풀이된다. 즉 저자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점과 선, 프랙탈, 기하학으로 비통을 헤아려 보고 해석한다. 비통이 슬픔과 다른 점은 불가역성이다.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따른 아주 큰 슬픔과 같다. 덧붙여 끝없는 부재, 공허, 무의미, 감정적인 부분과 초월성까지 포함한 불가역성을 띠는 것이 비통이다. 

책 제목이 '수학의 위로'지만, 비통의 기하학이다. 저자는 수학을 잘하고 기하학에 친숙하기에 기하학으로 비통, 아주 큰 슬픔을 희석하고 달래고 상실의 아픔을 위로한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비통에 처하면, 각자 자신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마음을 위로하고, 위로 받는다. 이때 우리가 타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공감뿐이다. 

'부재들, 상실들, 예전에 있었지만 더 이상 없는 것들. 하지만 그 구멍들의 틈새 사이에서 돌아다니면서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비록 예전에 그것들이 있던 곳으로 손을 뻗으면, 그 추억이 있는 공간의 긴장되고 빛나는 아련함을 느낄 수 있다고 해도.(198쪽)'

날씨가 무지 덥다, 바나나, 망고를 심어야 할까... 스콜까지... 토닥 토닥, 자신을 잘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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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잡지 '외모'를 읽으며, 알바하러 오가면서 사람들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어울리든, 그렇지 않든, 꾸미지 않는 이는 없었다. 누구를 위하여 꾸밈 노동을 했을까. 심지어, 지하철에서 화장까지 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입을 옷을 사기 위해 노력하는 이도 있구나... 나는 외모에 대해 고민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일단 마른 몸의 덕을 봤다고나 할까. 그 덕에 아무 옷이라도 편히 입고 다닌다... 

'외모'에 대하여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의 견해 중에 노년외과 정희원 교수의 '지속가능한 몸 만들기' 글에 공감이 간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나이 드는 사람은 젊어서부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몸과 마음의 상태를 만들고 지킨 이들이다. 지속 가능한 운동 습관을 만들고 실천하면, 생애 전체에서 건강상태를  오래 유지 할 수 있다. 즉 젊을 때 만든 과잉이 나이 들어 항상 반대급부의 고통을 낳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균형 잡힌 운동 루틴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숨쉬기 운동 뿐 아니라 맨손체조라도 꾸준히 해야 한다.. 

박정호 교수의 '얼굴을 잃지 않는 대화'가 감명깊다. 우리가 서로 말을 한다는 것은 나를, 나의 얼굴을, 그리고 얼굴로 표현되는 신성한 자아를 주는 것이다. 이렇다면 아무리 사소한 대화라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주고 받기에 서로의 체면을 살려주는 대화를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얼굴과 말을 분리하는 기술로(예: 키오스크 주문, 문앞 배송, 화상수업 중 카메라 끄기 등) 계속 도피하고 있다. 나를 타인에게 증여하는 대화를 한다면 말 폭력의 악순환을 선물의 선순환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한다. 제대로 된 대화를 언제 했더라. 얼굴을 맞대고 몸과 마음이 입을 통하여 말하는 게 아니라 눈과 손가락으로 대체된 대화를 하고 있구나... 

벌써 칠월이다. 이리 더워도 되는지, 이렇게 비가 많이 와도 되는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도무지 알 수 있는 게,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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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미술관이 거리마다 넘치는 뉴욕, 세계의 유행이 시작되는 곳, 도시 전체가 현대미술관이라는 뉴욕, 그 곳에서 예술에 관해 전방위로 박학다식한 저자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꼼꼼하고 촘촘한 연결과 깊이까지 있는 글,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처럼 얼마나 많이 아는지, 전문가인지 드러난다. 그래서 이해하기에는 한참 먼 어려운 말들이 많다. 낯선 예술가들, 그들의 기법, 그림, 글, 사진, 건물, 영화,까지 또한 공적인 장소를 사적인 장소화한 저자, 그 속에서 온전히 느끼고 생활하는 언어들로 가득하다. 몸과 맘이 반응한 이야기들로 뉴욕을 드러낸다. 그렇다해도 읽는 이는 물흐듯 읽을 수 있다. 모르는 부분을 좀 더 알고 싶어 인터넷을 뒤적이기도 하고 따라가면서 아는 만큼 읽었다. 눈 앞에 산해진미가 있다해도 먹는 이의 상태에 따라 그림의 떡이 될 수 있듯이.. 부럽기도 질투까지 났지만, 저자의 조근조근, 서두르지 말라는 담담한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저자 덕분에 뉴욕을 그녀의 도시만이 아니라 나의 도시로 성큼 들어오기까지. 하지만 잠깐 다녀 온 여행자와 그 곳에서 늘상 숨쉬는 생활자와는 완전 다르다. 

덕분에 내가 사랑하는 대상 등등을 되짚어봤지만, 저자만큼 잘 알면서 애정있는 게 뭘까라는 의문만 생겼다.. 지금 사랑하는 게 뭔지를 보면 될까, 하지만 가끔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조차, 길 잃은 맘을 잡아 둘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하고 몰입할 수 있는 뭔가에 닿기 위해, 이때껏 지나온 것에서 부터 가까운 근처까지 차근 살펴본다. 특히, 요즘은 건너뛰는 게 많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 자리에 있지만 처음 듣는 말이 되기 십상이고 말 중간에 자르고 끼어들고 그래서 관계와 사고의 폭이 점점 좁아들고 나의 정형화된 틀로 갇히는 거 같다. 

나아가 나이가 들어가면 입체적이고 복합적이기 보다 일직선의 아주 단편적인 면에 고착되어 보고 듣게 될 거 같다. 사고의 폭이 더 이상 줄여들지 않도록, 입은 다물고 그냥 듣기, 단정짓지 말기, 그러나 사랑하면 이 모든 게 우선 허용되고 용서될 터이지만... 당최 남의 말은 듣고 싶지도 않고 말 섞기도 싫고 나에게만 매몰되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사람과는 달리 서로 쓸데없는 감정들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고 교환하지 않아도 되는 몇 십년째 살고 있는 서울을 나도 사적인 도시로 만들어 볼까.. 

친구가 하늘나라에 갔다. 우리의 찬란했던 시절이 담긴 앨범을 뒤적여 보지만, 마음은 붕 뜨고 머리는 텅 빈 상태다. 

알바 몇 시간하고 터덜터덜하고 온다. 수 십년 규칙적인 직장생활은 어떻게 한거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이 좋았음에 틀림없다. 관계와 접점은 좋았던 감정이나 아름다움을 재현할 수 있어야 유지하고 몰입할 수 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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