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말테의 수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문현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말테의 수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로 분류되고 있는 작품이다, 고독과 방랑의 시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시만 쓰지는 않았다는 얘기를 할 수 있게 하는데에 이 말테의 수기가 있다. 작가의 분신이면서 이 작품의 1인칭 화자인 말테는 몰락한 덴마크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나온다. 조용한 고향을 떠나 대도시 파리로 이주해온 스물 여덟살 말테는 고향과 너무 다른 파리 생활을 하면서 화려해보이는 도시의 뒷면에 어둡고 비정하고 가난하고 위협적인 면이 있음을 발견해갈뿐 정을 붙이지 못한다. 그를 도시에서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은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것들을 기록하는 일이었고 그 기록이 바로 이 '말테의 수기'가 되는 것이다.
'말테는 나의 정신적 위기에서 태어난 인물이다'라는 릴케의 말이 아니더라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주인공 말테와 작가 릴케 사이의 구분이 모호한채 읽어가게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릴케 본인이 아닌 말테라는 인물을 내세우고 있으므로 일기체 소설이라고 분류하긴 하지만 소설보다는 일기에 가깝다고 봐도 무관하다고 여겨진다. 소설이라고 보기에 특별한 서사가 없다. 대신 그때 그때 느낀 점을 메모 혹은 단상의 형식으로 서술해나갔다. 시인으로서 시에 대한 생각, 죽음, 신에 대한 얘기가 불연속적으로 펼쳐져 있어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오히려 읽어나가는데 어려울 수 있다. 일기나 단상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니 훨씬 읽는데 편안해짐을 느꼈다.
파리에서 고독과 절망의 삶을 살아가면서 말테가 아니 릴케가 시에 대해, 흘러가버리는 시간에 대해, 인간과 신에 대해,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가지게 되는지 나타나는 곳을 찾아보았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 (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들,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만 한다. 동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시인은 돌이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추억이 많으면 그것을 잊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 추억이 우리들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고 이름도 없이 우리들 자신과 구별되니 않을 때에야 비로소 몹시 드문 시간에 시의 첫마디가 그 추억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일어서 나오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26-28쪽)
시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시는 감정이 아닌 경험이니까, 그당시 그의 고독과 절망의 경험이 모두 시의 자산이 될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우습다. 나 브리게는 스물여덟살이나 되었는데, 아무도 나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이 여기 내 작은 방 구석에 앉아 있다. 여기에 앉아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이 존재가 생각하기 시작한다. 회색빛 파리의 오후에 6층 방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이 현실적이고 중요한 것을 한번도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도 그리고 말해 보지도 못한 일이 가능할까라고.
인간이 보고 생각하고 글로 쓰기에 수천 년의 시간 여유를 갖고 있었으나 이 수천 년을 마치 학생이 버터를 바른 빵과 사과를 먹는 학교의 휴식 시간처럼 흘려보내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30쪽)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환경이라는 것은 방문지에서라면 자유로움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거주지나 생존지일때는 나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을 주게 될 것이다. 내가 대단히 사랑하고 아끼는 시간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 흘러가버리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는 '학생이 버터를 바른 빵과 사과를 먹는 학교의 휴식 시간처럼'이라고 비유했다. 나라면 어떻게 표현했을까. 매일 밥을 하고 설겆이를 하듯이 시간을 흘려보낸다고 했을까?
아무런 변화가 없는 하루는 마치 시곗바늘 없는 시계판 같다. (74쪽)
변화 없는 시간들에 대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들이 주는 불안에 대한 릴케식 표현은 다음 구절에서도 두드러진다.
이불 가장자리에 비어져 나와 있는 작은 털실 하나가 강철로 된 비늘처럼 딱딱하고 뾰족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 잠옷의 작은 단추가 내 머리보다 더 크지나 않을까, 크고 무섭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 지금 침대에서 떨어진 빵 부스러기가 바닥에 닿자 유리처럼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 그렇게 되면 실제로 모든 것이 다 깨어져 영원히 돌이킬 나위 없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걱정... (75쪽)
이렇게 구체적이다. 추상적이 아니라.
내가 파리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뻐하고 부러워해. 일리가 있지. 파리는 대도시로서 크고 또한 온갖 야릇한 유혹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나는 어떤 의미에서 그런 유혹들에 빠져버렸다고 말할 수 있어. 그렇다고 밖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 내 세계관의 변화랄까, 어쨌든 내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게 했어. 이로 인해 모든 사물을 보는 관점은 나의 내부에서 완전히 다르게 형성되었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지금까지의 어떤 것보다 더 많이 인간으로부터 나를 격리시키게 되었다는 거지. 하나의 달라진 세계. 온통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새로운 삶. 모든 것이 너무나 달라져서,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너무나 새로워서 나를 다소 힘들게 하고 있어. (83쪽)
외딴 환경, 혼자 버티는 시간을 겪어내는 인간은 내면에서는 변화가 진행된다. 매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로 내면에서는 천천히,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릴케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겠지만 릴케는 이렇게 구체적인 언어로 보통의 인간들이 하지 못하는 표현을 해냈을 뿐이다.
그가 아니면 누가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싶은, 절대적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구절이 거침없이 마음으로 들어온다.
행여 네가 앉아 있는 뒤쪽에 생긴 그림자가 너의 주인처럼 일어서지나 않을까 하고 뒤를 돌아다보지 마라. 어쩌면 어둠 속에 그냥 남아 있어서 너의 무한정한 마음이 모든 구별할 수 없는 것들의 무거운 마음이 되려고 시도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너의 내부에는 공간이 거의 없어지고 이런 좁은 데서는 네 안에 아주 커다란 것이 머무를 수 없게 된다는 게 너를 매우 안심시킨다. 어떤 엄청난 것도 네 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런 환경에 맞추어 작아져야 한다는 것이 또한 너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너의 밖은 끝이 없다. (84쪽)
목사님이 하는 아가미 호흡은 힘들게 이어져 입가에 거품이 북적거렸으며 그 모든 것이 불안하였다. 대화의 화제는 정확히 말하면, 전혀 없었다. 먹다 남은 찌꺼기 같은 화제가 비싼 값이 매겨져 팔렸고 그것은 하나의 재고품 정리장 같았다. (122쪽)
관심없는 화제가 억지로 오가는 상황에 대한 이런 구절을 읽을 때에는 그 상황이 머리 속에 그려지면서 나도 모르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아가미 호흡, 먹다 남은 찌꺼기 같은 화제, 재고품 정리장.
성서의 <탕아의 이야기>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책 말미에 그가 <탕아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사랑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은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사랑을 받기를 거부하는 청년, 그는 사랑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받을 때가 아니라 줄 때 그 본질이 확인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사랑을 받기를 불편해하고 회피한다. 그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신 (神)이다.
신과 삶과 죽음에 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면 그것은 일상과 다른 상황에 놓였을때 비로소 찾아온다. 많은 문학들이 그렇게 탄생하였다. 정답이 없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으로 서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도 다른 이의 문학 작품을 파고 드는지도 모르겠다.
파리에서의 고독과 절망이 릴케를 통과하면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리뷰 제목에 썼지만, 이 작품의 의미는 더 깊고 복잡하다. 삶과 죽음,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탐색 작업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페이지와 행을 다 이해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읽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