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린이 문학을 보는 시각
김이구 지음 / 창비 / 2005년 7월
평점 :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문학을 가볍고 쉽게 본다. 성인문학으로 가는 계단문학쯤으로 보기도 한다. 어린이문학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부터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어린이문학, 동화, 아동문학 등, 용어 조차 아직 확실히 분류되고 정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쉬운 이론서라도 읽어볼 요량으로 도서관 서가를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 책은 평론서이지만 이론서를 읽은 것 만큼만족스러웠다. 어린이책들을 그냥 읽을 때와 또 다른 느낌으로, 이렇게 분석되고 해체되고 평가될 수 있구나, 새로운 세계를 만난 느낌이었다. 저자가 스스로 평론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옮겨와 본다.
동시 읽기의 지루함에서 나를 구제해주는 것은 간혹 만나는 아주 좋은 동시들이다. 특히 좋은 작품을 좋은 해설이나 비평과 함께 읽을 때, 동시 읽는 즐거움은 배가 된다. 내 기억에 남아 있고 나를 퍽 행복하게 해주는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이렇듯 대개 그 동시의 맛과 뜻을 제대로 짚어주는 '도우미'를 만난 덕이 크다. 적실한 감상을 곁들여 작품의 핵심을 짚어주는 비평을 읽으면 시 한구절 한구절이 가슴속으로 절절하게 스며들어오고, 흐릿하던 시의 육체가 풋풋하게 살아 움직이는 '생물'로 다가온다. (13쪽)
평론이라하면 일단 부정적인 시각을 떠올리게 되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인 양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도우미'라고 표현을 했고 이제 그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겠다.
사회 현실, 시대 정신이 들어가있지 않은 동시는 진정성이 없다는 일부 동화작가, 평론가들의 의견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조용한 일침을 놓기도 한다.
동시를 쓰는 어른은 당대의 어린이들보다 한 세대 내지 두 세대를 먼저 살아가는 세대다. 이 앞세대가 자기 세대의 가치와 정서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아이다운 수준으로 아이의 목소리에 의탁하는 차원을 넘어, 아이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새로운 가치의 충돌을 본능적으로 감지하여 '내일의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시인이야말로 더욱 소중한 동시인일 것이다. <옥중이>와 <감자꽃>, <김치를 싫어하는 아이들아>에 담긴 '건강성'도 소중하고 근대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응이 된다고 보겠지만, 모습을 바꾸며 지속되는 근대의 모순과 착종을 온몸으로 사는 동시인도 만났으면 한다. (26쪽)
즉, 동시 속에 변화의 대응성, 변화의 정신을 담되 치우치지 말자는 이야기이인데, 참으로 절제된 문구로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이 파악한 흐름이라면,
이 오덕 선생이 주장하는 '일하는 아이들'로 상징되는 한 줄기 흐름, 그리고 이 오덕 선생의 이런 주장에 의하면 '
동심천사주의'에 지나지 않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부류의 예로서
채 인선의 동화를 또 한 줄기로 볼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오덕 선생은 <일하는 아이들은 버려야 할 관념인가> 라는 글을 통해 아직도 노동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농촌 어린이들의 현실이 드러나있지 않은 어린이문학은 본질이 빠진 것이나 다름 없으며 <유희정신>이라는 글에서는 그러한 동화나 동시를 '아이들의 놀이가 아니고 시인 자신의 공상적 유희 상태', '아이들을 인형으로, 위안물로 여기는 어른 중심의 개인주의적이고 향락적인 유희정신'이라고 평했음을 저자는 언급하면서, 이 오덕 선생의 취지는 이해가 되나 그것을 유일한 잣대로 하여 다른 작품에 대한 비평 기준을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자못 긴장하며 읽어내려간 부분이기도 하다. 어느 한 생각에 몰입하게 되면 다른 생각을 보는 객관성을 잃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 같다.
요즘 어린이문학에서도 트렌드가 된
팬터지문학에 대해서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이해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오즈의 마법사>, <해리포터>, <고양이 학교>와 같이, 현실 세계와 다른, 작가가 창조한 제2의 세계가 주된 현실이 되고, 활동 주체들은 이 제2의 현실 속에서 자기를 실현하는 모험을 떠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의 2차 세계는 1차 세계외 뚜렷하게 구별되는 작동 원리를 가진 세계로서, 작가의 풍부하고 설득력있는 창안이 요구된다. 반면 <어두운 계단에서 고양이가 (임정자)>, <엄지소년 닐스 (린드그렌)>, <학교에 간 할머니 (채인선)> 등에서는 아이의 심리적 환상 또는 공상이 어떤 다른 세계를 그려놓기는 하지만 2차 세계가 성립할 정도로 풍부하게 1차 세계와 다른 현실이 창조되어 있지는 않다. 즉, 후자의 경우는 표현 기법으로서의 팬터지일 뿐 작품 전체를 팬터지 장르로 분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72, 72쪽).
우리 나라는
과학 소설 분야에 있어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다는 지적도 하였다. 이말은 바꿔 말하면 과학 소설은 우리 나라 아동 문학의 블루 오션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아닐까?
동시의 리얼리즘을 중시하고 일하는 아이들의 현실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오덕, 임 길택 등의 시에 대해서는 그의 글 '아동문학을 보는 시각' 속에서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반론을 펴고 있다.
작가는 아이의 시점으로 바라보거나, 아이들 세계를 그린다. 따라서 그의 시는 아이들과 친연성을 갖고, 아이들을 독자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그리는 시세계에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을까? 무언가 다른 시선, 다른 관찰, 다른 경험을 제공하지 않는 '아이의 시선'이라면 굳이 아이들은 그런 동시를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임 길택의 시는 동시가 아닐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른들을 향한 문학으로 굳이 아이의 시선을 취하고, 아이들 세계를 그려야 하나? (121쪽)
어린이문학은 일차적으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작품을 쓰는 것은 어른이기 때문에 여기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문제점들이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작품이냐, 어린이들이 읽어서 감동을 느낄 작품이냐, 아이의 눈을 빌었다고 하면서 정작 어른을 위한 작품이냐 따위의 문제들이다. 이 밖에도 저자는 우리 나라 어린이문학이 극복해야 할 세가지로
'동심주의', '교훈주의', '속류사회학주의' 를 들고
있다 (185쪽). 다른 작가 원 종찬은 그의 글 <한국 아동문학의 어제와 오늘>에서 한국 아동문학이 극복해나가야 할 과제로 위의 세가지에
'감상주의'를 하나 더 언급하였다.
어느 분야에서나 유행에 민감한 우리네 습성은 어린이문학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을 언급한 부분을 옮겨와본다.
국내 창작은 시장의 '대세'를 따라 엇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을 엇비슷한 틀로 찍어내는 쏠림 현상이 두드러진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오늘의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들면서 독특한 자기 색깔을 찾으려는 작품들도 더러 눈에 띄고, 재기있는 신인들의 등장도 보이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229쪽)
실제로 '창비'에서 오랜 기간 편집자로 일해온 저자가 어린이문학 분야 응모작들을 평하는 지면에 실은 글이다. 대세에 쏠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독특한 자기 색깔을 찾으려는 진지함이고, 그런 작품들이 없지 않다는 것은 희망적인 가능성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청소년소설'이라고 부르는 분야는 일반 소설과 비교할 때 어떤 특성을 보이는가에 대해, 소설 속 어른은 세상과의 싸움에서 늘 지거나 상처받고 때로는 그 싸움을 피하는 데 견주어, 청소년소설 장르는 현실과 맞부딪혀 싸우면서 적응해가는 소년들의 진취적인 의지와 모험을 적극적으로 옹호할 때 선택되며, 가까운 미래에 사회의 주인이 될 존재로서 소년에게 온전한 인격을 부여할 때 (청)소년소설은 성립한다고 했다 (261쪽). 청소년 소설이 지향해야 할 결말을 암시해주는 말인데, 평소에 청소년 소설이 일반 소설과 다른 것이 뭐가 있나 생각하던 사람이라면 새겨둘만한 말이다.
어린이책을 즐겨 읽고 아끼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권하고 싶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어린이문학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즐길수 있게 하기 위한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