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언니가 없는 내가 어릴 때부터 무척 따르던 사촌 언니가 있다. 내가 아직 학교도 들어가기 전 스물 몇살이었던 언니가 가끔 서울에 올라올 일이 있으면 우리 집에 와서 며칠 자고 가곤 했는데 나는 어떡하면 그 언니가 우리집에서 좀 더 오래 있다 가게 할 수 있나 머리를 굴리곤 했다. 오자 마자 언니 몇 밤 자고 갈거냐고 물으면 할머니께서는 집에 온 손님에게 오자마자 언제 가는지 묻는거 아니라고 하셨지만 나는 일종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었던거다. 그만큼 그 언니가 왔다 가고 나면 나는 오랫동안 울적했다.

언니가 내일 간다, 모레 간다, 하고 드디어 돌아갈 날을 알게 되면 나는 언니 며칠만 더 있다 가라고 조르기도 하고 사정도 하면서 매달렸다. 그럴때면 언니는 항상 웃으면서 금방 또 올거라고 나를 달래주었다. 그럼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그 언니의 소지품을 몰래 숨겨두는 만행을 저질렀다. 언니의 머리빗, 칫솔, 손수건, 이런 것을 몰래 숨겨두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없어진 걸 알면 찾을 때까지 언니가 우리집을 못떠날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번도 찡그린 얼굴을 본적이 없다. 푸근하고 넉넉하고 어른들에게도 칭찬받고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기 때문인지 나 같은 꼬마들하고도 얘기를 잘 주고받았다. 우리 집에 오면 내 머리도 빗겨주고 그림도 그려주고 옛날 얘기도 잘 해주었다. 늘 언니 노릇을 해야했던 나에게도 언니라고 부를 누가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위안이었다.

그 언니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잠시 전주에 내려가 살던 시기가 있었다.  마침 전주 출장을 갈 일이 있으셨던 엄마께서 그 언니 집에 가서 하루 주무셨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아침 식사는 물론이고 엄마에게 앉으시라고 하고는 직접 머리 드라이까지 정성껏 해주더라고 엄마는 지금도 그때 말씀을 해주신다.

결혼 후 따로 일을 안한 대신 시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형부와 두 아들까지 얼마나 정성껏 뒷바라지 하는지, 형부는 지금까지 아침에 옷을 스스로 꺼내 입은 적이 없다고 하신다. 언니가 그날 날씨에 맞게 상의부터 양말까지 다 꺼내서 준비해준다는 것이다. 형부가 그렇게 해달라고 한적도 없는데 언니가 결혼 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해온다고 한다.

독실한 크리스찬이라서 교회에도 열심히 나가는 언니는 말도 잘하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큰집의 장녀이기 때문에 집안의 대소사 일에도 빠지지 않는다. 지금도 늘 웃는 얼굴. 아주 오랜만에 만나도 지금도 그 언니를 보면 그냥 안기고 싶어지고 나의 닫혔던 입이 절로 열리게 한다.

그런 언니가 아주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엄마로부터 들었다.

"그 언니가 왜?"

아들들도 잘 키워 모두 출가시키고 얼마전엔 회갑을 맞은 언니이다.

나름대로 고민이 있겠지 라고 엄마는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언니에게 고민이 있는게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이라는 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초긍정, 항상 스마일, 사교적이고, 사람 좋아하는 언니가. 형부가 언니를 힘들게 한 것도 아니고, 지금은 단촐하게 형부랑 둘이 여유있는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언니는 다른 사람들의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들어주는 일은 잘 하고 있지만 막상 언니의 고민을 얘기할 사람은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이 아프거나 힘들다고 하면 발벗고 달려가는 언니, 막상 자신이 힘들땐 쉽게 털어놓고 공감을 구할, 그럴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언니, 언니도 불평도 좀 하고 투정도 부리고 그래 언니. 그래도 되는거야."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단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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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0-05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레 사람들이 언니한테서 '받아먹기'에 익숙해졌을 뿐,
언니하고 나긋나긋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은 없었으리라 느껴요.

'받는' 사람들은 으레 '받는 줄 못 느끼며 아주 마땅하다'는 투로
받아들이곤 하잖아요. 이러다 보면, 서로 같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삶동무인 줄 잊기 일쑤예요.

서로 같은 자리에 있을 때에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만큼,
'받들리'거나 '떠받드는' 사이가 되고 말면,
'사랑으로 베푸는 사이'에서 자꾸 멀어지겠지요..

hnine 2012-10-05 18:24   좋아요 0 | URL
'삶동무'라는 말, 참 좋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얘기 하는 것을 더 좋아하지, 다른 사람 얘기 듣는 건 잘 못하더라고요.

saint236 2012-10-05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 사람들이 보기엔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 속에는 제각각의 근심과 걱정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의 상처가 이제야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최근에 생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상 불평도 하고 투정도 하는 것이 힘든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 같은 경우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계신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따지는 것도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그냥 대화해주는 거지요. 이런 저런 이야기들, 쓸데 없는 신변잡기들도, 그리고 옛날 추억들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힘내세요.

hnine 2012-10-05 22:36   좋아요 0 | URL
우울증의 원인부터 제대로 알아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들 보통 말하는데 saint님 말씀 듣고 보니 원인을 아는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들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일 같네요. 이런 저런 이야기, 쓸데 없어보이는 신변잡기, 하다 못해 드라마를 같이 보면서 나누는 이야기, 그러면서 자기의 본심을 슬쩍슬쩍 드러내게 되니까요. 옛날 추억 이야기를 하게 되면 풀리지 않은 앙금 같은게 드러나기도 하고 말로 표현하고 나면 조금씩 그 맺힘이 풀려가기도 하겠지요.
이런 얘기하면 상대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미리 염려하여 자신의 고민이나 걱정은 혼자의 마음 속에 다 쌓아놓고 있는 것도 문제이고, 상대방이 그렇게 어렵게 대화의 문을 열었는데 시큰둥하게 흘려듣고 마는 실수도 하지 않도록 해야겠어요.
도움 말씀, 감사드립니다.

saint236 2012-10-07 16:33   좋아요 0 | URL
원인을 아는 것보다 먼저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하고요. 다음이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진단하고 원인을 발견해서 치유하는 것은 지인들이 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냉철하지 못하고 개인의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에요. 심리적인 문제들은 이래저래 힘든 것 같네요.

hnine 2012-10-07 21:57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병원에서 의학적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주변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해줄 수 있는 방법은 다르겠지요. 두가지 모두 필요할 것이고요.
평소에 특정 종교에 대해 특별히 호, 불호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요즘은 종교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머님께서도 조금씩 조금씩 호전되셨으면 좋겠어요.

마녀고양이 2012-10-05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
저는 자주 그런 실수를 해요. ㅠㅠ.

어쩌다 좀 힘이 있어보이는 분이 들어오시는거예요, 그래서
아 오늘은 좀 괜찮겠구나 하는데, 아이고, 이야기 듣다보면 제가 울고 있어요.
상대가 못 울고 방긋방긋 웃으면, 대신 제가 울더라구요. ㅠ

hnine 2012-10-05 22:28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 요즘 본격적으로 상담 시작하신거예요?
상대방이 하는 얘기에 공감해서 함께 울고 웃어주는 편과, 아니면 끝까지 객관성을 지키며 흔들리지 않는 편.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 상담자일지 저는 그게 늘 궁금했어요.
예전에 제 친구 하나가, 자기를 비난조로 말하는 상대에게, 다른 말 필요없이 딱 한마디만 던지더군요. "네가 날 알아?"
위에 말한 제 사촌언니는 그 언니를 잘 아는 사람이 보아도 남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해결해줄 사람으로 보이지 결코 우울증에 걸릴 사람처럼 보이지 않거든요. 휴...

비로그인 2012-10-05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렇네요...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건, 스스로에게 부담이 적어서 더 위험한 것 같아요. 사람이 제일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에요. 나만 어려운 게 아니라 모두가 어려울 거란 생각을 하면 위로도 되고, 또 더욱 아득해지고 그러네요. 마음이 동글동글한 사람이 쓴 글을 읽고 싶어서 요즘 찾고 있답니다. 박완서 작가님 책을 읽으면 어떨까 싶구요. 주말, 잘 보내세요 hnine님!

hnine 2012-10-05 22:34   좋아요 0 | URL
마음이 동글동글한 사람이 쓴 글이라...글쎄요, 찾으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모름지기 작가란, 다른 사람보다 감수성이 몇배 더 높을테니 동글동글하기보다는 뾰족뾰족 더 예민하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남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것을 포착해낼 수 있으려면 그래야할거라고...
저는 박완서님의 책을 대부분 대학 다니면서 도서관에서 다 찾아 읽었는데 소설보다 수필로 시작했어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수필을 읽으면서 이분 상당히 예리하고 냉철하신 분이로구나 생각했거든요. 첫인상이 그렇게 딱 박혀버렸답니다.
제 마음을 동글동글하게 만들고 싶을 때 저는 어린이책을 봐요. 그림책이요. 이제 아이도 다 컸는데도 그림책을 한질 구입을 할까도 생각한답니다. 저를 위해서요 ㅋㅋ
주말 잘 보내라는 수다쟁이님 끝인사가 오늘따라 따뜻하게 들리네요 ^^

희망찬샘 2012-10-06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싸한대요. 제 사는 것이 힘든 시절, 남의 아픔은 안중에 없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픈 사연들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제가 많이 행복해졌나 하는 생각을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참 좋은 언니 분이, 위로받을 무엇인가, 아니면 누구인가를 만나 어려움을 극복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ㅜㅜ

hnine 2012-10-06 22:38   좋아요 0 | URL
다른 사람의 얘기가 다른 사람의 얘기로 들리지가 않지요. 언젠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고요. 생활은 더 풍요로와졌는데 심리적으로는 더 빈곤해져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언니는 그래도 신앙이 돈독하니 그것이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와요.

프레이야 2012-10-06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같은 그런 분들이 더 위험하다고 들었어요.
투덜대고 풀어내기라도 하면 오히려 낫다고...
가까운 사람들이 힘이 되어 드려야할 시기 같네요. 짠해요.

hnine 2012-10-07 08:23   좋아요 0 | URL
'기발한 자살여행'이란 책을 읽고 있는데 첫 페이지에 그런 말이 나오네요. 핀란드 사람들의 가장 고약한 적은 우울증이라고요. 많은 핀란드 사람들이 이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심신을 갉아먹는 이 우울증을 물리치려고 하는 치열한 전투를 해내야 된다고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계산하고 혼자 삭히지 말고 좀 주책맞더라도 말씀하신것처럼 투덜대고 풀어내면서 사는게 백배 나은것 같아요.
멀리서 그냥 걱정만 하고 있을 뿐 언니에게 별 도움이 못 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