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報恩) 

  

밥을 안치는 것도
국을 끓이는 것도
빨래를 너는 것도
과일을 씻는 것도
숭배의 일부임을 알 것 같다 

 

걷는 것
자는 것
먹는 것
쓰는 것
쉬는 것 

 

모든 악덕은 시작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결례 

 

그 앞에서
우리의
가장 늦은
성불

  

 

 

추억은 추억하는 자를 날마다 계몽한다 

 

추억은 짐승의 생살
추억은 가장 든든한 육식
추억은 가장 겸손한 육체
추억은 추억하는 자를 날마다 계몽한다 

 

추억은 실재보다 더 피냄새가 난다
추억은 도살장
추억은 정육점
붉게 점등한 채
싱싱한 살점을 냉동보관한다
어느 부위 하나 버릴 게 없구나
번작이끽야(燔灼而喫也)라 

 

  

 

나무 그림자 안에 내 그림자 

 

누군가 두고 간 우산처럼
공원 벤치에 앉아
저녁을 기다리자니 

 

몸 늙는 대로
마음 늙기를 원해 보네
마음 가는 곳에 몸이 가 있어야 했던
청춘은 그러나 노예처럼 

 

멀찌감치 서 있던 나무 하나
그림자 끝을 뻗어 내 그림자에게로 와 있네 

 

한 걸음만 자리를 옮겨도
나무 그림자 안에 내 그림자
이 서늘함 속에 쪼그리고 앉아 있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도
여기에서 이 자세로
몸 썩는 대로 마음 썩겠네 

 

몇 날 며칠
햇볕 짱짱하고 바람 칼칼하면
재처럼 휙, 날려서
나는 흔적 없겠고 

 

나무 그늘 아래 벗어둔
운동화 한 켤레는 남겠지만
펼쳐둔 경전처럼 남겠지만
펼쳐둔 경전처럼 펄럭일 거네 

 

노예처럼 한 청춘
경솔하게 읽었던 성구들이
쟁쟁쟁 음악처럼 놀고 있겠네 

 

  

 

 

 

 

 

 

 

 

 

 

...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사람보다 나무, 구름, 돌 같은 것들에 마음 가는 때가 많아지는 것
누군가 두고간 우산처럼 벤치에 앉아 저녁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그리 슬프지만은 않은 것  

한때 서울 근교에서 어린이 도서관도 운영했던 이 시인.
나보다 한살 적다.
이 시집 이후로 또 나온 시집이 있나 검색해보아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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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4-02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페이퍼네요~~ 추천 꾹!

대전에서 좋은 강연회가 있어 님께 알려드려요.
내 서재에도 올려두었지만, 명창순 작가 강연회가 있네요.

2011. 4. 2 (토) 오후 1:00~3:00 꾸러기 어린이 도서관

2011. 4. 8 (금) 오전 10:30~12:30 도산회관 5층 YWCA강당에서요~~~

전에 명창순 선생님 독서치료의 첫걸음 읽고 리뷰 썼던 게 생각나서요.^^

hnine 2011-04-02 08:0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페이퍼에서도 이 시인의 다른 저서들 소개하신 것 본 기억이 나요.
위의 두 강연,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분이 대전분이시던데 활동도 대전을 중심으로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가서 들어보면 여러 가지 궁금하던 것들을 더 많이 알 수 있겠지요? 꼭 가볼께요.

순오기 2011-04-05 23:53   좋아요 0 | URL
지금 보니 토요일 강연은 이미 끝난 것을 알려드렸네요.ㅋㅋ
그래도 금욜 강연에 참석하면 되겠네요~ ^^

hnine 2011-04-06 05:09   좋아요 0 | URL
금요일 강연도 벌써 벌써 마감되었다네요 흑흑...

순오기 2011-04-08 01:35   좋아요 0 | URL
미리 신청해야 되는 거였군요.
그래도 강연장에 가면 신청하지 않았다고 입장을 못하게 하지는 않을거에요.^^

꿈꾸는섬 2011-04-01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소연 시인의 시집을 저도 찾아봐야겠네요.^^
너무 좋아요.^^

hnine 2011-04-02 08:05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는 아마 꿈꾸는 섬님도 이 시인의 시들을 마음에 들어하실 것 같아요. 마음 저 깊은 속을 쿵~ 때리는 느낌이랄까요. 지금 찾아보니 이 시인의 다른 책들도 꽤 많네요.

양철나무꾼 2011-04-02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이 쓰신 '마음사전'도 참 좋았어요.
이렇게 만나니 반가운걸요~^^

hnine 2011-04-02 08:07   좋아요 0 | URL
예, 저도 그 책 나왔을때 관심이 갔었는데 아직 읽지 못하고 지나쳤네요. '마음사전' 다시 마음에 담아두어야겠어요 ^^
저는 이분의 '은행나무처럼'이라는 그림책 가지고 있는데 참 독특했어요. 역시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이 더 공감할 내용이었고요.

꿈꾸는섬 2011-04-04 11:39   좋아요 0 | URL
아, '마음사전' 쓰신 분이군요.
저도 마음사전은 보았어요.
아, '은행나무처럼'도 우리집에 있어요. 이 책 참 좋잖아요.
와, 너무 좋은 작가를 이제야 알아보게 되었네요.^^

Joule 2011-04-02 0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도 갸름하고 서늘하고 정갈하게 생기셨어요. 일산에서 작가들 낭송회 하면 주로 이분이 사회 많이 보시더라구요.

hnine 2011-04-02 08:09   좋아요 0 | URL
이분이 일산에 사신다고 들은 것 같은데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네요. Joule님은 직접 뵌적이 있으신가봐요. 전 라디오에서 목소리만 들어봤는데 무척 차분하고 천천히, 하지만 한마디 한마디를 진심을 다해 꼭꼭 씹어 말한다는 느낌을 받았었어요.
저도 한번 보고 싶어라~ ^^

섬사이 2011-04-02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 늙는대로 마음 늙고
몸 썩는대로 마음 썩고..
그래야 하는 건데, 그게 맞는데 말이에요.
보관함에 담아놓아요.

hnine 2011-04-02 21:47   좋아요 0 | URL
순리대로,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야하는데, 우리는 그걸 거스르려고 해요. 그래서 마음이 불편해져요.

마녀고양이 2011-04-02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찌감치 서 있던 나무 하나
그림자 끝을 뻗어 내 그림자에게로 와 있네

를 읽다가, 갑자기 숨을 천천히 쉬기 시작했어요.
오늘 꼬옥 외식하고, 천천히 호수 공원을 걷겠어요....... 꼬옥
늘어진 그림자를 보려구여. ^^

hnine 2011-04-02 21:50   좋아요 0 | URL
일산에 있는 어린이도서관 운영하시던 분이어요. 아마 지금은 잠시 쉬고 있는 것 같던데...
저런 어휘를 쓸 수 있고 시를 엮어낼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유전자를 타고 났을까, 부러움 반, 감탄 반입니다.
호수공원이 가까이 있나봐요? 말로만 많이 듣던 호수공원, 언젠가 한번 가볼 수 있겠지요?

2011-04-03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4 0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4-03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하시며 지내실까 궁금해서 좀 들렸다 갑니다.
저물어가는 일요일에 시도 읽고 가고요.

요새 약 먹고 있어서 그런지 좀 피곤하기도 하고 일찍 잠에 들게 되는데, 일요일 마무리하기 전에 hnine님 서재에는 좀 들려보고 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ㅎ

다시 시작하는 일주일, 좋은 일 많으시길 빌겠습니다.

hnine 2011-04-04 07:09   좋아요 0 | URL
저도 서재 들어올때마다 바람결님 어찌 지내시나 궁금했는데 이렇게 들러서 소식 전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약은 무슨 약인지요? 약 먹는 동안은 피곤하기도 하고 소화가 잘 안되기도 하고 졸음이 오기도 하고 그런데, 열심히 잘 드시고 얼른 나아지셨으면 좋겠어요.
부족한 점보다 가진 것, 밝은 쪽을 보는 노력을 좀 해보려고 합니다 이번 한 주일이요. 바람결님도 잘 지내세요.

달사르 2011-04-19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좋습니다. 마음이 정결해지는 느낌이네요. 저도 hnine님 따라 읽어봐야겠어요.
시인의 시를 읽노라면, 몰래 가서 그 시인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싶어져요.

hnine 2011-04-20 19:25   좋아요 0 | URL
오늘도 서점에 들렀다가 안 읽은 이 시인의 시집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다 왔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시가 마음에 들어오니 시인이 궁금해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