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배탈이 났던 후유증으로 기진맥진 널부러져 못 일어나고 있는 중, 옆에서 자던 아이가 먼저 일어나 부스럭거린다. 시간을 보니 6시 35분.
"너 벌써 일어났니? 학교도 안 가는 날인데?"
"축구 하러 가는 날이어요."
"그래, 축구...맞아. 몇시라고 했지?"
"9시요."
몇 주전에 내 허락도 없이, 아빠와 둘이 가서 덜컥 대전시티즌 유소년 축구단에 가입하고 온 아이. 매주 토요일 모여서 축구 연습을 하는데 모이는 시간이 격주로 오전 9시, 아니면 오후 3시30분 이다.
'아, 오늘은 정말 일어나기 싫구나.' 라고 속으로만 말했지만 아마 내 표정에 가기 싫어하는 마음이 다 표시 났을 것이다.
있는 의지력을 다 끌어모아 샤워하고 옷 차려 입고 아이 밥 먹여서 버스 타고, 내려서 걷는데 벌써 내리쬐는 햇볕이 심상치 않다.
마침내 모이기로 한 미니 축구장을 찾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내 아이 또래의 꼬맹이들이 보이질 않는다. 시간은 다 되었는데.
"다린아, 9시에 모이는 것 맞아?"
"네, 지난 주에 3시 30분이었으니까 이번 주는 오전 9시가 맞아요."
9시를 훨씬 넘겨 기다려도 아무도 오질 않는다. 지난 주에 아이를 데리고 갔던 남편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받질 않는다. 구단 사무실 전화번호를 물어물어 연락해본 결과 1,3,5주 토요일은 3시 30분, 2,4주 토요일은 오전 9시란다. 그러니까 오늘 모임은 오후 3시 30분에 있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뚜껑이 팍 열리고 아이에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이 시간에 나오느라고 아침에 이불 속에서 기를 쓰고 나와야 했던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또 배가 아파오는 것만 같았다.
"뒤로 돌아서 갓!"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아이에게 몇 차례 더 쾅글왕글거리고, 또 땡볕을 걸어 피아노 레슨 데리고 다녀오고, 기진맥진하여 집으로 돌아왔더니 이제 원래 모이기로 한 축구 연습 시간이 다 되어간다.
일주일동안 그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 아이에게 말로는
"엄마에게 한마디 상의없이 가입했으니 엄마 끌고 다닐 생각마!" 라고 했지만 막상 그럴 수가 없었다. 다시 아이를 데리고 짱짱한 햇빛을 온몸에 받으며 미니 축구장으로 가서, 연습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늘을 찾아 이리 저리 자리 옮기며 기다려야 했다. 자그마치 2시간을.
돌아오는 길에 아이 하는 말, 조금 후 7시에 대전 시티즌과 아르헨티나 축구팀 사이에 경기가 있는데 자기네 유소년축구단이 입장식때 같이 입장한다면서 거길 가고 싶다는 것이다.
축구가 막 미워지려고 한다. 이제 엄마 몸의 밧데리가 한칸도 안 남았다고, 이거 다시 충전시키기 전에는 아무 것도 못할 것 같다고 얘기하고 그냥 집으로 들어와서 대신 TV로 보게 해주겠다고 했다.
아이는 지금 옆에서 열심히 그 축구 경기를 보고 있는 중이다. 이런 일 몇번 더 겪고 나면 나 정말 축구에 정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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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6-05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되면 제일 고충이 아플 때 맘대로 쉬지도 못하는 거라는 게
에이치나인님 그 고충 이해할 것 같아요.
그래도 지금은 아파서 그렇지 다린이 축구 곧 잘 한다는 칭찬을 받거나
우리나라 축구팀이 이번 월드컵에서 의외의 선전을 하면 마음이 달라지실 걸요?ㅎ
그저 님 몸이 얼른 좋아지는 게 제일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힘내십쇼!^^

hnine 2010-06-05 22:04   좋아요 0 | URL
아,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늘 제가 다른 식구들을 깨우는 입장이었는데 오늘 그 역할이 바뀌어보고 나니 이불 속에서 밍기적거리는 심정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안그래도 월드컵 기간동안 우리 집의 TV시청에 관한 rule은 무용지물이 될 것 같습니다.

순오기 2010-06-05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학교가는 토요일이었는데...다린이는 학교 안가도 되는 날이었나요?
쉴토는 2.4주니까 오늘은 6월 첫주였는데...
나인님 몸 추스리고 어여 밧데리 충전하시고~~ 우린 축구 아는 여자잖아요.^^

hnine 2010-06-05 22:06   좋아요 0 | URL
예, 다린이 학교는 안가는 날이었거든요.
밧데리 충전 이제 웬만큼 되었습니다. 막대기 두개 정도는 되었어요. 자고 일어나면 만땅 되겠지요? ^^
그리고 확실히 예전보다 축구에 대해 아는 것이 좀 많아지긴 한 것 같습니다. '축구아는 여자' 그 책은 여전히 저보다 아이가 끼고 살아요.

무스탕 2010-06-05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린이도 축구에 열과 성을 보이고 있군요 ^^
정성이도 2학년때던가 방과후 학교에서 축구를 한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축구에 관심을 더 많이 보이더라구요.
요즘 울 집은 아빠 + 지성 + 정성이 월드컵만 오매불망중입니다.
뭐 저도 기다리고 있지만요 ^^;

오늘 밤 푸~욱 쉬시고 내일 살살 움직이시면 월요일엔 과충전 밧데리가 되어계실거에요 ^^

hnine 2010-06-06 08:55   좋아요 0 | URL
다린이 반 엄마들 얘기 들어보니 다른 남자 아이들도 요즘 축구에 목숨 걸었다고 하더군요. 한창 그럴 때인가보다고요. 그런데 5학년 쯤 대면 한 풀 꺾인다고도 하고요.
오늘이 월드컵 5일전인가요? 두둥~ 입니다.

lazydevil 2010-06-05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하~~ 웃어서 죄송ㅠㅜ 그래도 웃긴 걸 어떻합니까...
더듬어본 결과, 문제의 발단은 '배탈'이 아니라, '내 허락도 없이'가 아닐까 싶은데요~^^;
"벌써 일어났니? 학교도 안가는 날인데?" -->정말 축구가 좋은가 봅니다.
암튼 아홉살 다린이 귀엽습니다. ㅋㅋ

hnine 2010-06-06 08:57   좋아요 0 | URL
웃겨드렸으면 저도 좋지요.
예리하십니다. 제가 좀 속이 좁아서 그런지, 제게 아무 말 없이 결정해버리는 것에 좀 민감하답니다.
(아, 그리고 다린이 아홉살이 아니고 벌써 열살이랍니다. 아홉살이라면 그래도 귀여운 맛이 있는데 말이지요.)

상미 2010-06-06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둔해서 몸 움직이는거 싫어하는 울 아들 보다 백만 배 낫다 생각하렴....

hnine 2010-06-06 10:51   좋아요 0 | URL
예전에 혁이도 몸 움직이는 거 참 싫어해서 운동하는 걸 못봤거든. 너도 알다시피 나는 두말 할 것도 없고, 남편도 나와 막상막하이고.
다린이는 돌연변이야.

다락방 2010-06-06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한 칸 남은 밧데리는 충전 좀 하셨어요? 일요일 오전인데 말입니다!

문득, hnine님은 어떻게 몸의 밧데리를 충전하실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나 밧데리가 방전되는 날이 있고, 또 저마다 충전하는 방식이 있을텐데 말이지요. 이제 좀 괜찮으신가요?

hnine 2010-06-06 10:5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는요... 밧데리 충전을 알라딘서재에 들어와서 해요...^^)

비로그인 2010-06-06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쾅글왕글..

ㅎ 우리 귀여우신 hnine님 !
충전지 만땅으로 채우시고, 여유와 함께 일요일 되시길 빕니다. ^^

hnine 2010-06-06 17:48   좋아요 0 | URL
아이쿠, 제 나이에 귀엽다니, 손,발,목까지 오그라드옵니다요 ^^
충전지 다 채워지기도 전에 자꾸 쓰니 문제네요.
이제 저녁 준비해야할 시간. 아무래도 하려고 하던 일은 있다가 밤에 바람결님 오늘 올려주신 음악 들으면서 해야겠습니다.

같은하늘 2010-06-14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울 둘째넘이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공 몰고 뛰어다니는데 다시한번 생각해봐야겠어요. 저도 아이들 쫏아 댕기며 뒷바라지할 성격도 체력도 안되거든요.^^

hnine 2010-06-15 00:20   좋아요 0 | URL
아이쿠, 저도 전혀 그런 성격도 체력도 아니었답니다. 그런데 어쩌겠어요.
같은하늘님도 마음의 준비를...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