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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1
노먼 메일러 지음, 이운경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평점 :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같이한다. 아직 전쟁을 겪어보지 않고 간접 경험만 해온 세대인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만큼 전생을 실감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 소설로 처음 만나게 된 저자 노먼 메일러는 나만 모르고 있었나 싶게 미국 현대 문학의 대표적 인물중 한 사람이다. 1923년 미국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에서 항공기술학을 전공하고 우등 졸업을 했으나 평소 문학에 관심이 많아 혼자서 습작을 해오던 그는 졸업후 바로 2차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필리핀 군도에서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사실주의 소설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를 발표한다. 발표하자마자 좋은 평을 받고 알려지기 시작하여 이후 잡지 출간을 비롯,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주목을 받게 되고 뉴저널리즘 소설이라고 하는 <밤의 군대들>로 1968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주로 사회적 이슈를 담은 소설을 발표해오던 중 사형수의 실제 삶을 담은 소설 <처형인의 노래>로 1979년에는 두번째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나자와 사자>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바 있는 이 소설이 2016년 새로운 제목과 번역으로 다시 선보이게 된다.
2차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일 년 전 스물 두살의 나이로 군에 입대하여 미군의 필리핀 탈환 작전에 투입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노먼 메일러는 1,20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을 완성하였고 그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이 밝으면 강습상륙정이 내려지고 선발 병력이 파도를 타고 아노포페이 해안으로 진격해 들어갈 것이었다. 탑승한 병사 전체가, 호송선에 있는 사람 모두가, 몇 시간 안에 자기들 가운데 목숨을 잃는 사람이 생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8쪽)
전쟁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방식을 바꿔놓았던가. 전쟁은 물론 군대 경험도 해본 적 없이 간접 경험이 전부였던 나에게 이 소설만큼 읽으면서 내가 마치 전장에 있는 듯한 기분을 줄곧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대단한 전투 장면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님에도 용병제로 군인을 모집하는 미국에서 각자 군인에 자원하여 들어온 사람들의 각자 다른 배경, 생각, 인간성, 그리고 전장의 상황 묘사를 무서울 정도로 그려놓았다.
지리적 배경은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점령한 남태평양의 가상의 작은 섬 아노포페이. 여기에 미국이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부대를 이끌고 있는 커밍스 소장은 초기의 소소한 전과 이후 이렇다 할 진전이 없고 장기화 조짐이 보이자 상황을 타개하고자 무리하여 보토이 만 상륙 작전을 구상하게 되고, 이를 위해 소규모 정찰대를 파견하기로 한다. 그리고 커밍스 소장은 평소 자기에게 반기를 들고 있던 '헌' 소위를 희생이 짐작되는 그 임무에 투입시키고 무리한 정찰 임무를 지시한다. 무리한 작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시대로 움직여야 하는 군대라는 체계. 무리수라는 것 외에도 거기에 얽힌 국가의, 그리고 개인의 이해 관계, 무섭고 엄연한 전쟁의 본질과 원리까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뒤집어 말하면, 전투에서 병사들은 인간보다 기계에 더 가깝다. 그럴듯하고 수용할 만한 명제다. (2권, 237쪽)
기계에 가까와야하고,
전투란 지배적인 습성을 지닌 채 들판을 빠르게 내달리고 햇볕 아래에선 난방기처럼 땀을 흘리며 빗속에서는 쇳조각터럼 굳어 버리는 수천의 인간-기계들을 조직하는 장이다. (2권, 237쪽)
인간이 기계로 효율화되는 장은 '전투'이다.
우리는 이제 기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사과가 몇 개 있는가, 말이 몇 필 있는가를 따지지 않는다. 기계 한 대가 인간 여러 명의 몫을 해낸다. 영도자들이 신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나라에서는 기계를 숭상한다. (2권, 237쪽)
인간적인 티를 함부로 내서는 안된다.
그는 지금 로스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고 싶었으나, 그렇게 했다간 로스가 때만 되면 찾아와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동정을 구할 게 분명했다. 로스는 자기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면 아무에게나 달라붙을 위인이었다. 그렇게 하도록 둘순 없었다. 결국 로스도 얼마 안 가 총에 맞을 사람 아닌가. (2권, 249쪽)
자기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하며 마지막으로 잠시 어머니의 따뜻한 품 같은 것을 기대하고 울며 고마음을 전해오는 '로스'를 보며 마음을 무장하고 있는, 그래도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던 '레드'의 심리를 나타낸 부분이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전쟁의 실체이고 미국 사회, 미국 병사들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 대한 밑바닥을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소설이다. 계급적인 불평등과 억압이 지배하고, 명령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반사적인 복종에 무감각해져가는 체제를 구축하는 극한 상황, 죽음의 현장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 여기서 커밍스 소장은 생각한다. 파시즘은 이런 인간의 실제적 본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차라리 공산주의보다 낫다고. 파시스트적인 힘이 병사들로 하여금 인간적인 한계를 넘게 하는 추진력이 된다고. 그럴때 군사 체계는 최대화 되고 병사들은 인간에서 기계가 되어간다.
적극적인 대처로 맞서기 보다 환멸과 무기력으로 빠져들었던 '헌'을 일컬어 해설에서는 현대 지성인의 표본으로 보았고 (2권, 503쪽) 작가는 그를 '생명의 그릇임에도 결국 어떠한 생명도 잉태하지 못하는 썩은 자궁, 혼탁한 자궁' 이라고 했다. 사상적 재료가 행동으로 꽃 피우지 못하는 지성을 말하는 것이다.
무서운 것은, 이 전투의 결과 누구도 승자와 패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상황 타개를 위한 작전을 수행하였을 뿐, 손해도 이득도 보지 않았고, 다음 작전에서 좀 더 성과를 내리라 헌티스 소상의 다짐으로 맺고 또한 시작을 의미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내가 마치 전쟁터에 던져진 듯한 느낌을 가장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던 대목은 윌슨이라는 병사가 죽어가는 대목이었다. 길고도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 죽음마저 쉽지 않을 만큼 지리하게 모든 고통이란 고통을 다 경험시키며, 죽음 뒤에도 끝나지 않고 다른 동료들에게 짐이 되는 극도의 비참함. 이 모든 지옥 경험과 개인의 삶과 죽음의 결과는 단 하나, 작전이 성공으로 끝났냐 아니냐 하는 결론으로만 의미를 남긴다.
커밍스 소장의 생각, '역사는 우익의 수중에 있고, 역사는 이번 세기 동안, 아니 어쩌면 다음 세기까지도 우익의 것이 될 것'이라며 미래의 유일한 도덕률은 힘의 도덕률이고 군대는 미래를 미리 보여준다는 예언은 작가가 전하는 이 소설이 보내는 경고라고 역자는 해설에서 덧붙이며 그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했다.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