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OUT 유럽역사문명 - 지식 바리스타 하광용의 인문학 에스프레소 TAKEOUT 시리즈
하광용 지음 / 파람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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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바리스타' 라는 단어가 재미나다. 바리스타가 커피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고객에게 맛난 커피를 서비스하듯이, 독자에게 주제에 맞는 지식을 전달해주겠다는 저자의 의지가 느껴진다. 스스로를 '본투비 잡학교양인' 으로 소개하는 저자는 전작 『TAKEOUT 유럽예술문화』 에서 '추상적인 개념들보다는 구체적인 사례와 일화 중심으로 가볍고 흥미롭게, 하지만 관점과 깊이를 가지고 유럽을 탐방'( 온라인 책소개 중 발췌 ) 했었는데, 이번에는 TAKEOUT 유럽역사문명』 을 통해 유럽역사문명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TAKEOUT 유럽역사문명

하광용

파람북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즐기듯, 400여 페이지의 두툼한 이 책을 이곳저곳 들고 다니며 조금씩 읽었다. 저자는 서두에서 '강단 위의 학자가 아닌 호기심 많은 어느 한 광고인의 시각'에서 자신의 취향과 지식의 크기에 맞게 선택한 주제들을 펼쳐내었기에 '쉽고 가벼울 것'이라고 소개한다. 저자의 말 대로였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출퇴근길 대기 중에 잠깐씩, 시간이 날 때마다 읽고 싶은 주제들을 편하게, 재미있게 읽었다.

책은 TAKEOUT1 에서 TAKEOUT6 까지 6개의 장으로 분류되어 있고, 각 장은 네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믿음에 얽힌 이야기', '사랑, 그 위험한 역사', '그 남자의 몰락', '담대한 여정의 시작', '쫓겨간 사람들', '레트로의 마력' 이라는 주제 중 어떤 주제가 가장 끌리는가.

나는 '사랑, 그 위험한 역사'(TAKEOUT 2) 편을 먼저 펼쳤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워하는 분야인 신화나 고전 이야기도 담겨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역시 <일리아드> 와 <오디세이> 속 헬레네와 페넬로페 이야기가 관련된 지역의 지도, 관련된 인물에 관한 그림, 관련된 음악을 들어볼 수 있는 QR코드와 함께 펼쳐진다. 음악을 들으며 글을 읽어나가니 눈과 귀가 모두 즐겁다.

조금 엉뚱한 이야기로 넘어가보면, 어린 시절 PC 게임으로 즐겼던 추억을 바탕으로 지금 즐기고 있는 <대항해시대 오리진>이라는 모바일 게임이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이 게임으로 세계 도시들의 지도를 외웠다고나 할까. 그런데 게임으로 익숙한 도시 『TAKEOUT 유럽역사문명』 속에서 언급되니 '이 도시가 그곳이었어?' 라며 혼자 즐거워하게 된다.

지중해의 동쪽 끝, 오늘날의 튀르키예 바닷가에 위치한 안탈리아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도시' 라고 소개된다. 안토니우스가 동방 지역을 정벌할 때 클레오파트라가 그곳까지 올라와 만났을 것이라며, 그들이 마치 신혼 여행지처럼 즐긴 곳이라면서 말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연기한 클레오파트라의 모습을 떠올리며 로마의 역사의 한 장면을 읽어간다. 페이지에 수록된 안탈리아의 여러 사진들과 함께 감상하다보면, 광고인으로서 연수와 사업 출장을 기회로 일찍부터 유럽에 자주 드나들었던 저자의 경험이 전해지는 듯 하다. 나는 이탈리아 로마가 아닌 곳에 있는 고대 로마의 유적지들을 보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저는 로마의 콜로세움으로 대표되는 원형경기장은 도시 로마에만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p126)' 라는 문장에 '사실 전 지금 알았습니다.' 라고 대답해보면서. (로마가 아니라도 이탈리아에만 있는 줄 알았다는 변명도 해보고 말이다.)

인물 이야기 또한 반갑다. 책 속에서는 메디치가 이야기를 다루면서 메디치가의 줄리아노의 연인이었던 '시모네타 베스푸치' 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혼인 줄리아노와 달리 유부녀였던 시모네타 베스푸치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이란 그림의 모델이었을 뿐더러, <대항해시대 오리진>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라 더욱 친숙했다. ( 책 리뷰가 아니라 게임 리뷰가 되어버리면 안되는데.. )

 

시모네타 그녀가 어느 정도로 아름다웠냐면 당시 메디치 가에서 익숙했던 르네상스의 유명 화가인 보티첼리는 그녀를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경탄해 마지않아 한 폭의 그림에 그녀를 담았습니다. 바로 그 그림이 대표작인 <비너스의 탄생>입니다. 시모네타 그녀의 모습이 곧 미의 여신 비너스가 된 것입니다. 지구상에 여신 비너스가 있다면 그것은 시모네타일 것이라고 보티첼리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 TAKEOUT 유럽역사문명, p149

시모네타 베스푸치를 비롯하여 25세의 나이로 암살당해 요절한 줄리아노의 죽음이 빚어낸 몇 가지 유산들이 이어 소개된다. 줄리아노의 암살범 중의 하나로 처형당한 자의 모습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에 등장하고, 그 공개처형장면을 함께 지켜본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를 지나, 미술 시간의 석고 데생을 위해 많이 봐왔던 미켈란젤로의 줄리앙 석고상까지! 저자의 말처럼 "갸가 갸가?' 하게 되더라는. 이 석고상의 주인공이 암살당한 줄리아노라는 설과 죽은 줄리아노의 조카인 동명이인이라는 설까지 조곤조곤 들려준다.


(좌) 줄리앙 석고상, (우) 미켈란젤로,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i Lorenzo de' Medici) 묘의 조각상

책을 읽는 시간은 어릴 적 교과서로 억지로 지식을 쌓기 위해 공부하듯이 읽는 시간(저만 그랬을까요..)이 아니라, 파편화되어 있던 여러 지식들을 모아보는 재미가 가득한 시간이 되어갔다. 킬링타임용 게임을 하다가 책 속 내용을 연결해보고, 책을 읽다가 여행의 경험을 떠올리며 과거 사진을 찾아보는 식이다. 덕분에 아이에게 아는 척 하며 해줄 이야기도 늘어나고, 언젠가 가보고 싶은 곳도 생긴다. 이런 것들이 책에서 얻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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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합본 한정판)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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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내게는 이른바 합본부심(負心)이 있는 듯 하다. 책의 내용도 즐기지만, 책의 만듦새도 즐기기 때문일터다. 덕분에 이미 읽고 소유한 책들이라도 합본이 나오면 책에 대한 수집욕도 불타오른다. 그런데 '한정판' 이라면 어떻겠는가. 2017년에 발표된 후, 2018년에 국내에 출간된 소설 『파친코』 는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던 스테디셀러였으며. 애플TV+에서 동명 드라마가 공개된 후 더욱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재미교포 1.5세인 이민진 작가가 1989년부터 30여 년에 걸쳐 이야기를 구상했다는 이 작품은, 고향을 떠나 타지에 뿌리내리고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이민자의 삶을 작가 특유의 통찰력과 공감 어린 시선으로 들려주고 있다.



하드커버 책의 겉싸개를 살포시 벗겨보면 또다른 표지가 나타난다. 유광의 겉싸개와 다른 느낌의 무광의 배경 위의 금색 제목과 나비가 멋스럽다. 푸른색의 은은한 꽃문양 또한 마찬가지다. 겉싸개에 선명하게 드러나있던 파친코의 핀들은 슬며시 사라져 있는 듯 하다. 합본 전의 두 권으로 나왔던 소설을 완독한 나로서는 자연스럽게 그 의미를 소설의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해보게 된다.



표지의 나비의 의미는 이전부터 궁금했었다. 원서의 표지를 보면 표지 디자이너의 감각이 발휘된 결과물인 듯 하지만, 작가의 의지 또한 닿지 않았을까. 작가와의 만남 때 질문을 해볼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합본으로 다시 『파친코』 를 읽었던 시간은 이렇게 '나비'에 꽂힌 채로 시작했다. 비록 소설에서는 나비에 관련된 부분은 한문장 밖에 찾지 못했지만.


양진이 사람 사이에 놓여있는 탁자에 끈이 달린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파란색 천에 노랑나비 수놓은 것은 선자였다. 2 전에 받은 생일 선물이었다.

파친코 합본, 1 p141


『파친코』 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제목이 주는 의미는 꽤 중요하지 않겠는가.


일본에서 많은 차별을 받아왔으며 정식 직업을 얻기 힘들었던 조선인들은 생계를 위해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인으로서 돈을 벌 수 있는 몇가지 없는 길 중의 하나였지만, 동시에 일본인이 가장 천시하던 일이기도 했다. 당시 파친코는 일본인들에게 야쿠자(조직폭력배)가 운영한다는 인식이 강해 ‘범죄자나 하는 더러운 일, 조선인과 같은 천한 민족이나 할. 수 있는 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별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선자의 가족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차별과 멸시, 가난 속에서도 끝까지 버티며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혐오와 멸시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방인 중의 이방인인 재일 동포, 자이니치의 삶이 선자의 가족의 삶을 통해 파친코라는 제목에 녹아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 가족과 그 주변 인물들이 겪은 수난과 생존 투쟁의 역사' 등과 같은 '디아스포라(diaspora·고국을 떠난 사람) 문학' 즉 이주민의 정체성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담는 장르에 대한 해석을 벗어나 다른 면으로도 생각해본다. 파친코의 어원이 되는 빠칭코(パチンコ)는 일본의 슬롯 게임으로 도박게임이다. 확률에 기대어 하는 게임이기에, 앞을 예측할 수 없다. 파친코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있어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굴러갈지 알 수 없다는 불명확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애플TV+의 드라마 <파친코>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대부분 레버를 잘 당기면 파친코가 터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손님들은 결과를 좌지우지 할 수 없어. 우리도 마찬가지고( 파친코 드라마 속 대사 중에서 )"

우리 모두 또한 불명확한 삶 속에서 '인생 속에서 길을 잃은 이방인인 된 경험'을 해보지 않던가. 우리 또한 이방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파친코에 대한 묘사 이후에 모자수가 내뱉은 "야, 삶은 늘 고달프지만, 그래도 게임은 계속해야지.(p588)" 란 말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선자를 중심으로 대략 1910년에서 1990년까지 4대에 이르는 한 가족의 이야기인지라 등장인물들이 많다. 그 중 선자와 한수 사이의 첫째 아들인 노아의 삶이 안타까웠다. 한수가 자신의 친아버지임을 알게 된 노아가 선자에게 뱉는 말에 담긴 절망.


난 평생 일본인들한테 내가 조선인 핏줄이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조선인들이 화가 많고 폭력적이고 교활하고 속임수를 쓰는 범죄자라는 소리를 들었다고요. 평생 이런 소리를 견뎌야 했어요. 난 백이삭처럼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절대 목청을 높이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이 핏줄은, 내 핏줄은 조선인 핏줄이예요. 게다가 이제는 내가 야쿠자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내가 어떻게 하든 이 피는 바꿀 수 없어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어요. 어떻게 내 삶을 망칠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리 경솔할 수가 있죠? 어리석은 엄마와 범죄자 아버지라니. 난 저주 받았어요.


- 파친코 합본, p488, 노아의 중에서


동생인 모자수는 소식이 없는 형 노아에 대해 "내 생각에 형은 선량한 조선인이 되려고 애쓰는 것에 지쳐서 그만 둔 거야.(p588)" 라고 하며 자신은 '선량한 조선인'이 될 수 없다고 한다. 함께 고생하는 가족을 부양하고자 자신의 신분을 숙이고 일본인 행세를 하며 조선의 피를 부정해야만 했던 자식 세대.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의 이야기를 먹먹한 마음으로 읽어간다.

모자수는 경제력을 쌓고 "우리에게는 조국이 없어. 삶은 솔로몬이 통제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니까 적응해야지. 내 아들은 살아남아야 해 (p615)" 라며 사회 엘리트 계층으로 아들 솔로몬을 키우고자 노력한다. "난 사람 대우를 받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었단다. 부자가 되면 사람들이 나를 존경할 것이라고 생각했어.(p738)" 그럼에도 솔로몬 또한 열 네살 생일날 외국인 등록증을 발급받아야 했으며, 성인이 된 후 회사에서 중요한 거래를 성사시켰음에도 이용당한 채로 회사로부터 버려진다. 솔로몬은 더 이상 일본 회사에 취직하지 않고 아버지의 파친코 사업을 이어받기로 결심한다.


일본인이 되는 것보다 미국인이 되는 것이 더 나을까? 솔로몬은 일본으로 귀화한 조선인들을 알았고 그것이 타당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렇게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렇수도 있다. 피비의 말이 옳았다. 일본에서 태어나고도 남한 여권을 갖는 것은 이상했다. 귀화하는 것도 배제할 수 없었다. 다른 조선인이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더이상 상관없었다.


가즈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가즈는 나쁜 인간 중 한 명이자 일본인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런 사고방식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배운 것일 수도 있었다. 설사 나쁜 일본인 백 명이 있고 좋은 일본인 한 명이 있다고 해도 솔로몬은 성급한 일반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중략>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어떤 면에서는 솔로몬도 일본인이었다.


- 파친코 합본, p731-732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소설의 문장을 떠올린다. 소설이 역사라는 거대한 파도에 맞서 이기거나 혹은 지는 승부의 서사가 아닌, 역사의 파도 속에서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은 문장에서 시작해서 후반부 선자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선자가 그리워하는 것은 한수도, 심지어 이삭도 아니었다. 선자가 꿈에서 다시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젊음과 시작, 소망이었다. 선자는 그렇게 여자가 됐다. 한수와 이삭과 노아가 없었다면 이 땅으로 이어지는 순례의 길도 시작되지 않았으리라. 이 아줌마의 삶에도 평범한 일상 너머에 반짝이는 아름다움과 영광의 순간들이 있었다. 아무도 몰라준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항상 곁에 있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 파친코 합본, p741


'이민진의 소설이 역경을 이겨낸 승리와 보상의 서사가 아니라 근대 국가라는 얼굴 뒤에 잠복한 편재하는 차별에 서사에 더 가까워짐(푸른사상, p54)' , '이민진의 소설이 디아스포라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보편적 차별성에 대한 서사로 확장되는 길목' 이라는 문장에 공감했던 기억도 함께 떠오른다. 잡지 『푸른사상』 2022년 가을호에서 특집으로 다뤄진, 소설 『파친코』 와 드라마 <파친코>를 여러 각도로 비교하는 글에서 흥미롭게 읽었던 내용이다.


그리고 다시 나비로 되돌아가본다. 잡지 『푸른사상』 특집에서 김기림의바다와 나비 시구인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이상주의자였던 선자의 남편 백이삭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어린 날개에 상처를 입은 나비.


질병에 시달리며 인생의 오랜 시간을 병상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던 백이삭의 신체적 허약함은 조선의 허약함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상처입은 나비의 시린 허리를 연상케한다. 백이삭은 바다의 수심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의 죽음이 시리다. 그러나 소설의 서사는 백이삭의 죽음에 집중하지 않는다.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서사의 진전은 간결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달하는 작가의 특징이다. 또한 이는 남성 가부장의 무기력함과 모성적 존재의 강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중략>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선자는 상관없었다.


- 『푸른사상』 2022 가을호,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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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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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나에게 가장 다가온 책은 업다이크의 『캔 타우로스』였지만 거듭 읽는 사이에 조금씩 처음의 광채를 잃고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최고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는 계속 최고의 소설로 남았다. 불현듯 생각나면 나는 책꽂이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꺼내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쳐 부분을 집중해서 읽곤 했는데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페이지도 재미없는 페이지는 없었다. 어떻게 이리도 멋질 수가 있을까 감탄했다.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멋진 소설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본 인간은 하나도 없었고 읽어보겠다는 생각을 할만한 인간조차 없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했던 나는 『노르웨이 숲』 을 통해 『위대한 개츠비』 를 찾아 읽었고, 그리고 스콧 피츠제럴드라는 소설가를 만났으며 그의 다른 작품도 찾아 읽었었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글이나 그의 인터뷰에서 피츠제럴드에 대한 애정을 종종 확인하고는 했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한 고교 시절부터 피츠제럴드의 소설이라면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설가가 되기 전 부터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좋아해서 계속해서 끈질지게 번역해 왔다고 밝혀왔다. 피츠제럴드의 작품 『라스트 타이쿤』을 번역한 후의 한 인터뷰에서 "소설가가 되기 전부터 나는 그의 작품을 사랑하고 부지런히 번역해왔다.피츠제럴드는 나의 출발점이자 일종의 문학적 영웅이다." / (2022년 4월, 산케이 신문) 라고 전하기도 했다.


『어느 작가의 하루』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고르고 기획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책으로, 피츠제럴드가 작가 활동 후기에 발표한 단편소설 8편과 에세이 5편이 담겨있다. 한국어판 『어느 작가의 하루』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한 일본어판과는 달리, 영미문학 전문 번역가인 서창렬이 스콧 피츠제럴드의 글을, 일본문학 전문 번역가 민경욱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번역했다.



어느 작가의 오후

F.스콧 피츠제럴드

인플루엔셜



여행지에서 수록된 단편소설과 에세이를 휘리릭 읽었던 나는, <엮은이의 >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피츠제럴드의 후기의 작품들을 고른 이유를 듣고는 앞으로 돌아가 차근차근 다시 읽었다. 읽기에서의 희미한 느낌이 재독에서 선명해지는 느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기 연민이나 자기기만을 능가하는 ' 독자들도 함께 발견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책을 위해 내가 고르고 옮긴 작품은 주로

그가 그대로 '자기 몸을 축내며' 살았던 암울한 시대에 내놓은 작품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깊은 절망을 헤치고 나아가려는,

그리고 어떻게든 희미한 광명을 움켜쥐려는 긍정적인 의지가 줄곧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피츠제럴드의 작가로서의 강인한 본능일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엮은이의 중에서, p362


소설보다도 에세이에서 전해지는 감정들이 더욱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모든 인생은 망가져가는 과정이지만(망가지다, p303)' 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다니! <망가지다(The Crack-Up)>, <붙여놓다(Posting It Together)>, <취급주의(Handle with Care)>라는 제목의 이른바 '망가진 3부작' 하루키도 매우 좋아해 읽고 읽었지만, 나이가 먹어야 적당할 같아 번역을 아껴둔 작품이라고 한다. 하루키는 에세이를 '망가진 3부작' <나의 잃어버린 도시>라는 에세이를 염두에 둔다고.



'대단히 낙관적이던 한 젊은이가 어떻게 해서 모든 가치가 붕괴되는 일을 경험'했는지 <망가지다>와 <붙여놓다>를 통해 이야기하던 피츠제럴드는 <취급주의> 에서 '지각있는 성인이라면 어느 정도 불행한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것' 이라며 운을 떼지만 '이런 사실을 확실히 파악하는 데 몇 달이 걸렸지만, 나는 이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산 탓에 더욱 암울하게만 느껴졌던 인생의 내리막길. 알코올에 의존하고, 후배 작가들에게 추월당한다는 초조함과 경제적인 궁핍, 아내의 신경쇠약으로 고통받고 있던 말년의 피츠제럴드. '인생이 낭만적인 것이라는 믿음이야 말로 너무 이른 시기에 거둔 성공의 대가이다(p354)' 라면서도 쓰기를 멈추지 않는 작가의 본능과 굳건한 의지를 작품의 곳곳에서 확인하게 된다.


하필 비슷한 시기에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몰아본 탓이었을까. 생뚱맞게도 "우리 모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경계인들이다" 라는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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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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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세 말로는 없는 것에 목소리를 부여한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줬다

스웨덴 한림원, 2023 노벨문학상 선정사유





멜랑콜리아 I-II

Melancholia I-II

욘 포세

세계문학전집 431

민음사




소설 『멜랑콜리아』는 19세기 말 실존했던 노르웨이의 풍경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1830~1902)의 비극적 일생을 소설화한 작품으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는 1995년과 1996년에 따로 발표된 「멜랑콜리아 I』과 「멜랑콜리아 II』 를 묶어 합본으로 출간했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현지 출간 당시 노르웨이 순뫼레 문학상, 멜솜 문학상 등을 받았고,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의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위대한 유럽 문학 70대 작품'에 선정된 포세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소개되어 있는 작품이다.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1인칭 독백으로 시작하는 1부는 그의 생애 중 이틀을 다룬다. ( 각각의 하루는 연속되지 않고 시간의 간격이 있다. ) 화자인 '나'는 같은 노르웨이 출신 화가 한스 구데가 교수로 있는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 유학을 와 수업을 들으며 풍경화가가 되고자 하는 인물이다. 소설 속의 첫번째 날인 1853년의 어느 늦가을 오후, 교수가 아틀리에를 방문하여 그의 그림을 볼 예정이지만 화자는 퇴짜를 맞을까 걱정이 가득한 나머지 '아주 멋진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한스 구데를 만나기 싫다'(p11) 라고 생각하며 '오직 침대에 누워있고 싶을 뿐' 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극대화된 그의 불안한 내면은 1인칭의 의식의 흐름 기법의 서술 속에서 반복되는 단어와 문장을 통해 극명하게 표현된다.


멜랑콜리아. 소설의 제목을 다시 들여다본다. '멜랑콜리' 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떠올리게 되는가. 나는 우울하고 슬픈 감정을 떠올리고, 이어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고독하고, 조금은 낭만적인 모습을 이어 떠올려보게 된다. ‘우울’ 혹은 ‘우울질’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멜랑콜리(melancholy)의 원어는 고대 그리스어 멜랑콜리아(melancholia) 로, 이 용어는 처음부터 낭만적인 우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향적인 기질 뿐만 아니라, 욕심이 많고, 감정적이며, 나태하다고 여겨지는 기질이었다. 특히 중세에는 멜랑콜리아가 기독교의 7가지 대죄중 하나인 '태만 acedia'과 관련된다고 해석하면서 이를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 멜랑콜리아를 특별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흐름이 생겼다. 15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가 “우울질 없이는 창조적 상상력 기대할 수 없고 모든 창조는 이것으로부터 연유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 한 예다. 예술가의 우울질이 천재성을 강화해준다는 믿음 때문에 창의적 예술성이나 정신적 노동과 멜랑콜리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 생각은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예술가는 아니더라도 나 또한 중요한 일을 앞두곤 불안에 사로잡힌다. 주인공처럼 이 일을 하기에 자격이 없을 거라고, 일에서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비관적인 생각에 갇힐 때도 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끼곤 한다. 누구나 느끼는 불안과 우울이란 감정은 독자들에게 주인공의 불안이 낯설지 않게 다가오게 한다. 그는 불안을 떨치기 위해 그가 사는 하숙집 주인의 딸인 헬레네를 생각해보기도 하고, 실력에 대해 자만과 자기 경멸 사이를 오고한다. 실력에 대한 자만은 그의 동료들을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들' 과 '그림을 못 그리는 화가들'로 나누기도 한다.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다른 화가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그림을 잘 그리니까.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 화가들이 내게 무슨 말을 하든 개의치 않는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림을 잘 그리니까. 그들은 그림을 못 그린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린다. 그들이 내게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림을 잘 그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림을 못 그린다.

p207



단어와 문장이 반복되지만, 반복이 이어지면서 조금씩 정보가 추가되어 있다. 독자들은 밑에 가라앉아 있던 정보들을 읽어내며 인물들의 사연과 내면,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을 유추해야 한다. 주인공이 혼잣말로 내뱉는 문장은 연극 배우의 대사처럼 시적이다.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래서 재미있기도 하다. 역자는 한 인터뷰에서 "기승전결이 뚜렷한 영미 문학과 달리 북유럽 문학은 빠른 전개나 줄거리에 기대지 않는다. 욘 포세, 페르 페터슨, 로이 야콥센 같은 스칸디나비아 문호의 작품은 반나절 또는 하루의 이야기가 책의 전체를 채우기도 한다. 그만큼 내면 이야기 위주다. 언뜻 난해하고 지루하게 느낄 수 있지만 오래도록 두고두고 읽을 수 있고 그때마다 새롭게 다가온다." 라며 욘 포세의 작품이 난해하다고 느낄 수 있는 독자들에게 "기회가 된다면 그의 작품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서 그 특유의 아름다운 리듬감을 느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터"라고 전했다. 

( 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4891#home )

 


주인공의 독백에서 반복되는 키워드 중에 화자의 내면을 유추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희고 검은 천', '아버지', '빛' 등의 키워드들. 지인들과 독서토론에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다.


희고 검은 천

안 돼. 지금은 안 돼.

그 희고 검은 천, 그 검고 흰 천은 지금 내 앞에 나타나선 안 된다. 내게 오면 안 된다.

p162



그의 생각은 상상과 망상 사이의 경계를 지나버린지 오래다. ‘희고 검은 천’ 이 그의 앞에 나타나는 것은 그가 시달리는 환상 중의 하나다. 소설 초반에 등장했을 때는 그가 자신의 환상을 인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 앞에 나타나선 안 된다’ 라고 되뇌는 장면이 추가되는 것을 보니 그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타인과의 대화 중에 희고 검은 천이 나타나면 결국 ‘도대체 누구와 대화하는 거죠?’ (p162) 라는 식의 질문을 받는다. 이 정도면 타인과 어울리며, 일상적으로 사회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소설 속에서 시간이 훅 지나 185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인공이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 두번째 날이 놀랍지 않다. 두번째 날에서 그는 '나는 오늘 가우스타 병원에서 도망칠 것이다. 화가가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건 말도 안된다.' 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그 가운데 '과거와 현재, 환영과 환청 등이 혼란스레 중첩되는 주인공의 내면이 한층 구체적으로 전달된다.( 역자의 말 중에서, p518 )' 가우스타 정신병원에서의 독백에서는 특히 '빛' 이라는 키워드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첫번째 이야기에서는 헬레네와 아버지를 떠올릴 때 등장했던 '빛'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는 온종일 당신을 그리워한다. 그리움은 마치 하늘처럼, 빛처럼 나를 맴돈다. 당신은 내 가슴속에 자리한 하늘이자 빛이다. 헬레네, 나는 이처럼 당신을 그리워한다. ( p136 )


햇살이 눈부셨다. 빛이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외면의 빛과 내면의 빛을 말하며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면의 빛이라고 했다. ( p119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스치는 갖가지 생각 조각들은 떨쳐 버려야만 했다. 근심과 걱정거리, 심지어는 즐겁고 기쁜 생각들조차 내 머리속에 깃들자마자 조각조작 부수어 떨쳐 버려야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내면은 고요해질 수 있었다. 고요함이 나의 내면에 자리를 잡고 내게 신의 자비가 내리면 나는 빛 속에 들어설 수 있다. 그 빛은 뜨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기품 있고 우아하게 반짝이는 빛, 묵직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가벼운 빛,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빛, 나는 그러한 빛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빛은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빛을 느낄수 없다면 내게 무슨 일이 생기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빛을 느낄 수 없다면 신의 자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의미지만, 가끔은 빛을 느낄 수 없어도 우리는 신의 자비 속에 있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p121)


두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빛'은 그 의미가 더욱 구체화된다. '혼란 속에서 주인공에게 상징적인 현실, 덧없음과 가닿을 수 없는 신성을 의미( 역자의 말 중에서, p518 )' 하고, 더 나아가 '탈출구'로까지 의미를 확장한다.


나는 마음을 비우고 차분해져야 한다. 그러면 저 멀리 있는 환한 빛이 내 속에서도 반짝일 수 있을 것이다. 전적으로 마음을 비우고 차분해지면 내 안에서도 빛이 생겨날 것이다. 나는 모든 일에 고군분투할 필요 없다. 나는 차분해져야 한다. 나는 내면에서 반짝이는 빛이 되어야 한다. 나는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 빛이 되어야 한다. <중략> 내 가슴속을 휘젓는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한데 모여 가느다란 직선으로 변하고 그 직선이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나의 내면은 텅 비어 하얗게 변할 것이고, 나는 차분해질 것이다. 나는 머릿속에 있는 생각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비울 것이다. <중략> 세상일과 갖가지 의미들을 지우고 내면에서 반짝이는 빛, 구름 사이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빛, 내 눈에 보이는 빛과 함께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아무도 그릴 수 없는 훌륭한 그림을. 나는 내면에 빛을 간직한 채 아버지 곁에 앉아 있을 것이다.

p258



2부는 1부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뒤 치매를 앓고 있는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누이 올리네의 이야기로 옮겨진다. 올리네가 점점 흐릿해지는 기억을 더듬으며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흔적을 더듬어가게 되는데 3인칭으로 서술되는 형식이다. 1부의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실존 인물이라면 2부의 올리네는 작가가 창조한 허구의 인물이다. 합본으로 읽게 되니 독자들은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오가며 실제 역사와 소설적 상상력을 버무린 매력을 더욱 느끼게 된다. 소설 『멜랑콜리아』는 욘 포세의 작품 중에서는 독특한 위상을 지녔다고 소개되어 있다. 예사로운 일상 속 삶이라는 부조리를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평범한 인물을 주로 그리던 작가가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죽은 후에야 인정을 받은 노르웨이의 비운의 풍경화가인 라스 헤르테르비그(1830~1902)는 오늘날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풍경화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욘 포세가 한 인터뷰에서 "헤르테르비그의 그림에서 보았던 어떤 것을 꺼내고자 했다" 라고 밝혔던 것처럼, 그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작품에서 찾아낸 것은 인간이 가진 본원적인 우울(혹은 불안)과 광기, 빛에 대한 희구였던 것일까.


 



(왼)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해안 풍경'(1855) @구글아트프로젝트 , 

(오) 닐스 비욘슨 묄러가 그린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초상화. @노르웨이 국립박물관 홈페이지


올리네는 이미 가족 대부분을 떠나보내고 죽음을 바라보는 노인이다. 사라져가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남동생 라스의 모습, 음성 등 모든 흔적을 뒤쫓는다. 기억을 잊을 때마다 좌절하며 파편처럼 부서지는 올리네의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두 남매의 고통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면서, 불안과 혼돈을 겪는 인물의 내면에 보다 깊숙하게 들어가게 된다.


욘 포세는 본질적으로 형태와 내용이 서로 얽혀 있다고, 즉 내용도 본질적으로 양식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작가다. 소설 『멜랑콜리아』 에서도 반복적이고 간결한 문장, 의식의 흐름 기법 등 독특한 형식이 내용과 밀착돼 독자를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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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연결된 사회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오노 가즈모토.다카다 아키 엮음, 이진아 옮김 / 베가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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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ID19 팬데믹을 통과하며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세계에서 철학자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지나치게 연결된 사회』 는 일본 PHP연구소의 오노 가즈모토와 편집부가 '신실재론'을 내세우며 주목받는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 Markus Gabriel 과 진행한 인터뷰를 편집한 형태로 엮은 책이다. 이전 슬라보예 지젝이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한 책을 읽은 기억도 떠올려보면서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철학자의 생각을 마주해보는 시간. 





지나치게 연결된 사회

마르쿠스 가브리엘

베가북스



제1장 '사람과 바이러스의 연결' 에서는 같은 종, 즉 호모 사피엔스인 각 세계의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직면하여 동일한, 특정한 반응을 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바이러스 그 자체보다는 바이러스의 '표상'에 반응하고 있음을 먼저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팬데믹 이전과 달라진 지금의 모습을 여러 가지의 예로 설명하는데,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유럽에서 취해진 록다운 조치에 대한 이야기를 근대 초기의 정치철학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연결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홉스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록다운 이론인데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의 표지는 국가에 의한 폭력과 경찰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페스트가 유행했던 상황을 그린 것으로, 의사들이 페스트 감염 예방용 마스크를 쓰고 있다. 



이것이 칼 슈미트 등이 언급했던 국가의 비상사태를 가리키는 '예외적인 상태'인 것이다. 이 예외적인 상태에서는 정부, 즉 행정기관이 독재 체제로 통치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말살하는 형태의 독재가 아닌 예외적인 상태에서 국가를 위협하는 문제가 국가의 결단을 좌우하는 독재 정치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놓여있는 상황이 이러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저자가 속한 독일에서는 '독재'라는 단어가 더욱 조심스러운 터라 그는 '유럽 국가들은 위생 독재의 모델을 도입했다'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각 장의 말미에는 인터뷰와 별개로 저자의 칼럼이 수록되어 있는데 앞선 인터뷰에서 언급되었던 내용이 좀 더 부연 설명되어 있다. 1장의 경우 홉스의 사회계약설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의 중학 교과서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었던 터라 더욱 관심 있게 읽었다. 


제2장 '국가와 국가의 연결' 에서는 트럼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미국의 예외주의를 이야기하고, 미국과 독일에서 쏟아진 음모론에 대해서도 다루는 등 국제 문제를 화두로 삼아 엮는다. 음모론의 온상으로 넷플릭스의 픽션영화들을 지목하거나, 정치화되어버린 언론, 소셜 미디어의 폐해를 지적한다. 일본에서 요청된 인터뷰다 보니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독일, 그리고 EU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일본의 상황 또한 지적하면서 나름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전반적으로 '윤리적' 인 부분을 강조한다. 윤리적인 정치가로서 독일의 정치가 앙겔라 메르켈을 언급하기도 하고, 윤리적 행동을 이끌어내는 사회의 조건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나눈다.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운데, 세계화의 신자유주의적 해석이 환경을 파괴하고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기에, 신자유주의 경제가 만들어낸 부보다도 그것이 파괴한 부가 더 컸다고 주장하며, 그렇기에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은 이제 끝날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는 제4장 '새로운 경제활동의 연결' 의 윤리 자본주의 미래와 연결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3장 '타인과의 연결' 에서는 SNS의 심각한 문제를 풀어 해석한다. 본인이 바라지 않는 자기를 강요하는 SNS는 사람을 바꿔버린다는 지적은 크게 공감하게 되는 지점이다. '소셜 미디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체성(Identity)을 강매해 큰돈을 벌고 있다(p174)' 라며 새로운 소셜 미디어를 만들 것을 제안하기도 하고, 일본인, 독일인, 뉴요커의 커뮤니케이션을 비교하면서, 토론을 어려워하는 아시아인들을 위한 힌트를 제안한다. 디지털 교류가 크게 보급되어 있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사회적 고립이 높아진 통계를 제시하면서, 앞으로의 공동체와 '고독'의 형태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혼자 있는 것' 과 '고독'은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다양한 측면으로 '연결'과 변화에 이야기하던 저자는 마지막 제5장 '개인이 살아가는 본연의 자세' 에서 그가 '신실존주의(Neoexistentialism)'라 부르는 사고방식에 기반을 두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다시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인생의 의미란', '신의 정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의 근본적인 질문들이 글 사이에 놓인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일본 NHK 의 프로그램 '욕망의 자본주의 2019’, ‘욕망 시대의 철학 2020’ 등을 통해 일본에서 인지도가 더욱 높아진 철학자다. 



일본  NHK, 욕망 시대의 철학 2020


그가 『지나치게 연결된 사회』 5장에 걸쳐 이야기하는 '연결'에 관련된 것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되는 듯하다.  '사람과 바이러스의 연결' , '국가와 국가의 연결',  '개인과 개인 사이의 연결' 이다. 이 세 가지에 관한 철학자로서의 견해를 마주하고, 그가 예견하는 윤리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다 보니 그의 다른 책들이 저절로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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