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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I-II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평점 :
욘 포세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것에 목소리를 부여한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줬다
스웨덴 한림원, 2023 노벨문학상 선정사유
멜랑콜리아 I-II
Melancholia I-II
욘 포세
세계문학전집 431
민음사
소설 『멜랑콜리아』는 19세기 말 실존했던 노르웨이의 풍경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1830~1902)의 비극적 일생을 소설화한 작품으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는 1995년과 1996년에 따로 발표된 「멜랑콜리아 I』과 「멜랑콜리아 II』 를 묶어 합본으로 출간했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현지 출간 당시 노르웨이 순뫼레 문학상, 멜솜 문학상 등을 받았고,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의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위대한 유럽 문학 70대 작품'에 선정된 포세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소개되어 있는 작품이다.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1인칭 독백으로 시작하는 1부는 그의 생애 중 이틀을 다룬다. ( 각각의 하루는 연속되지 않고 시간의 간격이 있다. ) 화자인 '나'는 같은 노르웨이 출신 화가 한스 구데가 교수로 있는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 유학을 와 수업을 들으며 풍경화가가 되고자 하는 인물이다. 소설 속의 첫번째 날인 1853년의 어느 늦가을 오후, 교수가 아틀리에를 방문하여 그의 그림을 볼 예정이지만 화자는 퇴짜를 맞을까 걱정이 가득한 나머지 '아주 멋진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한스 구데를 만나기 싫다'(p11) 라고 생각하며 '오직 침대에 누워있고 싶을 뿐' 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극대화된 그의 불안한 내면은 1인칭의 의식의 흐름 기법의 서술 속에서 반복되는 단어와 문장을 통해 극명하게 표현된다.
멜랑콜리아. 소설의 제목을 다시 들여다본다. '멜랑콜리' 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떠올리게 되는가. 나는 우울하고 슬픈 감정을 떠올리고, 이어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고독하고, 조금은 낭만적인 모습을 이어 떠올려보게 된다. ‘우울’ 혹은 ‘우울질’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멜랑콜리(melancholy)의 원어는 고대 그리스어 멜랑콜리아(melancholia) 로, 이 용어는 처음부터 낭만적인 우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향적인 기질 뿐만 아니라, 욕심이 많고, 감정적이며, 나태하다고 여겨지는 기질이었다. 특히 중세에는 멜랑콜리아가 기독교의 7가지 대죄중 하나인 '태만 acedia'과 관련된다고 해석하면서 이를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 멜랑콜리아를 특별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흐름이 생겼다. 15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가 “우울질 없이는 창조적 상상력 기대할 수 없고 모든 창조는 이것으로부터 연유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 한 예다. 예술가의 우울질이 천재성을 강화해준다는 믿음 때문에 창의적 예술성이나 정신적 노동과 멜랑콜리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 생각은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예술가는 아니더라도 나 또한 중요한 일을 앞두곤 불안에 사로잡힌다. 주인공처럼 이 일을 하기에 자격이 없을 거라고, 일에서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비관적인 생각에 갇힐 때도 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끼곤 한다. 누구나 느끼는 불안과 우울이란 감정은 독자들에게 주인공의 불안이 낯설지 않게 다가오게 한다. 그는 불안을 떨치기 위해 그가 사는 하숙집 주인의 딸인 헬레네를 생각해보기도 하고, 실력에 대해 자만과 자기 경멸 사이를 오고한다. 실력에 대한 자만은 그의 동료들을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들' 과 '그림을 못 그리는 화가들'로 나누기도 한다.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다른 화가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그림을 잘 그리니까.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 화가들이 내게 무슨 말을 하든 개의치 않는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림을 잘 그리니까. 그들은 그림을 못 그린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린다. 그들이 내게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림을 잘 그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림을 못 그린다.
p207
단어와 문장이 반복되지만, 반복이 이어지면서 조금씩 정보가 추가되어 있다. 독자들은 밑에 가라앉아 있던 정보들을 읽어내며 인물들의 사연과 내면,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을 유추해야 한다. 주인공이 혼잣말로 내뱉는 문장은 연극 배우의 대사처럼 시적이다.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래서 재미있기도 하다. 역자는 한 인터뷰에서 "기승전결이 뚜렷한 영미 문학과 달리 북유럽 문학은 빠른 전개나 줄거리에 기대지 않는다. 욘 포세, 페르 페터슨, 로이 야콥센 같은 스칸디나비아 문호의 작품은 반나절 또는 하루의 이야기가 책의 전체를 채우기도 한다. 그만큼 내면 이야기 위주다. 언뜻 난해하고 지루하게 느낄 수 있지만 오래도록 두고두고 읽을 수 있고 그때마다 새롭게 다가온다." 라며 욘 포세의 작품이 난해하다고 느낄 수 있는 독자들에게 "기회가 된다면 그의 작품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서 그 특유의 아름다운 리듬감을 느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터"라고 전했다.
( 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4891#home )
주인공의 독백에서 반복되는 키워드 중에 화자의 내면을 유추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희고 검은 천', '아버지', '빛' 등의 키워드들. 지인들과 독서토론에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다.
희고 검은 천
안 돼. 지금은 안 돼.
그 희고 검은 천, 그 검고 흰 천은 지금 내 앞에 나타나선 안 된다. 내게 오면 안 된다.
p162
그의 생각은 상상과 망상 사이의 경계를 지나버린지 오래다. ‘희고 검은 천’ 이 그의 앞에 나타나는 것은 그가 시달리는 환상 중의 하나다. 소설 초반에 등장했을 때는 그가 자신의 환상을 인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 앞에 나타나선 안 된다’ 라고 되뇌는 장면이 추가되는 것을 보니 그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타인과의 대화 중에 희고 검은 천이 나타나면 결국 ‘도대체 누구와 대화하는 거죠?’ (p162) 라는 식의 질문을 받는다. 이 정도면 타인과 어울리며, 일상적으로 사회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소설 속에서 시간이 훅 지나 185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인공이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 두번째 날이 놀랍지 않다. 두번째 날에서 그는 '나는 오늘 가우스타 병원에서 도망칠 것이다. 화가가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건 말도 안된다.' 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그 가운데 '과거와 현재, 환영과 환청 등이 혼란스레 중첩되는 주인공의 내면이 한층 구체적으로 전달된다.( 역자의 말 중에서, p518 )' 가우스타 정신병원에서의 독백에서는 특히 '빛' 이라는 키워드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첫번째 이야기에서는 헬레네와 아버지를 떠올릴 때 등장했던 '빛'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는 온종일 당신을 그리워한다. 그리움은 마치 하늘처럼, 빛처럼 나를 맴돈다. 당신은 내 가슴속에 자리한 하늘이자 빛이다. 헬레네, 나는 이처럼 당신을 그리워한다. ( p136 )
햇살이 눈부셨다. 빛이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외면의 빛과 내면의 빛을 말하며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면의 빛이라고 했다. ( p119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스치는 갖가지 생각 조각들은 떨쳐 버려야만 했다. 근심과 걱정거리, 심지어는 즐겁고 기쁜 생각들조차 내 머리속에 깃들자마자 조각조작 부수어 떨쳐 버려야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내면은 고요해질 수 있었다. 고요함이 나의 내면에 자리를 잡고 내게 신의 자비가 내리면 나는 빛 속에 들어설 수 있다. 그 빛은 뜨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기품 있고 우아하게 반짝이는 빛, 묵직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가벼운 빛,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빛, 나는 그러한 빛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빛은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빛을 느낄수 없다면 내게 무슨 일이 생기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빛을 느낄 수 없다면 신의 자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의미지만, 가끔은 빛을 느낄 수 없어도 우리는 신의 자비 속에 있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p121)
두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빛'은 그 의미가 더욱 구체화된다. '혼란 속에서 주인공에게 상징적인 현실, 덧없음과 가닿을 수 없는 신성을 의미( 역자의 말 중에서, p518 )' 하고, 더 나아가 '탈출구'로까지 의미를 확장한다.
나는 마음을 비우고 차분해져야 한다. 그러면 저 멀리 있는 환한 빛이 내 속에서도 반짝일 수 있을 것이다. 전적으로 마음을 비우고 차분해지면 내 안에서도 빛이 생겨날 것이다. 나는 모든 일에 고군분투할 필요 없다. 나는 차분해져야 한다. 나는 내면에서 반짝이는 빛이 되어야 한다. 나는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 빛이 되어야 한다. <중략> 내 가슴속을 휘젓는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한데 모여 가느다란 직선으로 변하고 그 직선이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나의 내면은 텅 비어 하얗게 변할 것이고, 나는 차분해질 것이다. 나는 머릿속에 있는 생각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비울 것이다. <중략> 세상일과 갖가지 의미들을 지우고 내면에서 반짝이는 빛, 구름 사이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빛, 내 눈에 보이는 빛과 함께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아무도 그릴 수 없는 훌륭한 그림을. 나는 내면에 빛을 간직한 채 아버지 곁에 앉아 있을 것이다.
p258
2부는 1부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뒤 치매를 앓고 있는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누이 올리네의 이야기로 옮겨진다. 올리네가 점점 흐릿해지는 기억을 더듬으며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흔적을 더듬어가게 되는데 3인칭으로 서술되는 형식이다. 1부의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실존 인물이라면 2부의 올리네는 작가가 창조한 허구의 인물이다. 합본으로 읽게 되니 독자들은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오가며 실제 역사와 소설적 상상력을 버무린 매력을 더욱 느끼게 된다. 소설 『멜랑콜리아』는 욘 포세의 작품 중에서는 독특한 위상을 지녔다고 소개되어 있다. 예사로운 일상 속 삶이라는 부조리를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평범한 인물을 주로 그리던 작가가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죽은 후에야 인정을 받은 노르웨이의 비운의 풍경화가인 라스 헤르테르비그(1830~1902)는 오늘날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풍경화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욘 포세가 한 인터뷰에서 "헤르테르비그의 그림에서 보았던 어떤 것을 꺼내고자 했다" 라고 밝혔던 것처럼, 그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작품에서 찾아낸 것은 인간이 가진 본원적인 우울(혹은 불안)과 광기, 빛에 대한 희구였던 것일까.
(왼)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해안 풍경'(1855) @구글아트프로젝트 ,
(오) 닐스 비욘슨 묄러가 그린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초상화. @노르웨이 국립박물관 홈페이지
올리네는 이미 가족 대부분을 떠나보내고 죽음을 바라보는 노인이다. 사라져가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남동생 라스의 모습, 음성 등 모든 흔적을 뒤쫓는다. 기억을 잊을 때마다 좌절하며 파편처럼 부서지는 올리네의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두 남매의 고통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면서, 불안과 혼돈을 겪는 인물의 내면에 보다 깊숙하게 들어가게 된다.
욘 포세는 본질적으로 형태와 내용이 서로 얽혀 있다고, 즉 내용도 본질적으로 양식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작가다. 소설 『멜랑콜리아』 에서도 반복적이고 간결한 문장, 의식의 흐름 기법 등 독특한 형식이 내용과 밀착돼 독자를 끌어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