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인명사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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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제목인 Robert des noms propres는 프랑스의 로베르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사전의 한 종류이다. 사실 이 사전은 인물 뿐만이 아니라 문화, 역사, 지리, 예술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고유명사들에 대한 사전인데, 아무래도 이 소설속에서는 특별한 '이름'을 갖게된 한 여자의 운명이 부각되었기 때문에 '로베르 인명사전'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 같다.

이 소설 속에는 로베르 인명사전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름들이 많이 등장한다. 주인공들의 이름들이나, 장차 아기에게 붙여질 이름들은 이름이 가지는 예외성에 주목하게 한다. 탕기Tanguy, 조엘Joëlle, 클레망스Clémence, 다비드David 같은 고전적인 이름들이나, 플렉트뤼드Plectrude, 엘뢰테르Eleuthère, 뤼트가르드Lutegarde, 아르시노에Arsinoé 같은 고딕풍 이름들이 그것이다.
장차 예외적인 존재가 될 한 아기의 엄마는 탕기나 조엘 같은 평범한 이름을 거부하고, '거친 운명을 예고하는 몽환적인 이름들' 가운데 하나인 플렉트뤼드라는 이름을 아이에게 지어준다. 엄마의 바램 혹은 예견대로 아기는 그 이름을 통해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를 예외적인 존재로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된다. 이름이 그녀에게 부여한 특별한 운명 때문에 어쩌면 그 특별한 삶에서 실패를 겪게된 플렉트뤼드는 발레리나가 아닌 성악가로 살아가기로 용기를 내고, '자신이 겪은 백과사전적 범주의 고통과 어울리고 사전의 이름이기도 한 "로베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이름이 바뀌면서 또 한번 그녀의 운명도 바뀌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다고 해야할 것이다. 아멜리는 로베르로 개명한 그녀에게 살의를 부추기며 이번엔 그녀의 운명을 살인자로 결정한다.

이름은 정말로 '특별한 운명을 약속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플렉트뤼드라는 이름을 얻기 전부터 그녀의 운명이 기구했던 것처럼 우연적 결합의 소산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억할 때 이름을 통해 그 사람을 총체적으로 떠올린다. 아무리 얼굴이나 습관이 기억나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면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다. 이름은 얼굴만큼이나 한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김춘수 시인이 '꽃'에서 말한 것처럼 이름은 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 완벽한 한 존재가 될 수 있게끔 한다. 굳이 로베르 인명사전이라는 제목과 이 책들에 나타난 수많은 이름들과의 관계를 나름대로 해명해 보자면 이렇다. 로베르 사전에 기록된 이름들이 물론 인류 전체로 봤을 때는 숭고한 업적 혹은 그 반대의 이유 때문에 사전에까지 기록되었겠지만, 그 화려한 혹은 악명 높은 업적의 이면에 간과된 개개인의 운명이 존재함을 돌아보고자함은 아니었을까.

아멜리 노통브의 책은 읽고나면 언제나 약간의 허탈감이 남는다. 그것을 낯설음이라 해야할지 어리둥절함이라 해야할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라 해야할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의 독서로는 어쩐지 그녀의 의도가 명쾌하게 들어오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짧으면서도 충격적인 결말을 지닌 이 책은 뭔가 중간에 뚝 잘린 듯한 느낌을 주며, 좋게 말하면 독자에게 무한한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주고, 나쁘게 말하면 주인공의 운명을 '작가 살해'라는 파격적 결론으로 유예시킨 듯한 느낌을 준다.

또 여기에는 지독한 나르시시즘,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는 부모의 이기주의, 집착과 완벽주의 등 여러가지 정신병리학적 현상들이 보여진다. 공주 혹은 신으로 표현되는 여자 아이의 시선은 그것이 억압된 혹은 그러한 것들을 꿈꾼 작가 자신의 시선에 다름 아니다. 그녀의 이번 책은 특히나 더 아멜리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해부해보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어떻든 이제 아멜리 노통브는 죽었다. 그녀가 영영 다음 소설을 쓰지 않을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다만 다음 소설에서 그녀가 어떻게 부활할지 기대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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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개의 거짓말
라픽 샤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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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이제 트인 것인가 어쨌든 오늘 처음 매미 소리를 들었다.
무더위의 시작을 알리는 매미소리, 초복과 동시에 등장해서 더운 느낌을 50%는 증가시키는 소리다.

책상 위에 잠시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던 책을 보고 아빠는 '개의 거짓말', 동생은 '100개의 거짓말'이라고 보았대나. 어찌됐든 누구의 것인가 혹은 갯수가 중요한 것은 아닌, 이 책이 거짓말에 관한 것임은 밝혔으니 그닥 큰 문제는 없을 듯 하다.

내겐 좀 생소한 아랍 작가의 소설이다. 여행길에서 만난 아랍인들이 이렇게 풍성한 이야기 보따리를 지니고 있었던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말이라도 좀 걸어볼 걸 그랬다.

어쩐지 에코의 '바우돌리노'가 생각나기도 하고,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이 생각나기도 하며, 오스터의 '공중곡예사(혹은 미스터 버티고)'가 생각나기도 한다.

복잡하고 수많은 인척관계, 그들의 이야기를 서커스단의 동물들과 접목시켜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사딕,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지만 그 이면엔 뼈를 깎는 고통과 연습을 견뎌야 하는 단원들. 사딕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게 되지만, 웃음 뒤에 숨어있는 그들의 사연 하나하나는 이 책의 모든 등장인물을 삐에로로 만들어준다.
중학교 때 한 친구가 삐에로의 이중성에 대해 제법 어른 스런 얘기를 해 준게 기억난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고 있지만 슬픔이 승화되지 않은 광대짓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웃음을 줄 수 없다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삐에로를 보는 일이 그렇게 자주 있진 않았지만, 그때부터 어쩐지 삐에로는 내게 늘 슬퍼보이기만 하는 존재다.
삐에로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슬픔을 숨기고 웃음을 내어보이는 것처럼, 사딕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가 반드시 전부 사실이 아닌 것처럼 세상엔 좋은 거짓말도 있다. 


'아라비아 사막에서의 삶은 늘 험난했다. 거짓말을 안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이라도 해야 그나마 그 거친 황무지에서 웃고 꿈꿀 수 있었다.'

-p.434

이제 사딕의 '거짓말'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의 거짓말은 웃고 꿈꾸게 하는 거짓말이다. 현실의 냉철함만으로는 견뎌낼 수 없는 메마른 삶에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거짓말이다. 사딕의 이야기가 재밌긴 한데  왠지 마음놓고 웃을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진실보다 더 진실다운 아이러니한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최근 읽은 책 중에 가장 다각적인 느낌을 주는 책인 것 같다. 웃는 동시에 울게 만들며, 교훈을 주는 동시에 재미를 주는. 이 책을 선물해준 친구만큼이나 지혜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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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해피엔딩
황경신 지음, 허정은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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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나갔다 이 책이 사고 싶어 직원에게 물었다.
이 책을 얼마나 빨리 갖고 싶었는지, 책을 찾는 데 들이는 시간조차 아까웠기 때문이다.
사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이 제목도 잘 기억 못하다니.
'모두가 해피엔딩'이요.

검색창에 뜨지 않는다.
'그럼, 황경신으로 검색해봐주세요.'

'모두에게 해피엔딩이네요 ^^;;'

'손님, 이 책 지금 매장에 없거든요.'

제기랄. 뭐 이래. 왜 찾는 책마다 없어. 여기 대형서점 아냐?
유명해서 다 팔린거야, 아님 안 유명해서 안 갖다 논거야.

결국은 인터넷으로 주문하여, 휴일이 낀 덕분에 좀 더 오래 기다려야 받아볼 수 있었다.

p.92
"일어날까?"
비의 입에서 일어나자, 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내가 먼저 이야기한다.
"그럴까?"
비의 대답에, 나는 금세 내가 뱉은 말에 대해 후회한다. 가방을 챙기는데, "조금 더 있자." 비가 다시 말한다.
내 기분은 순식간에 바뀐다. 비의 말 한마디에 슬퍼하고 기뻐하는 나 자신이 참 가엾다,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92페이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내가 왜 이런 연애소설을 돈주고 사지 않는지, 그래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다 똑같거든, 이런 얘기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연애소설 읽기가 싫었던 건 어쩜 유치하단 생각 때문일지도, 어쩜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상처를 도려내는 그 느낌이 끔찍하게 싫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이의 서평을 읽고 덥썩 사버린 이 책은 나에겐 그녀만큼의 감동을 주진 못했다. 어떤 책이든 읽는 이로부터 반쯤은 보편적 공감을 얻어내고, 그 이후에는 경험과 더불어 마이너스 플러스의 공감을 획득한다. 그런데 난 사랑에 대해 아직도 부정하고 있는 중이어서, 이 소설을 다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길 그토록 기다렸지만, 어쩐지 아직 읽어선 안됐었어,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좀 더 성숙해졌을 때 좀 더 담담해졌을 때 읽었어야 하는건데...

코엘료의 사랑 이야기가 무겁고 빽빽한 느낌의 유화 같다면, 황경신의 사랑 이야기는 여백이 많은 수묵 담채화 같다. 여백이 너무 많아 텅 비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조차 드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이 소설의 여백이 아니라 내 마음의 여백이다. '여백'은 보통 좋은 의미, 그러니까 비어있어도 외로워보이지 않는 공간이다. 하지만 지금 이 느낌은 분명 외로운 공간이다. 그 공간 속에서 '다시'라는 말을 기대하는 것도, 비어있음을 채워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지라 더 허한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다 사랑에 있어 '아픈' 부분을 한 조각 씩 지니고 있는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뻔한 결말이네 하면서도 해피엔드인 드라마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같다. 그렇게라도 벌어져 있는 상처를 대체치료하기 위해서.

그런데 정말 그랬다, 한 숨 자고 일어났더니 지루하게만 느껴질 것 같던 그 감정이, 욱신욱신 쑤시게만 만들것 같던 그 마음이 오히려 가벼워지고, 더 먼 과거 속으로 후퇴해버린 것 같아 편했다.
애틋한 미련도 아닌, 그렇다고 사랑은 더욱더 아닌 오히려 미움에 가까운 이 마음이 조금은 둥글게 변한 느낌이 들었다.

과연 모두에게 해피엔딩일 수 있는 묘안이 있을까.
그건 철저하게 과거를 부정하고 내 기억 속에 그런 일은 없었던 듯 사는 거다. 하지만 그건 그런 '듯' 사는 것 뿐이지, 정말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 책을 읽고나니 전혀 해결책이 보이지 않던 미래에 묘안이 어딘가 숨어있을 것 같은 희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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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클럽 2
매튜 펄 지음, 이미정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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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클럽은 19세기 미국사회에 단테의 '신곡'을 들여오려던 문인들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하버드 기득권층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추리 소설이다.
CSI 과학수사대의 정밀 장비들 덕을 보려면 한 150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했으니, '신곡'의 지옥편에 등장하는 형벌을 모방한 살인사건을 해결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롱펠로를 위시한 당대 내로라하는 문인들은 단테 탄생 60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에도 단테의 위대성을 소개하려는 책임감을 가지고 번역을 지속하려 하지만, 끔찍한 연쇄 살인사건이 지옥의 형벌 모티브를 악용한 사실을 알아내고 그때부터 과학수사대 에이전트 못지 않게 몸을 던지는 비밀 수사에 착수한다.
사실 미국 문학사에는 문외한인데다 19세기 시인들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던지라, 초반부에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삼 단짜리 이름들 때문에 통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1권 중반부에서 단테클럽 멤버들이 수사요원으로 탈바꿈하면서 소설은 생기를 얻어 나또한 그 속도에 편승하여 달리듯 읽어나갔다.

성서의 일곱가지 죄악을 다룬 '세븐'과 유사한 모티브를 사용한 이 소설은, 북의 승리로 끝났지만 여전히 노골적 인종차별과 노예제가 존재하던 남북전쟁 직후의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신곡을 읽지 않아서 작품 속에 녹아있는 메세지를 충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19세기 미국 사회에서 단테의 의미론을 조금은 짐작하게 해 주었다. 비슷한 소재를 다뤘지만 '세븐'처럼 우울한 분위기는 없고, 오히려 시인들의 다양한 성격과 감수성이 녹아있어 다른 추리소설과는 좀 다른 느낌을 풍긴다. 신곡을 더불어 읽는다면 금상첨화인, 다음에 하려는 쓴소리를 제외하면 손색없는 작품이다.

1권에서는 문학사적 지식이 딸려 속도가 더뎠건만, 2권에 등장하는 그 수많은 오타들이란 뭐란 말인가. 게다가 맞춤법 틀린 건 고사하고, 이탈리아어인지 불어인지 정확히 알아보지도 않고 한국말 음역을 해 놓은 부분에서는 기분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초판 1쇄라도 그렇지 이건 번역자 자신도, 편집부도 교정 한 번 봐주지 않은 내놓은 자식같았다.
'이따위로 책을 만듭니까'라고 황금가지에 버럭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냥 점잖게 세 군데 틀린 부분을 지적해주고, 돌려돌려 책 잘 만들으라 쓰고 나왔다.

이틀 뒤 시정하겠다는 답변을 받고서, 다른 자유게시판에 가보니 어떤 독자가 거의 항의 수준으로 글을 올려놨더라. 그렇게 항의한 효과가 있었는지 그 독자는 수정본을 보내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단다. 역시 목소리 크고 도전적인 사람이 이기는 게 한국사횐가보다.
그 독자는 번역 미숙으로 인한 문맥파악 불가를 주장했지만 사실, 난 이해불가할 정도로 이상한 문맥은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렇게 오타가 많았다면 꽤나 서둘러 번역을 했을텐데, 그런 것에 비하면 번역 자체의 질은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지 내가 기분이 나빴던 건 번역자의 그리고 출판사의 성실성 문제이다. 원저자 매튜 펄이 한국내에서 자신의 책에 대한 이러한 상황을 알면 기분이 어떨까 상상을 해본다.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이 소설이 얼마나 많은 연구와,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조언을 통해 공들인 소설인지를 밝히고 있다. 번역자의 사정, 출판사의 사정이라는 것 - amazon.com의 베스트셀러니 발빠르게 움직여야 시장성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외국어로 된 재밌는 책은 빨리 읽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기대감에 대한 부응. 뭐 이런 뒷사정이 있었겠지 싶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누군가의 고백성 발언이 절실히 떠오르는 한편, 책이나마 경제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번역본이라도 오랜 세월 소장가치가 있는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오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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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7-15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번역의 미비함을 모르는 무식장이라 잘 몰랐는데 꽤 항의하시더라구요. 전 그러려니 해요. 알아야 항의도 하는데 알 수가 있어야죠. 그저 출판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 합니다...
 
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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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선물로 받은 문화상품권을 가지고 무슨 책을 살까 들뜬 마음에 책들이 잔뜩 쌓인 서가를 한참 헤매고 다녔다.
코엘료의 책은 약간의 환각성분이 있어서 책을 펼치기 전 늘 경계하게 된다.

'전혀 살 생각은 없어, 그냥 보기만 하는거야.'

다짐을 하고 첫장을 펼쳤다. 물론 책 날개에는 키퍼 서덜랜드를 닮은 그의 뜬금없는 눈빛이 독자를 부른다. 그리고 다음 두 장엔 11분이라는 책 제목이 있다. 그런데 그 다음장과 그 다음장이 문제였다.

『죄없이 잉태하신 동정녀 마리아여,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아멘.』

최근 마리아에 대한 사랑에 흠뻑 빠져있는 한 친구가 떠올랐다.


『...나는 기적의 샘물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의 루르드에 갔다.』

그리고 그 다음장엔 그 친구가 최근 다녀온 루르드에 작가가 갔었던 일화가 담겨있었다.

어떤 내용인가 짐작케 해주는 소개글을 읽기는 커녕, 이 책의 퉁명스런 제목 '11분'이 도대체 무엇에 소요되는 시간인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조차 해보지 않은 채 두 줄의 짤막한 기도문과 루르드라는 지명 때문에 '덥썩' 책을 사버리곤, 짧은 순간 오르가슴을 맛보게 해 준 섹스처럼 단숨에 읽어버렸다.


코엘료 소설엔 그의 소설을 몇 권쯤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아주 단순한 도식이 있다.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한 인간(대개는 여자)이 있고, 과거에는 그 존재와 하나였다가 어떤 연유로 분리되었을 법한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그 두 존재가 서로를 찾고, 북돋워주어 결합하는 방식은 물론 '사랑'이다. 사랑에 대해 신적인 전능함을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존재는 아직 발견 중에 있는 존재를 도와 그 도정을 단락짓고, 그와 동시에 그 존재는 정체성을 완벽하게 확립한다.

그런데 소설속의 그 두 존재는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너무나 완벽하게 서로의 영혼을 알고, 이 책에서는 이제 서로의 육체까지 완벽히 알게 된다. 물론 사랑하는 대상과, 자신과 또 사랑 그 자체로부터 궁극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 속에서 무소유의 사랑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코엘료는 나처럼 메마르고 '현실' 운운하는 소심한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이런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이래도 되는 거야, 그걸 자유라 생각해도 되는 거야, 정말?'
읽는 내내 여전히 이런 소심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솔직히 마리아가 살짝 부러웠던 것을 고백해야겠다. 부러움의 대상은 그녀의 풍부함이 아니라 '용기와 솔직함'이다.

엄마에게 이 책을 보여준다면, 엄만 나보다 마리아를 받아들이는데 더 많은 시간이 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전히 매춘과 성은 범죄라는 어두운 측면과 연결되어 있으니 말이다. 마리아는 '초심자의 운으로' 코파카바나에서 돈도 벌고 사랑도 찾지만, 뭇여성들이 매춘굴(?)을 이상실현의 장소로 삼기엔 너무나 많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슬픈 현실이 여전히 존재한다.

최근의 다빈치 코드에서 힌트를 얻어, 다빈치, 빅토르 위고 등과 함께 파울료 코엘료를 Priory of Zion의 반열에 올려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시스 찬가와 오르가슴의 순간에 신을 만난다는 밀교의식과의 유사성도 그러하고, 여성 자신도 모를 많은 비밀들을 술술 풀어내는 해박함에 있어서도 여성 숭배사상이 엿보인다.
한편 책마다 빠지지 않는 복음서의 인용과 마리아의 등장이 그의 종교적 입장을 반영해 주면서도 왠지 뉴에이지의 냄새가 나는 건 또 무슨 반항심인지.
 
헐리우드 냄새가 짙게 풍기는 결말에선 그러길 바라지 않았으면서도, 어느 책에서도 어느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가막힌 결말을 선사해주길 바랬으면서도 행복했다. 코엘료는 사람들의 이런 모순적 기대감을 간파하고, 어떻게 하든 욕을 먹는다면 차라리 해피엔드를 택하자 했을 것이다.

내게 진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감당하기 힘들었을 여러 사건을 경험하게 해 주는 작가들에게 감사하며, 관음증 = 남의 삶 엿보기 = 독서라는 등식에 너무 빠져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마리아와 랄프에게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감동적인 한 장면을 인용하며 마칠까 한다.

"날 축복해주오."
그가 말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를 축복해주었다.
나는 내게도 축복을 내려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그가 말했다.
"내가 많이 사랑한 이 여자에게 축복을."
그의 말은 아름다웠다.

Paulo Coelho, Onze minutes,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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