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물을 대립하는 2가지 규정의 통일로서 파악하는 방법. 예컨대 <사랑은 충족과 결핍의 통일이다> 등이다. 동일물(同一物)이 대립한 규정을 갖는 것은 속담이나 전승문학(傳承文學)에 어떠한 것에든 일면적(一面的)인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훈계로서 이야기되고 있다. 여기에서 회의주의자(懷疑主義者)는 어떠한 일에도 일의적(一義的)인 규정을 부여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결론을 도출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쓰다. 그러나 하나의 행위가 한쪽 면에서는 선이고, 다른 한쪽면에서는 악이 된다면 행위를 하는 사람은 비극에 빠진다. 집안의 법도를 지켜서 오빠를 매장한 안티고네의 행위는 반역자의 매장을 금하는 국법에 비추어 보면 죄이다. 비극만이 아니다. 희극 예컨대, 《피가로의 결혼》에서도 자기 아내를 하녀로 잘못 알고 유혹하는 백작과 같이 동일물이 대립하는 규정을 가진다.

변증법의 원형은 속담·회의(懷疑)·비극·희극 등에서 볼 수 있다. 그 대립의 통일·모순을 실제와 필연으로 볼 것인가, 우연과 가상으로 볼 것인가. 운동의 존재를 주장하는 일에 내포되는 <아킬레스와 거북>과 같은 모순을 지적하여 운동·변화·다양의 존재를 부인한 제논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변증법의 아버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제논의 논리를 인정하고 또한 운동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운동이 모순의 실재를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은 같은 강에 2번 들어갈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우주는 끊임없이 타서 스러져가는 불과 같은 것이다. 정지하여 존속하고 있는 물체도 실제로는 2개의 대립하는 힘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불안정한 상태이다. 근대에 와서도 G.W.F. 헤겔은 존재를 끊임없이 신진대사에 의하여 자기를 외계로 분해시키면서, 동시에 자기를 재생산함으로써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대립하는 힘의 균형이라고 하는 본질이, 정지한 존속이라고 하는 현상을 지탱하고 있다.

변증법의 어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의 디알렉티케(dialektike)란, 문답법이라는 뜻이다. 플라톤의 저술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비판에 응답하면서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부정(否定)을 통하여 정신이 진리에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변증법이다. 부정을 통하여 고양하는 정신은 동일한 정신이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뿐만 아니라 발전·성장·변화하는 것에는 <달라져 가면서 동일(同一)을 유지한다>고 하는 <대립의 통일>이 내포되어 있다. 발전·변화의 한계점에서는 다른 것이 같은 것이다. 이 한계의 모순성이 수학에서는 미분으로 표현되는 극한점에서 성립한다. 그래프 위의 접점으로 표시되는 극한점에서는 곡선이 직선과 같다. 미분의 변증법적인 해석에는 <점의 본질적인 규정으로서 인접점과의 관계가 포함된다>고 하는 원리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원리를 확장하면, <어떤 것의 본성에는 다른 것과는 다르다고 하는 등의 관계가 내재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관계는 실체와 마찬가지로 실재한다>고 하여도 같은 말이다. 여기에서 다시 <내적인 본질이란 다양한 관계의 집약이다>라고 하는 규정을 도출하면, 문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과의 관계라고 하는 구조로 투영된다. 헤겔은 동일한 구조를 마음의 내성(內省) 속에서도 발견한다. 마음이 그 마음을 의식할 때 의식하는 마음과 의식되는 마음은 동일하면서 또한 동일하지 않다. 주관으로서의 마음과 객관으로서의 마음이 동일하기 때문에 외부의 매개를 거치지 않은 직접적인 지각이 성립된다. 예컨대 산을 보고 있는 나는 자기가 <산을 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본다>고 하는 의식활동을 의식하는 반성의식은 보는 의식과 동시에 작용하는 동일한 의식이다. 그러나 아는 주체와 알려지는 객체라고 하는 작용면에서의 구별이 있다. 따라서 내성·반성 속에는 <구별 없는 구별>이라고 하는 대립자의 동일이 포함된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본질과 현상, 하나의 이데아와 많은 개체,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 주관과 객관은 내성·<자기의식>이라는 구조를 매개로 하여 통일된다. 헤겔은 신플라톤파가 주장하는 <이데아의 유출>이나, 그리스도교적인 <성육신(成肉身)>이라는 개념을 이것을 통하여 합리화한다. 그 결과로 생겨나는 <사물에 대한 파악>, 즉 개념은 본질이라고 하는 보편, <이것>이라고 하는 개별 본질이 개별화되어 있다고 하는 매개관계 그 자체(특수)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사물이란 추론(보편·특수·개별의 종합)이다>가 된다. 헤겔은 <3요소의 일체>라고 하는 신플라톤파의 관념을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에 중합시켜 근대범신론의 토대 위에 재정립하였다. 종래 헤겔의 변증법은 정립(테제)·반정립(안티테제)·종합(진테제)의 3단계(줄여서 正·反·合)로 구성되는 논리라고 설명되어 왔으나 이 어법은 헤겔의 텍스트 속에는 없다. J.G. 피히테의 용어를 빌려서 헤겔변증법을 설명한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수(數)의 연속체에서 한계의 변증법, 등질성의 변증법과 안과 밖의 변증법, 비등질성의 변증법이 종합되어 있지만, S.A. 키에르케고르의 <질적 변증법>에서는 비등질성 속에 역설적인 것이 도입된다. 예컨대 <예수와 자기와의 2000년을 사이에 둔 동시성(同時性)>이라는 개념이 있다. K. 바르트의 <변증법신학>에는 신인(神人)의 절대적인 단절 속에서 존재의 동일이라고 하는 사상이 있다. 키에르케고르·바르트의 사상은 연속성·등질성을 거부한 단절에서 역설적인 매개가 변증법의 개념을 형성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인식 이전의 물질의 구조가 정신에 반영되어 변증법의 구조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자기의식의 내성구조의 변증법성을 부인하고, <관계의 실재성>이라는 존재론적인 규정으로서 변증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 문답법 → 헤겔 → 테제 → 정·반·합 → 변증법적 유물론

*출처 : 엥빠스 앙씨끌로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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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 W. F. Hegel, 1770 ~ 1831

독일 철학자. 뷔르템베르크주 슈투트가르트 출생. 신플라톤학파의 철학과 르네상스 이래의 근대사상을 독자적 관점에서 논리학·자연철학·정신철학의 3부로 체계화하였다.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大成者)로 알려졌으나 독일 관념론을 창시한 J.G. 피히테에 관한 계통적인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헤겔을 피히테의 계승자로 규정하기가 어려워졌다.

경건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자라나 1788년 튀빙겐대학에서 철학·신학을 공부하고 J.C.F. 횔덜린 및 F.W. 셸링 등과 사귀었다. 처음에는 베른·프랑크푸르트 등에서 가정교사를 하며 독자적인 인생철학에 바탕을 두고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1801년 예나대학의 사강사(私講師), 1805년 원외(員外)교수가 되었고 이때 셸링의 사상에 동조하여 그와 공동으로 <철학비판잡지>를 출판하였다. 그러나 점차 셸링의 입장을 벗어났으며 예나대학이 나폴레옹군에 점령된 상황 아래에서 1807년 최초의 저서 《정신현상학》을 내놓아 독자적인 입장을 굳혔다. 예나를 떠나 밤베르크에서 신문편집자로 있다가 1808∼16년 뉘른베르크 김나지움의 교장이 되었다. 1812년 두번째 주저 《논리학》을 출판하였고 16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이듬해 《철학체계》를 간행함으로써 그의 사상체계의 개략을 완성하였다. 18년 피히테의 뒤를 이어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마지막 주저 《법철학강요》를 간행하였다. 그의 저작 중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역사철학》 《종교철학》 《미학》 등은 죽은 뒤 제자들이 편찬한 강의록이다.

헤겔사상을 요약하면 변증법과 이성주의이다. 세계를 현실과 이성의 일치라고 본 그는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인 변증법에 의하여 전개되는 세계를 이성적으로 추구하였다. 독일관념론 테두리 안에서 변증법을 완결시킨 그의 영향은 세계로 번져 헤겔학파를 이룩하였으나 P.J.A. 포이어바흐로부터 시작되는 헤겔좌파에 의하여 논리가 정반대인 유물변증법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또 그의 존재론은 원자론(atomism)과 개체적인 요소로의 환원주의를 비판, 생명적 존재의 일원론을 주장함으로써 현대 전체론(全體論 ; holism)의 효시를 이룬다. 헤겔철학은 형이상학적 관념론으로 많은 비판·반발을 받았지만, 역사적 의의는 18세기 I. 칸트로 대표되는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중점을 두어 19세기 후반 이후 국가주의·역사주의의 길을 열었다는 데 있다. 그는 현실이란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 과정은 오히려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이 아무리 이상을 실현하려고 애써도 역사의 법칙적 흐름에 부합되지 않는 한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역사를 지배하고 있는 법칙에 대해 관념론적·형이상학적 견해를 가졌으며 역사는 절대자나 신(神)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라 판단하였다. 그에 의하면 절대자는 이성(理性)이고 그 본질은 자유이다. 따라서 역사는 자유가 그 속에서 전개하여 나가는 과정이며 전제군주만이 자유를 누렸던 고대로부터 소수의 사람이 자유를 누리던 시대를 거쳐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시대로 옮아간다. 그리하여 현대를 바로 이 마지막 단계가 실현되어야 할 시대로 보았다. 헤겔은 이러한 근본사상을 바탕으로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의 3부로 된 철학체계를 수립하였고 이 전체계를 일관하는 방법이 모든 사물의 전개를 정(正)·반(反)·합(合)의 3단계로 나누는 변증법이다.

*출처 : 엥빠쓰 앙씨끌로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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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목 올빼미과의 새 중에서 외이(外耳)처럼 보이는 깃뿔을 가진 종(種)의 총칭. 특히 큰소쩍새를 가리킬 때가 많다. 일반적으로는 깃뿔이 있는 것을 부엉이
라고 하며, 없는 것을 올빼미라고 하여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별이 분류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솔부엉이같이 깃뿔이 없는 것에 부엉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있고, 반대로 깃뿔이 있는 것에 올빼미라는 이름을 붙인 줄무늬부엉이와 같은 예도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부엉이로는 수리부엉이를 들 수 있는데, 특산품종으로 한국 전역에서 번식하는 텃새이다. 평지에서 고산에 이르는 암벽·바위산·하천을 낀 절벽 등지에 살며, 이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한배에 2∼3개의 알을 낳는다. 야행성 조류로 밤에 활동하며, 낮에는 물체를 잘 보지 못한다.

*출처 : 엥빠스 앙씨끌로뻬디
*사진 설명 : 삼청동 소재 부엉이 박물관 까략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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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
김석철 지음 / 창비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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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안쪽에 1998년이라 적혀있는 걸 보고서 대학교 졸업하던 해 교양수업 때 이 책을 읽고 감상문을 써낸 기억이 났다. 그때만 해도 책을 많이 안 읽어서 책을 사는 일이 계기나 목적을 필요로 했었지. 보통 그런 '필요'에 의해 내게로 온 책들은 먼지가 소복히 쌓이게 마련인데, 이 책은 그런 점에선 예외이다. 건축이란 결국 인간을 위한 공간이므로 건축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려는 이 책의 따뜻한 의도를 간파한다면 더욱더 그러하다.

*일본인들은 우리와 다르다(p.101)*

기억을 더듬어 보건데 감상문을 써낼 당시엔 일본의 '이세 신궁'에 대해 중점적으로 썼던 것 같다. 사업상 일본 출장이 잦으셨던 아빠가 사오신 기념 엽서 속의 일본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을까. 본문 중의 '일본인들은 우리와 다르다'라는 문구가  유난히 마음에 와 닿았었다. 그리고 얼마전 여행에서 만난 일본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아, 정말 다르구나'를 또 한번 느꼈다. 물론 중국인들도 우리와 다르고 서양 제국들의 사람들도 우리와 다르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다름'이 더욱더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떤 감정적 이질감 때문일 수도 있고, 매우 비슷할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조금만 속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일본과의 특수한 괴리감 때문일 수도 있다. 일본 건축에는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 대한 느낌이 건축에도 고스란히 베어 있다. 가꿔지고 다듬어진 미, 숨막힐 듯한 정교함 같은 것 말이다.

*베네치아의 싼 마르꼬 광장(p.187)*

그리고 최근 여행 때문에 다시 들추게 된 이 책에서 베네치아에 대한 상세한 역사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가보기 전에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물 위의 도시'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도 역시 믿을 수 없는 베네치아. 그 중에서도 싼 마르꼬 '광장'에 대한 다음의 인용구는 최근 시청 앞에 조성된 '광장'의 의미를 냉정하게 되새기게 해 준다.

-광장의 형태와 내용은 한 사람의 천재가 아닌 역사와 시간의 산물이다(p.189).

'광장 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유럽의 문화를 직접 보고 나서,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절실히 필요한 한국의 현실을 안타까워 했었는데, 여행 후 시청 앞 광장이 완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기뻐했었다. 그렇지만 역사와 시간이 부재한, 한 사람의 천재에 의해 급조된 광장은 그 곳이 '광장이 아니었던' 시절에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어준 일체감보다는 '불편함'과 혼란스러움을 안겨주었다는 일견을 듣고 약간의 씁슬함이 느껴졌다.

속성으로 건축을 하는 인간들과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픽픽 쓰러지는 건축물들, 그 직접적인 피해가 부메랑처럼 스스로에게 돌아오는데도 반성하지 못하는 우리들. 길게는 수천년에서 짧게는 몇백년을 거뜬히 버텨내는 이 책 속의 건축물들은 바로 그런 우리에게 역사와 시간의 힘, 생명과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 건축의 힘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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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들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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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불운이란 없으며 오직 백인이 있을 뿐이라고." (p.183)

이 책에서 백인의 잔혹함을 논하는 것은 또다른 인종차별주의를 낳는 것에 다름아니란 생각으로, 그 잔혹함에 대해 얘기하려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토니 모리슨도 어쩐지 그 잔혹함을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저 멀리에 그렇지만 매우 짙게 그  거대한 괴물의 그림자를 깔고 있는 듯 하다.

말하고 싶은 것은 백인대 흑인이 아니라 인간대 인간의 문제이다. 왜 한쪽에는 억압하는 인간군이 있으며 왜 다른 한쪽에는 핍박받는 인간군이 존재하는걸까? 정말 서글픈 일이다. 하물며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에게서도 동정심을 혹은 불쌍함을 느끼는 법인데 어찌 똑같이 먹고,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를 단지 피부색 하나로 부정하게 되었는가.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요소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보다는 '하등'하다고 단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차별'이라는 꼬리말이 붙은 단어들이 실은 다 그런 오해를 업고 태어난게 아닌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건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이건 분명 계몽의 세기, 과학의 세기라 불리던 18-19세기에, 아니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오는 현실이다. 인간이 도구가 되고, 무엇의 대상이 되는 전쟁의 상황. 분명 신은 우리 하나하나를 위하여 피를 흘렸다고 했는데 이러한 차별이 현실이라면, 그 대상은 '모두'가 아니라 '선택받은 누군가'일 뿐이다.

그 삶, 그 생명력이 대체 무엇이길래 발이 형채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도, 또 지독한 외로움을 견뎌야 할 때도 살아남게 하는 걸까. 내가 시이드였다면 내가 폴디였다면 난 도저히 '삶'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 지긋지긋한 것을 어서 빨리 끝내버리고 싶었을 거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허용되지 않는 삶에서 사랑과 추억이 대관절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다.

물론 번역이라는 거름종이를 통하긴 했지만 토니 모리슨의 문체와 묘사는 이렇게 절규하게 할 만큼 폭력적이고 한맺혀 있다. 외로움으로 똘똘 뭉친 덴버만해도 그렇다. 사실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내게 직접 외롭다고 말한들 그 느낌이 이렇게 사실적으로 느껴지진 않을테니 말이다.

어느 날 신문에 실린 신현림 시인의 짧은 글에서 토니 모리슨의 어느 책에서 인용했다는 몇구절을 보고 그게 혹시 "빌러비드"가 아닐까 하고 사게 된 것이 내가 이 책과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이다. 토니 모리슨이 주로 자신의 민족에 대한 얘기를 다룬다는 건 알았지만, 그 구절이 사랑에 대한 아포리즘이었고 이 책이 나에겐 그녀의 처녀작이어서 이렇게 큰 충격을 안겨줄 거라고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페스트"를 읽었을 때처럼 가끔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읽고 상상하는 게 더 끔찍하고 생생할 때가 있다. 더럽게 아프고 적나라한 고통의 느낌. 그 고통이 내 몫이 아니라 너무나도 다행스런 느낌. 내겐 그런 고통의 느낌이 아직 없다는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책. 그게 이 책이 내 머리를 감싸쥐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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