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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들녘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세상에 불운이란 없으며 오직 백인이 있을 뿐이라고." (p.183)
이 책에서 백인의 잔혹함을 논하는 것은 또다른 인종차별주의를 낳는 것에 다름아니란 생각으로, 그 잔혹함에 대해 얘기하려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토니 모리슨도 어쩐지 그 잔혹함을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저 멀리에 그렇지만 매우 짙게 그 거대한 괴물의 그림자를 깔고 있는 듯 하다.
말하고 싶은 것은 백인대 흑인이 아니라 인간대 인간의 문제이다. 왜 한쪽에는 억압하는 인간군이 있으며 왜 다른 한쪽에는 핍박받는 인간군이 존재하는걸까? 정말 서글픈 일이다. 하물며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에게서도 동정심을 혹은 불쌍함을 느끼는 법인데 어찌 똑같이 먹고,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를 단지 피부색 하나로 부정하게 되었는가.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요소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보다는 '하등'하다고 단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차별'이라는 꼬리말이 붙은 단어들이 실은 다 그런 오해를 업고 태어난게 아닌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건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이건 분명 계몽의 세기, 과학의 세기라 불리던 18-19세기에, 아니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오는 현실이다. 인간이 도구가 되고, 무엇의 대상이 되는 전쟁의 상황. 분명 신은 우리 하나하나를 위하여 피를 흘렸다고 했는데 이러한 차별이 현실이라면, 그 대상은 '모두'가 아니라 '선택받은 누군가'일 뿐이다.
그 삶, 그 생명력이 대체 무엇이길래 발이 형채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도, 또 지독한 외로움을 견뎌야 할 때도 살아남게 하는 걸까. 내가 시이드였다면 내가 폴디였다면 난 도저히 '삶'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 지긋지긋한 것을 어서 빨리 끝내버리고 싶었을 거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허용되지 않는 삶에서 사랑과 추억이 대관절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다.
물론 번역이라는 거름종이를 통하긴 했지만 토니 모리슨의 문체와 묘사는 이렇게 절규하게 할 만큼 폭력적이고 한맺혀 있다. 외로움으로 똘똘 뭉친 덴버만해도 그렇다. 사실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내게 직접 외롭다고 말한들 그 느낌이 이렇게 사실적으로 느껴지진 않을테니 말이다.
어느 날 신문에 실린 신현림 시인의 짧은 글에서 토니 모리슨의 어느 책에서 인용했다는 몇구절을 보고 그게 혹시 "빌러비드"가 아닐까 하고 사게 된 것이 내가 이 책과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이다. 토니 모리슨이 주로 자신의 민족에 대한 얘기를 다룬다는 건 알았지만, 그 구절이 사랑에 대한 아포리즘이었고 이 책이 나에겐 그녀의 처녀작이어서 이렇게 큰 충격을 안겨줄 거라고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페스트"를 읽었을 때처럼 가끔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읽고 상상하는 게 더 끔찍하고 생생할 때가 있다. 더럽게 아프고 적나라한 고통의 느낌. 그 고통이 내 몫이 아니라 너무나도 다행스런 느낌. 내겐 그런 고통의 느낌이 아직 없다는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책. 그게 이 책이 내 머리를 감싸쥐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