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초 편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야생초 편지 2
황대권 지음 / 도솔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참으로 어여쁘고 가슴 아린 책이다. 우선 어여쁘단 느낌은 선명한 총천연색의 야생초들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고, 두번째로 가슴 아리단 느낌은 이런 어여쁜 책이 옥중서한이라는 아이러니에서 비롯된다. 그런 느낌이 드는 건 그 삭막한 시멘트 네모 상자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각박하게 만들지 않으려 애쓰며 쓰여졌을 편지의 탄생에 대한 조금은 지나친 마음씀 때문일까.

할머니가 돌아가시 일년 전 초여름에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함께 갔던 바닷가. 그 갯벌 위편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고모댁. 고모댁 주변을 돌아 제법 높게 자라있던 명아주. 약간 정신을 놓으셨던 할머니는 성치 않은 걸음걸이로 명아주 뜯기에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보이셨다. 옛날엔 이걸로 나물 무쳐 먹으셨다면서...  어린 시절 더러운 개천가에 무성하게 피어있던 명아주를 본 기억과, 명아주는 개천가 같이 더러운 곳에서 잘 자란다는 잘못 심어진 지식 때문에 참 싫었더랬는데 할머닌 왜 저리 먹지도 못할 것을 그것도 이파리만 또옥똑 따시는 걸까. 할머니의 추억을 무시한 무정한 손녀딸 때문에 할머닌 결국 명아주 무침을 드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런 아쉬움 때문인지 이 책을 슬쩍 훑어보다 명아주 삽화를 발견하곤 그 페이지부터 읽어내려갔다. 이 책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겨버렸던 것들에 대한 작은 비밀들이 들어있다. 저자와 같은 경험으로 또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나도, 명아주가 노인들에게 튼튼한 발이 되어줄 만큼 크게 자라 지팡이로 쓰인다는 사실을 이 책을 보고서야 알았다. 할머니가 그렇게 맥없이 돌아가시기 전 이 책을 읽었더라면 고모댁에 심겨져 있던 명아주 한뿌리를 캐어 잘 키운 후 할머니께 지팡이를 만들어드릴 수도 있었을텐데...

그런 아쉬움과 추억의 버물림과 더불어, 봄이면 앞다투어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흔한 야생초가 달라보인다는 것이, 그래서 정원 손질 때 어김없이 퇴출당하는 잡초가 더욱더 생명력 있게 보인다는 것이 이 책의 힘인듯 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것이 조금 되어서 인지, 얼마전 참 미안하기도 하고 바보같기도 한 짓을 저질렀다. 그만 한데 오글오글 모여있는 민들레가 너무 예뻐서 잔인하게도 꽃대만 싹독싹독 잘라 컵에 이파리 몇개와 소북히 꽂아 놓았더랬다. 고추모 심고 화단에 물주고 저녁무렵 집안에 들어오니 땅의 정기를 받을 땐 고렇게 탐스럽고 예쁘던 노오란 꽃들이 모두 오그라들고 갈변해서 차마 볼 수가 없게 된것이다.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며칠을 더 두고 보며 감탄할 수 있었을텐데, 이거야 말로 정말 이기심의 극치랄 수밖에...  민들레란 녀석들이 땅에 고약한 뿌리를 박고 있을 땐 그리 약한 존재인지 몰랐는데, 꽃대를 자를 때 줄기가 약했던 걸 보며 의아했을 때 그만두었어야 했다. 그래서 집 앞 진입로에 만발할 마가렛도 피기만 해봐라, 한 단 굵게 모아 꽃병에 꽂아주마고 벼르고 있었는데 절대로그러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다. 그리고 내일은 책을 들고 나가 비인칭으로 불렸던 야생초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주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연주회가 시작되기 직전, 무대에 오른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저마다 악기를 들고 조율을 하거나 음을 맞춰본다. 그 중에서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육중한 몸매의 콘트라베이스. 언제나 맨 뒤켠에서 오케스트라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악기이다. 그렇지만 스폿라이트는 항상 무대 중심을 비추고 자그마한 악기들이 바쁜 손놀림으로 연주회 내내 음색을 뽐낼 때에도, 콘트라베이스는 드문드문 '둥둥' 소리를 내지만 그마저도 배경 속으로 사라져 우리들의 귓가엔 있으나마나한 것으로 치부된다.

콘트라베이스 혹은 그 주자는 마치 연극무대에서 '지나가는 여인1'의 배역과도 같다. 주연도 조연도 아니지만 그가 없다면 연극의 맛이 살지 않는 것처럼, 있을 때는 그 존재감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이 빠져버리면 '연주음이 흩어져 버린다'. 콘트라베이스의 소리는 대규모 오케스트라보다는 소규모 재즈밴드에서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콘트라베이스를 퉁길 때 나는 '둥둥거림'은 낮은 주파수 때문인지 귀로 듣는다기 보다는 가슴의 울림을 통해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모랄까... 이 책은 자신의 가치를 잘 알아주지 못하는데서 오는 히스테릭한 변명들로 이루어진 독백같다. 고백하건데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왠 흰소리인가, 머리속에도 잘 들어오지 않고 해서 초반부 즈음에서 책을 덮어버렸더랬다. 그리고 아주 많이 시간이 흐른 뒤 연주회에 갔다가, 높은 음색의 악기들이 서로 잘 조화하도록 아랫부분을 채워주는 콘트라베이스 소리를 귀여겨 듣고 다시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마음 편히 콘트라베이스 주자의 넋두리를 들을 수 있었다.

쥐스킨트는 사회 내에서 소외받고 적응하지 못하며, 우리의 이해와 관심의 시선에서 빗겨간 사람들을 즐겨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는듯 하다. 그의 손가락과 콧날만큼이나 섬세한 필치로 소외된 자들의 괴짜같은 표면 뒤에 숨겨진 아픔과 진실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한 권의 책이 이렇게 내 경험과 맞물려 마음 속으로 폭 내려 앉는 느낌이야말로 독서의 즐거움이 아닌가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과 행복의 비밀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강주헌 옮김 / 큰나무 / 2000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발자크의 방대한 소설 백과사전 <인간희극> 중 두 개의 단편을 골라 엮은 것이다. <사랑과 행복의 비밀>은 '풍속 연구' 중 '사생활의 정경'에 속해 있으며, 원제가 <가정의 평화La Paix du Menage>로 1830년에 쓴 소설이다.  <아듀Adieux>는 '철학 연구'에 속하며 원제 그대로 1832년에 쓴 것이다. 사랑의 행복과 그 보다 더 진한 슬픔을 교차시킨 이 책의 구성은 삶이란 기쁨과 슬픔이 혼재하는 것이란 진리를 전달하려는 기획 의도가 엿보인다.

<사랑과 행복의 비밀>은 전쟁으로 인한 군인들의 양산, 그에 따른 사랑과 가정 생활의 불안정함을 상류사회의 무도회장을 배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결혼한 부부라도 정부를 갖고 있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당시 사회상을 꼬집듯 발자크는 이 사회의 대모격인 랑삭 부인의 입을 빌어 "가정의 평화를 깨는 짓은 절대 하지 말아라"라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번쩍이는 보석과 평생을 보장해 줄 연금이 표상하는 "덧없는 열정보다 진정한 애정이 백 배, 아니 천배의 사랑을 안겨주는 법이다"라고 조언한다. 이 소설의 결말은 남성에게 '조강지처의 사랑과 믿음이 주는 가정의 행복'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  

평생 여성을 사랑하고, 여성과 결혼, 가정생활을 주제로 책을 쓴 발자크는 여성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비밀에 대해 이 책에서 은밀히 얘기해 주고 있다. 하지만 발자크 역시 오랫동안 한 여자의 정부였던 것을 생각할 때 이 소설의 교훈은 아이러닉한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두번 째 소설 <아듀>는 전편의 소설과는 대조적으로 비극적 결말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삶을 되찾게 해주기 위해 남자는 상처를 상처로 치료하는 방법을 택했으나 삶을 되찾은 여인은 행복의 충격 때문인지,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생을 마감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식의 결말이 이미 구시대적인 것이 되어버린 요즘,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우리는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극적 구조를 지닌 이 두 개의 소설은 우리 삶이 점점 망각하는 것들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는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동화의 비평 / 조르쥬 풀레

- 남(작가)의 의식과 자기 의식을 합치시키려는 의지

1) 티보데(Thibaudet, Albert 1874-1936) : 즉각적, 전폭적인 동화. 작품 자체에 대한 비평이라기 보다는 작품과 작품 외적인 요소 사이의 비교 분석에 주력. 이를테면 통시적으로 유사/상이한 작품들과 비교, 역사적 관점으로 분석. 비평의 관점이 작품 자체를 벗어나는 단점. 외향적.

2) 리비에르(Riviere, Jacques 1886-1925) : 작품과의 정신적 교감, 촉각적, 작품에 대해 전적으로 순종적. 정숙주의(quietisme). 작품의 사상이 비평가를 변화시키지는 않음. 작품의 사상이 비평가에게 그대로 스며듦. 비판없는 수용?

3) 샤를르 뒤 보스(Charles du Bos) :  유연성, 액체 상태. 비평자는 정신, 사고의 통과점, 집적장, 교차역의 역할. 리비에르와의 차이점은 유입된 남의 사상이 그를 통과, 자기 것이 되어 흘러나간다는 점. 좀더 능동적인 동화.

4) 라몽 페르낭데스(Fernandez, Ramon 1894-1944) : 비평적 관점(vision)이 확실히 정해짐. 문학 작품 속의 혼돈을 비평가의 관점으로 질서정연하게 정리. 구조주의의 전조. 비평은 작품의 모호성을 작품에 앞서 이해하고 작품을 하나의 통일체로 만드는 것.

5) 마르셀 프루스트(Proust, Marcel) : 소설가이면서 비평가. 자신의 비평적 기도를 소설에 구현. 창조 행위 이전의 것들에 대한 고찰. 비평은 창조의 선행단계. 독서에서 비평으로. 한 존재양식(작가의 존재양식)에 합치하는 것. 능동적 독서. 모방(작가의 관점)을 통한 재 창조.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읽어, 그 속에서 반복적으로 얻어지는 하나의 본질적이고 통일성을 지닌 사실을 얻어냄. 작가들은 작품활동을 통해 어떤 것에 대한 총체성을 보여주려고 하나(예를 들어 발자크의 <인간희극>), 대부분은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므로, 추 후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읽는 통체적 독서행위를 통해서 이를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비평. 주제비평의 시초.


  • 지드와 발레리 - 신비평의 선구자 / G.W. 아일랜드

작품을 외적 요소 즉, 역사, 시대적 관점에서 비평하는 방법론을 지양. 오히려 '무엇에 의해 한 작가작품이 자기 시대를 초월하는가'에 관심. 문학작품은 말(mots)의 총체. 그 속에 사상이 스며들어 동화될 때 가장 풍요로운 상태. 완결된 하나의 작품은 하나의 소우주. 한 작품은 오직 그에만 해당되는 유일한 열쇠로 열 수 있는데, 가장 완벽한 열쇠는 '작가'. 작가의 내면의 조작에 관심. 하나의 작품은 오로지 하나의 질서에만 호소할 수 있다.

1) 작가에서 출발하여 작품을 연역해 냄

- 그러나 발레리는 작가가 작품 속에 현존해 있되, 그 해석의 장은 작가의 전기적 요소가 아니라 오로지 작품 내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문학 작품은 한 인간의 창작이 아니고, 작자와 언어행위의 합작물이다'. 언어라는 '형태'가 작품에 깃드는 감동의 창조자. 작품의 내밀한 구조가 정신의 내밀한 구조와 부합됨. 작품이 곧 작자이며, 비평가는 작품의 인간을 알아보아야 함. 작품의 개인성도 인간에게서처럼 온갖 변모를 일관하여 보존됨.

"포우의 체제 안에서 일관성(consistance)은 동시에 발견의 수단이자 발견 자체이다. 그것이야말로 희한한 의도다-본보기와 자기소유화의 상호 연관성의 작품화. 그 심오한 균형이 이를테면 우리 정신의 내밀한 구조 속에 현존하는 한 도면에 의거하여 세계를 구축한다. 시적 본능이 맹목인 채로 우리를 진실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수학자들에게서 꽤 흔히 이와 비슷한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발견을 배합능력의 창조로 보지 않고, 차라리 그들의 주의가 이미 존재하는 자연스런 형태의 보물을 포착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 보물은 오직 엄밀함과 예민한 감수성 그리고 욕구의 무척 희귀한 만남에 의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잘 이해 안되는 부분)"

발레리는 포우를 통해 '작품의 인간'에 대해 설명. 작품의 개인성이 변모를 일으키면서도 일관되게 보존되는 것을 포착해야 하는데, 포우에게서 이러한 일관성(consistance)가 관찰됨. 그 일관성의 발견은 창조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자연스런 형태의 보물을 포착하는 것이다. 포우가 모색하는 진실은 직관에 의해 포착되며 직관은 고찰하는 한 체계의 각 부분과 특질의 상호 의존을 드러내준다. 직관에 의한 가담이란 작품에 대한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생명에의 참여를 말한다. 이는 곧 삶의 한 체험이며 이를 통해 비평가는 창조적 몽상이 가능하다. 즉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그가 명상하는 작품 속에 몰입하는 것이다.


  • 작품의 실재적 형태들 / 장 루세

*비평이란 주관적 성격을 지니며, 비평가의 구체적 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파악하는 주체와 그 대상을 분리하기 힘든 활동이며, 그 둘 사이의 공모를 피할 수 없다.

1) 형태적 지표 - 시에서 호흡의 변화, 연극에서 무대의 채움과 비움, 소설 서술에서 독백의 삽입, 인칭의 선택 등과 같은 형태적 지표는 작품 해석에 있어서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형태적 경험으로 시작하는 해석이 작품의 여러 감가적인 요소들 밑에 언어행위의 자원을 통하여 그 작품을 살아고 느끼도록 함.

2) 형태의 도취 - 필자의 저서 <문학적 바로크>을 이 소논문이 출발점으로 삼음을 밝힘. 바로크는 형태의 도취이다. 다양함 속에 선택이 필요하다.

3) 회화(나 건축)에 빗댐 - 문학작품 속의 의미와 형태의 관계를 회화의 그것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회화는 형태가 강하고 즉각적이므로 그 자체가 작품이며(즉 형태가 이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자기 내면의 법칙에 의해서 규제되는 자기 생명의 상징이다.

4) 음악에 빗댐 - 음향의 연속을 통일체로 파악할 때 음악을 이해하 듯, 상호간에 서로 침투되는 관계들의 복합적 체계를 다룸. 전체와 부분과의 상호작용, 유기적인 관계.

5)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예로 듦 - "이중 렌즈": 요소들의 대립과 반복, 서로 얽히고 배합됨. 결국 이러한 것들(구조적 모티브들)이 하나의 구조를 형성함. 총괄적 독서의 효과를 제시하고자 함. 이러한 분석 방식은 작품 안에서 유기적으로 구성된 한 체계를 보여준다. 이는 언어학에서의 <구조>의 의미와 부합한다.

6) 이러한 언어학의 구조주의적 방식을 문학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언어학에서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은 자의적으로 결합되지만, 비평에서는 그 임의성을 배제하는 문체가 존재한다.

-언어학에서는 언어(langue)를,  비평에서는 언화(parole)를 연구대상으로 하므로 언어학의 연구 방법론을 언화에 적용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문학 작품의 형태는 작가를 발견하게 해 주며 비평가(독자)는 그 안에서 한 작품을 만나게 된다. 형태는 각 작품에 하나의 혹은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다. 발레리는 "형태는 작품들 이전에 태어난다"고 말했으며, 들라크르와와 발자크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이 곧 작품의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형태는 예술가의 가장 내밀한 경험이자 동시에 인식과 행위의 도구이다.


  • 비평적 상황 / 레몽 쟝

-비평가에 대면한 작가의 상황.

1) 비평은 고친다(redresser) : 미학적 준거에 의거 혹은 이데올로기에 비춰 작품에 개입한다.

2) 비평은 모르고 있다(ignorer) : 작품의 심부에서 작품에 적중하여 분석하는 길을 모른다.

3) 비평은 덮어 씌운다(recouvrir) : 참다운 비평의 역할은 작품을 드러내보이거나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의미를) 덮어 씌우는 것이다.

ㄱ. 문제점 : 작품 자체를 대신하려 들때, 작품 고유의 영역에서 작품과 경쟁하고, 작품을 넘어뛰려 들때 작품을 압박하게 되지 않을까?

 ㄴ.해결책 : 작가가 암암리에 사용한 정신분석, 사회학, 언어학, 문체학, 마르크스 주의 등을 거꾸로 밟아나가면서 작품과  일치하고 거리를 두지 않는다.

4) 비평가의 의식 = 구조하는 의식(스타로벵스키) : 비평이 극도에 이르면 비평의 대상이 된 작품을 능가하고 더욱 풍부한 내용을 드러낸다. 문학작품을 한 시작점으로 보고 작품을 재구조함. 문학과 비평의 공생.

5) 문학의 형태화, 기호화 - 비평이 그 형태와 기호를 해석하도록 함. 작품의 진실을 밝혀 작품을 새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비평적 해설과 분리될 수 없음. 비평이 진보함에 따라 문학은 퇴보한다고도 볼 수 있으나 '창조문학과 비평문학 사이에 구분이 없어진다'고 보는 것이 낙관적.

6) 비평가와 작가의 관계 속에서 비평가에게 무게중심이 주어지는 '비평을 위한 문학'이 양산될 가능성도 있으나, 비평가들이 끌어들인 혁신과 풍요성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모험은 감행할 만 함.


  • 생트-뵈브와 비평적 경험 / 쟝-피에르 리샤르

*'사랑의 몽상들'의 시각에서 접근 - 액체의 메타포, 유동체의 상상, 사랑이 존재의 액체화로 몽상되고 있음. ㅡ> 호수의 테마

*호수 : 반대감정의 양립 - 육체적 융합의 표상/정신적 현실정의 직관 ㅡ> 욕망의 대상인 타인의 심혼

-루앙 부인 ㄱ. 호수의 표면 : 관능의 덩어리 ㄴ. 호수의 깊이의 모호성 : 유동성이 깊이 침잠되어 있음. 호수의 표면은 현기증 나는 동시에 나를 비추지 않는 닫혀진 거울.

-소설가/비평가로서의 생트-뵈브는 소설속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고, 작가와 동화하려들지 않고, 표면에서 몽상한다.

*사물과의 관계 - 빈곤, 궁핍, 결여, 불충만, 무기력함. 욕망에 대하여 스스로를 열어주거나 자신을 내주려하지 않는다. 세계와의 접촉은 근본적으로 보람없다는 결론. 사물들의 침울함과 침묵에조차 열정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사물들의 부재성을 통하여 그 존재 중의 어떤 것이 마침내 우리에게 드러나는가를 기대함. 사물과의 접촉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포위하고, 스치고, 스며드는 것이다.

*색채 - 노랑 : 쇠퇴하고 병적인 노랑, 좌절의 형태, 약점과 좌절의 역설

*사물들(작품들)의 비밀을 고의적으로제한된 아주 피상적 파악에서 출발하여 밝힘.

*감각적 현실을 무기력과 폐쇄의 양태로 느끼듯, 예술의 양태는 천재라고 부르는 창조적이며 자연발생적으로 확산하는 힘의 작용에 의해 느껴진다. 천재의 작품은 약동력과 분출과 특수한 천부적 힘을 지닌다.

*비평적 이해는 포위 탐사하고, 밖으로부터 적시며 대상과 평행적이다.

*생트-뵈브 비평활동의 기법 - 인간과 작품 사이에 어떤 실질적인 분리도 정립될 수 없다. 인간이란 작품 속에서 이야기되는 자, 극도에 이르면 언어행위 자체, 그 작품의 개인적인 언어행위이다. 작품이란 빠롤(parole), 어떤 사람의 언어적 再?이다.

*포위(=비평)의 세 수준 : 표정, 글, 전기

*수법 : 문장의 특유한 진행. 문장이란 언어행위. 생트-뵈브는 '수법'에 중점. 따라서 문체를 두루 살펴보고 모사해야함.

*생트-뵈브가 만족해하는 문학형태란 그 속에 존재의 필연성의 현위와 그 토대를 느끼게끔 해주어야하며, 적재물이 실려있어야 한다. 반대로 불만족스런 문학형태는 딱딱하고, 과장되며, 불균질한 것이다. 형태는 흐르는 듯 하여야할 뿐만 아니라 충만해야만 한다. 생트-뵈브는 스스로 창조하는 동시에 비평한다.

*비평가와 대상 작가는 친자관계에 있다. 비평의 진술은 작품의 진술을 연장하며, 육체적으로 연대를 맺고 있어야 한다. 비평적 언어행위는 작품에서 출발하여, 그것에 의거하되(인용), 적용되기도 한다. 비평은 다른 감수성(비평가의 감수성)의 요구 앞에 의미를 불러내어 다른 구조속에서 되풀이하는 일이며, 그 의미를 "다른 한 형태 밑에" 존재하게끔 도발하게 하는 것이다.


  • 비평과 생존 / 세르즈 두브로브스키

문학이란 실존으로서는 언어행위(langage)이며, 말들로써 자기를 포괄적으로 파악하고 표현하려고 모색하는 인간의 진실이다. 오늘의 비평은 전폭적으로 작품의 절대적 우위성을 전제로 삼고, 글에 대한 독자적 이해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작품 안에서 말하는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면 그 목소리는 대체 어떤 것인가?

*작자라는 독특한 존재자는 문학에서 자취를 감춘다. 뤼시앙 골드만은 창조의 주체가 결코 한 개인이 아니고 한 집단임을 예고했다. 롤랑 바르트는 일체의 서명이 지워질 때 작품이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책의 출현은 작자의 소멸이다.

*비평가 역시 작가라면 비평에는 비평가의 소멸이 따른다. 롤랑 바르트는 "비평가는 작품의 기호를 해독되고 변형된 기호로 또 한번 재생산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제라르 쥬네트는 "진정한 관계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있지 않고 글과 글읽기 사이에 있다. '글의 위상'과 '글읽기의 위상'은 시간의 순환적 작용의 움직임에 의해 서로 통하는 양면이다"라고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이외수 지음 / 동문선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글주인과 그 글이 꼭 일치하란 법은 없지만, 이외수님의 이런 글들을 보고 있으면 참 맑으신 분일거란 믿음이 생긴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이라고 할까, 그림보단 여백이 많은 그림 또한 마음을 참 편안하게 해 준다.

어딘가에 적어두고 사람들과 마찰이 생길 때, 또 그런 일을 볼 때 권해주곤 하는 글귀들, 계단 시리즈.

-이해의 계단 "걸레는 다른 사물에 묻어 있는 더러움을 닦아내기 위해 자신의 살을 헐어야 한다. 이해란, 그대 자신이 걸레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관심의 계단 "[...]그대는 먼지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먼지는 하찮은 존재다.[...] 만약 그대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 한 점 먼지에까지도 지대한 관심을 부여하라."

-헌신의 계단 "하느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빈 손으로 내려보낸 이유는 누구나 사랑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말로 하기 쉬운 말들이 실천하기도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살이의 모순을 느끼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지만 그런때야말로 좋은 책, 좋은 글의 힘을 실감하게되는게 아닐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