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적 ( 2막)
   -모차르트의 '마적'은 '마술피리'라고도 불린다.-

 때는 기원전 1000년 경 이집트 왕 라머세즈 1세의 통치 기간인 이지스의 신전과 그 근방.

 제 1막 울창한 숲속에 싸인 바위산

 이 곳은 밤의 여왕의 영지.
 왕자 타미노가 큰 뱀에 쫓기면서 피하다가 그만 기절하고 만다.
궁전 문이 열리며 3인의 시녀가 나와 은으로 된 창으로 뱀을 죽인 후 미모의 왕자를 찬미한다. 이 사실을 여왕에게 알리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새잡이 파파게노가 나타난다. 한편, 왕자는 정신을 회복. 새를 조롱에 넣고 새털옷을 입은 파파게노가 판의 피리를 들고 파파게노의 아리아 '나는 새잡이 '라는 노래를 부른다. 왕자는 그가 자기를 구해 준 사람인 걸로 알고 자신의 아버지는 저 먼 곳의 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 곳은 밤의 여왕이 지배하는 나라이며 자기는 여왕과 시녀들에게 새를 가지고 와서 식량과 바꾸어 생활한다는 것을 말하며 뱀도 자신이 죽인 것이라고 뽐낸다.

 이 때 시녀들이 나타나 왕자에게 초상화를 보이는데, 이것은 여왕의 딸인 파미나의 초상화였다.
시녀들은 자신들이 왕자를 구했다고 말하면서 만약 초상화에 마음이 끌린다면 명예와 행복과 명성을 머지 않아 얻을 것이라고 말하며 파파게노와 같이 퇴장한다. 왕자 타미노는 감격한 나머지 초상화의 아리아 '불타는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시녀는 다시 나와 왕자에게 당신의 노래를 밤의 여왕이 들었다는 것과 공주 파미나가 지금 악마의 손에 잡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왕자는 공주를 찾기에 생명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화려한 방

 밤의 여왕이 왕자야 말로 딸에게 자유를 줄 수 있게 한다는 노래를 부른다.

 바위산

 시녀 중의 한 사람이 여왕에게서 받은 마술피리를 타미노에게 주며 이 피리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불행한 자에게는 기쁨을 ,외로운 자에게는 연인을 주는 것' 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시녀는 여왕에게서 받은 또 다른 물건인 은으로 만든 방울을 파파게노에게 주면서 '아름답고 용감한 세 소년이 그대들 가는 곳을 안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소년들의 안내로 길을 떠난다.

 호화스런 이집트의 넓은 방

 이 곳은 파미나가 있는 곳이다. 그녀는 흑인 모노스타토스의 감시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엉큼한 마음도 품고 있어,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다.그러던 중 파미나가 도망치려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야욕을 감행하려고 한다. 이 때 파파게노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흑인은 새의 괴물과 같이 생긴 그를 보고 놀라 피한다. 파파게노는 그녀가 밤의 여왕의 딸인 것을 알고 왕자의 이야기를 하자 파미나는 그야말로 자신의 연인이라고 말하며 ‘사랑을 느끼는 남자들은 부드러움을 갖추고 있다’는 노래를 부른다.,

 숲속, 중앙에 사원이 있다.

 세명의 소년에게  인도되어 타미노가 등장한다. 그가 이성의 사원에 가서 문을 두드릴 때, 물러가라고 하는 소리가 난다. 이번에는 자연의 사원에 가서 문을 두드리자 그 곳에서도 역시 물러가라고 하는 소리가 난다. 다시 지혜의 사원에 가니 한 승려가 나타난다. 타미노는 승려 자라스트로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언제 알 수 있느냐고 묻자 '우정의 손이 너를 영원한 끄나풀에 맺게 할 떄'라고 대답한다.

 타미노는 공주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신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 이 때 파파게노의 은방울 소리가 들리자 타미노는 기뻐하면서 그 곳에 간다. 흑인이 막 공주를 붙잡으려 할 때 파파게노가 은방울을 흔들자 모노스타토스와 흑인들은 노래하며 춤을 추다가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잠시 후 군중들의 환호 소리와 함께 자라스트로가 나타난다. 파미나는 그 앞에 엎드리어 자신이 도망치려 한 것은 흑인의 부정한 사랑 때문이었다며, 자라스트로에게 용서를 빈다. 이 사정을 안 이집트의 고승 자라스트로는  이를 용서하지만 어머니와 만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 때 흑인이 타미노를 끌고 나타난다. 여기서 파미나와 왕자 타미노의 첫 대면은 모든 것을 잊어 버린채 포옹한다. 흑인은 노하여 그들을 처벌해 줄 것을 고승 자라스트로에게 부탁한다. 그는 흑인에게 77번의 매를 치라고 명한 후 두 사람에게 면사포를 씌워 시련의 사원으로 갈 것을 명령한다. 그들의 혼을 먼저 시련에 의해 깨끗하게 하려는 것이다.

 제 2막 야자나무가 우거진 숲

 자라스트로는 승려들에게 타미노가 시련을 받고자 하니 그의 청을 들어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옵소서라며 노래한다.

 사원

 타미노와 파파게노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첫 번째 시련을 겪는다. 타미노에게는 파미나를, 파파게노에게는 새로운 짝이 될 파파게나를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지는 것.
첫 번째 시련은 침묵이다. 아름다운 정원의 달밤. 이 때 밤의 여왕과 세명의 시녀가 나타나더니, 이 곳은 무서운 곳이니 빨리 떠나라고 한다. 이 때 부르는 곡이 '지옥의 복수가 내 마음을 불타게 한다'이다. 이에 응답하듯, 자라스트로는 '이 신성한 전당에는 복수가 없다며' 베이스의 풍성한 음성으로 파미나를 데리고 나간다.

 정원

 달밤이다. 꽃 속에서 파미나가 자고 있다. 흑인은 다시 파미나에게 단검을 주면서 '너의 아버지가 죽을 때 자라스트로에게 준 일곱겹의 태양을 돌려 보내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무력하게 자라스트로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만다. 그를 찌르라'고 한다. 밤의 여왕은 복수의 아리아를 부른다. 어머니가 간후 파미나는  그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흑인이 나타나 칼을 빼앗으며 자기 말을 안 들으면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한다. 자라스트로가 나타나 흑인을 쫓고 파미나를 안심시킨 후 데리고 나간다.

 장면이 바뀌어 그는 시련을 계속하고 있다. 식사 때 마의 피리와 방울을 가진 소년들이 등장한다. 다시 자라스트로는 타미노와 파파게노에게 더 어려운 시련을 받을 것을 말한다. 타미노, 파미나,자라스트로의 3중창이 이어진다. 서로 떠나는 이별이다. 사건이 벌어진 후 장면은 작은 정원... 타미노의 냉정한 태도에 파미나는 절망한 나머지 자살하려고 한다. 그 때 세 소년은 그 것을 말리며 '저 젊은이는 당신을 사랑한다' 고 말해 준다.

 험한 암굴

 타미노를 부르는 파미나의 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자  두 남녀는 기뻐하면서 포옹한다. 여기서 파미나는 마의 피리의 유래를 말한다. '나의 아버지가 뿌리가 깊은 천년이나 묵은 떡갈나무를 심한 폭풍이 부는 날에 찍어 만들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굳은 결심을 하는데, 최후로 불의 시련과 물의 시련을 받는다. 타미노와 파미나는 영접을 받으며 사원으로 향한다.

 정원

판의 피리를 불면서 파파게노는 헤메이고 있다. 이 때 세소년이 나타나 방울을 흔들라고 가르쳐 준다. 그가 방울을 흔들며 춤을 추니 소년들이 파파게나를 데리고 온다. 그 때 흑인과 시녀들을 데리고 밤의 여왕이 등장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사원에 모인 것을  알고 복수하기 위하여 온 것이다. 이 때 천둥이 일어나더니 밤의 여왕과 악인인 흑인의 무리들은 괴로워 하며 지옥으로 떨어진다.

 태양이 빛나는 대사원

 자라스트로는 엄숙한 어조로 '밤이 지나갔다'고 선언한다. 승려의 의복을 입은 타미노와 파미나가 나타나자 세 소년은 화환을 가지고 온다. 많은 승려들이 이시스와 오시리스신에 대한 감사의 합창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며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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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프랭클린.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3년부터 39년까지 공황극복을 위해 실시한 일련의 경제정책. 1929년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 대폭락을 발단으로 시작된 대공황은 GNP의 급격한 하락, 1300만의 실업자 양산, 심각한 은행위기 등을 초래했고, 이로 말미암아 미국 자본주의는 그 근저에서부터 흔들리고 후버 대통령이 펼친 공황대책도 완전히 실패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는 국내 재건을 최우선 과제로 하여 정책을 입안하고, 30년대말 전시체제(戰時體制)로 이행할 때까지 경제 각 부분에 적극적인 공황대책을 강구했다. 이러한 정책은 자본주의 체제의 구제(救濟)를 의도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많은 새로운 방책이 도입되고, 그 과정에서 미국 경제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즉, 루스벨트는 경제과정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라는 수단을 생각하여, 국내시장의 확대를 꾀하고 공업·농업·상업·금융·노동 등 일체의 생산·유통·분배의 각 분야에 걸쳐 광범한 일련의 경제정책을 수립하였다. 뉴딜 경제정책의 체계가 <국가와 사기업>의 협동체제라고 불리는 사실에서 뉴딜이 가지는 국가독점자본주의적 색채를 엿볼 수 있고, 1930년대의 대공황 후의 자본주의가 종래와는 달리 국가권력을 이용하면서 공황에서의 회복을 도모하려 한 점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 자체의 변질과정을 알 수 있다. 뉴딜정책은 7년간에 걸쳐 시행되었는데, 그 과정은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제 1 기(1933∼34) : 대외경제 관계를 정부의 관리하에 두고, 특히 구제와 부흥을 중시하는 정책을 폈다. 우선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회의의 잠정적인 통화안정협정을 거부하여 세계경제의 <블록화>경향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으며, 국내적으로는 은행 휴일선언으로 은행위기를 탈피하고, 이른바 <백일의회(百日議會)>라고 부르는 특별회기에서 행정부 주도하에 적극적인 입법활동을 펴서 실업자 구제책, 농민에 대한 융자활동과 생산통제에 의한 농산물 가격유지, 지역 종합개발을 지향한 테네시강유역개발공사(TVA), 금융·증권제도의 결함시정, 그리고 초기 뉴딜정책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종합적 산업정책인 전국산업부흥법(NRA) 제정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 뒤에 국내정책이 일단락되자 <선린정책>의 하나로 중남미에 경제적 진출을 적극적으로 꾀했다.

② 제 2 기(1935∼37) : 복지정책과 노동보호법을 갈구하는 근로대중의 요구가 높아지자 좌경화(左傾化)한 사회개혁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고, 사회보장제도의 수립, <부유세법(富裕稅法)>이라고 하는 세제개혁, 공공사업의 확충, 획기적인 노동보호 입법의 제정 등 과감한 정책을 수행해 나갔다. 이러한 정책에 의해 루스벨트는 진보적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얻어서 36년 그의 재선(再選)을 바라는 진보파세력의 대연합이 형성되고, 또 노동조합이 눈부신 세력증대를 나타냈다.

③ 제 3 기(1937∼39) : 최고재판소 개혁문제를 계기로 보수파의 반격이 시작되고 37년에는 다시 급격한 경기후퇴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국방력 증강의 필요로 국방비 지출을 축으로 하는 대규모 재정지출이 경기대책의 중심이 되어 점차 전시체제로 이행되었다.

출처 : 엥빠스 앙씨끌로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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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자본주의란 네덜란드 시민들(Dutch burgher)의 자본주의이며, 영국 공장주들, 제국 공장주들, 양키 거물 기업가들의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상업 자본주의 : 중세 말 유럽에서 번성한 원거리 교역에 뿌리를 둔 것, 18-19세기의 산업혁명이 도래할 때까지 지속됨. 아시아의 향료와 브라질의 면화와 담배, 아프리카 노예와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들을 팔아 부를 축적.
*산업 자본주의 : 철강 회사와 자동차 공장을 소유.

모든 부르주아는 자본가이지만, 모든 자본가가 부르주아인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라는 용어가 종종 자본가나 중산층과 동의로 사용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중산층에는 고학력 종사자, 공무원처럼 자본가가 아닌 부류도 포함된다. 독일 학자들에 따르면,

*자산 부르주아(propertied bourgeoise : 기업가나 공장주)
*교양 부르주아(educated/credentialed bourgeoise : 교수, 변호사, 의사, 장관, 공무원, 장교)

으로 나눌 수 있다.

사회적 유형으로서의 부르주아 자본가란 경제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적, 윤리적 차원에서 정의된다. 부르주아란 중세와 근대 초기에 유럽의 자유 도시민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중세말부터 르네상스에 이르는 시기에 이탈리아 북부와 '저지대 국가들(벨기에, 네덜란드)'의 도시 공화국들은 교황과 황제, 토착 귀족들로부터 독립을 획득했다. 이 도시 공화국의 '공민들(burghers)' 혹은 엘리트 시민들은 근대적인 입헌 공화정과 상업 자본주의의 토대를 동시에 구축했다. 자본과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부를 자의적으로 징벌하는 전제 권력을 피해 재산과 개인을 보호하는 입헌 국가들로 모여들었다.

16세기 스페인의 이탈리아 말살 정책으로 자본주의 경제와 입헌 정치의 중심은 17세기 네덜란드로, 18세기에는 영국과 북미대륙의 식민지로, 그리고 20세기에는 뉴욕으로 이동했다. 뉴욕을 최초로 건설한 사람들은 네덜란드 상인이며, 뉴욕의 원래 이름은 뉴 암스테르담이었다.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초창기 미합중국은 모두 프로테스탄트 사회였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 그 자체가 부르주아 윤리의 원천은 아니다. 부르주아 윤리는 출발부터 귀족 윤리, 즉 유럽의 기사도에 대한 저항에 의해 정의되었다. 기사들은 노동을 경멸하고 부를 무절제하게 탕진하며, 이방인을 복종시키려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노동을 존중하고 부를 축적하며 이방인들과 거래를 원했다. 기사들은 이윤을 경멸하고 명예를 소중히 여겼지만, 부르주아들은 명예보다는 이윤을 중시했다.

유럽의 기사도에 뿌리를 둔 텍사스는 대토지 소유와 정치, 군사적 지배에 권력 기반을 둔 전근대적 정서를 갖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교육수준이 높고 예의바르지만, 사회적으로는 무자비한 사람들이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흔드는 모든 세력에 대해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들의 문화는 부르주아와 청교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영국계 미국 귀족들의 문화다. 인종적으로 앵글로 켈틱인 이들은 처음에는 아일랜드인들로부터 땅을 빼앗았고, 북미 대륙에 도착한 뒤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멕시코인들로부터 토지를 강탈했다. 1836년부터 1960대까지 텍사스 역사는 "가장 큰 민족 집단인 앵글로-켈틱 남부 백인들이 테하노(Tejanos, 멕시코계 텍사스인)들의 땅을 빼앗고 인디언들을 내쫓은 다음, 독일계 정착민을 짓밟고 흑인들을 착취했다."고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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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ète et chansonnier français (Paris, 1780 — id., 1857).
Créateur, sous la Restauration, de la chanson libérale et patriotique, il fut le meilleur propagandiste de la légende napoléonienne (le Roi d'Yvetot; Il n'est pas mort; le Vieux Ser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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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Joseph Vadé

Poète français (Ham, Somme, 1719 — Paris, 1757).
Il composa de nombreux vaudevilles, parades ou opéras-comiques (le Bouquet du roi, 1752), mais il est surtout le représentant le plus significatif du genre «poissard»: ses œuvres sont précieuses pour la connaissance du langage du peuple de Paris et notamment du parler des Halles (les Racoleurs, 1756; Catéchisme poissard, 1758).


*Charles Collé

Chansonnier et auteur dramatique français (Paris, 1709 — id., 1783).

On lui doit des Chansons, des parades écrites pour le duc d'Orléans, dont il était secrétaire, et des comédies (la Partie de chasse de Henri IV, 1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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