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차이나

일반적으로 옛 프랑스령 식민지인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3개국을 가리킨다. 이들 세 나라는 예전에는 모두 독립왕국을 건설하고 있었으나 19세기 후반 이래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을 되찾았다.

인도차이나 독립

19세기 말 이후 인도차이나 3국(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은 프랑스 지배하에 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진주로 1945년 3월 프랑스 세력은 무너지고 일본세력을 업은 베트남의 바오다이황제, 캄보디아의 시아누쿠왕(), 라오스의 시 사왕봉왕이 등장하였다. 그해 8월 일본의 패망으로 일본의 괴뢰()였던 안남()의 완조() 정부를 무너뜨린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은 9월 2일 호치민[]을 주석()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한편 라오스에서는 반프랑스 조직인 자유라오스, 캄보디아에서는 총리 손곡탄(Son Nogoc Tanh) 등이 중심이 되어 지난 3월의 독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인도차이나 3국의 영유() 부활을 꾀하던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사이공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베트남군과 군사충돌을 되풀이하였다. 평화교섭에 의한 독립을 희망하는 베트남측은, 1946년 3월 프랑스와의 사이에 프랑스군의 베트남 북부 진주()와 프랑스 연방의 테두리 안에서의 독립을 승인한다는 독립예비협약()을 체결했는데, 남부 문제를 협의한 그해 4월의 다라트(Darat) 회의 후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에서 남부의 분리를 기도하여, 사이공에다 코친차이나(Cochin China)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래서 독립 본협정()을 토의하기 위하여 7월에 파리 남쪽의 퐁텐블로에서 열린 회의는 결렬되었고, 1946년 11월 북베트남 주둔 프랑스군의 전면공격개시를 계기로 하여 12월에 양국간에 전면 전쟁이 일어났다. 현대식 장비를 갖춘 프랑스군의 침공에 의하여, 년 2월 위에의 함락에 이어 하노이를 철수한 월맹군은 프랑스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산악지대로 지휘본부를 옮겨, 철저한 항전태세를 취하였다. 1947년 가을 베트바크 지방에서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시키고, 1948년부터는 반격으로 돌아섰다.

이 사이에 프랑스는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베트남 임시 중앙정부라 개칭한 뒤, 1949년 6월 해외에 망명 중인 완조()의 바오다이 황제를 주석으로 맞이하여 사이공에 친프랑스적인 베트남 정부를 세워, 그 군대를 프랑스군과 연합시켜서 월맹과의 전쟁을 계속함과 동시에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고, 또 미국으로 하여금 바오다이 정권을 승인시켜 이 전쟁에 개입시켰다. 그러나 1950년 이후, 월맹의 총반격에 직면하여 프랑스·바오다이군은 각지에서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겼다.

한편 1945년 10월 캄보디아프놈펜에 진주한 프랑스군은 캄보디아의 독립 선언을 취소하고 자기 세력하에 두려 하자 손곡탄파는 프놈펜을 탈출, 자유 크메르를 결성하고 대프랑스 항쟁에 돌입하였으며, 라오스에서도 같은 해에 라오스 임시정부를 수립, 프랑스군에 대한 항전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국제여론의 준엄한 비판을 받게 되자, 프랑스는 결국 전쟁의 속행을 포기하였고, 1954년 4월 인도차이나 문제 해결을 위한 제네바 9개국 국제회의에 참석하였으나, 5월 디엔비엔푸의 싸움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여 제네바 회의의 결과 7월에 체결된 휴전협정에 조인함으로써 인도차이나에서 전면적으로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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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1월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이 무장봉기를 함으로써 시작되어 각지로 무장투쟁이 확대되었고, 1958년에는 그 병력이 13만 명을 넘는 인민전선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대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는 80만의 병력과 5조() 프랑의 군사비를 투입하여 철저한 진압작전을 전개, 알제리 인민 약 100만이 죽고 70만이 투옥되었으며 프랑스군도 1만 2000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민족전선을 진압할 수는 없었으며, 1960년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도시의 정치투쟁과 결합되었다. 이 투쟁의 발전을 토대로 FLN은 58년 가을 카이로에서 알제리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 아랍제국과 사회주의 국가의 승인과 광범한 국제적 원조를 얻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1958년 2월에 성립된 프랑스의 드골 정부는 병력을 증강하여 군사탄압을 강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치적 교섭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60년 여름부터 메룬·에비앙 등에서 비밀교섭을 벌인 결과, 1962년 3월 에비앙 협정이 성립되어 전쟁은 막을 내리고, 7월 1일에 행한 국민투표에 의하여 알제리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9월에 선출된 의회는 알제리의 공화제를 선언하고, 26일에는 A.벤 벨라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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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회담(會談:Yalta Conference)

미국은 조기에 소련을 대일전에 참전시켜, 참전 댓가로 러·일전쟁 이전의 만주에 대한 이권을 보장을 해준다고 약속한다.(소련은 극동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 확보.)

제2차 세계대전중 얄타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수뇌들이 가진 회담(1945. 2. 4~11). 연합국의 지도자들인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 최고인민위원은 나치 독일의 최종 패배와 점령을 논의하기 위해 크림 반도 얄타에서 회담을 개최했다.

독일에 관해서는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분할점령한다는 원칙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또한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해 최저생계를 마련해주는 것 외에는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채택하고, 독일의 군수산업을 폐쇄 또는 몰수한다고 선언했으며, 주요 전범들은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 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했다. 배상금 문제는 위원회를 구성해 위임하기로 했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는 다른 패전국이나 해방국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얄타 회담은 "해당 지역의 모든 민주 세력을 폭넓게 대표하는 인사들에 의한 임시적인 정부조직을 구성할 것과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자유선거를 통해 인민의 의지에 책임을 지는 정부를 수립할 것"을 합의했으며, 스탈린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소련은 공산당이 주도하는 루블린 소재 폴란드 인민해방위원회를 승인하고 있었다. 서방 연합국과 소련 중 아무도 자국이 지지하는 폴란드인 단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폴란드의 신정부는 두 단체가 협의하여 수립하며 자유선거를 실시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구성·운영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장래의 폴란드 국경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지만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극동문제에 있어서는 비밀의정서가 채택되었는데 그것은 소련이 독일 항복 후 '2, 3개월 이내에'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해야 하며 그 대가로 연합국은 소련에 1904~05년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하고 또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중국과 동맹 및 우호 조약을 체결한다는 데 동의했다. 국제연합(UN) 헌장의 초안이 이미 작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얄타 회담 참석자들은 안전보장이사회의 투표 방식에 관한 절충안을 마련했다. 소련의 16개 공화국 모두가 UN 총회에서 회원 자격을 가져야 한다는 종래의 주장을 철회했다.

1946년에 공표된 얄타 협정은 미국에서, 특히 폴란드·독일·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루스벨트가 국무부의 친소집단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비난과 함께 그가 회담 당시 병에 걸려 무능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후 1949년 중국에서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자 그것 역시 얄타 회담의 결과라는 비난이 쏟아져나왔다. 역사가의 조사와 회담 참석자들의 증언 결과 이런 비난들은 대부분 근거가 없음이 밝혀졌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을 신뢰했으며 그가 약속을 지킬 것으로 믿었다. 스탈린이 유럽의 모든 인민전선 정부를 공산당에 접수시킬 계획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얄타 협정의 일부 조항은 태평양과 만주에서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소련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가정에서 체결된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참전한 지 5일 만에 일본은 항복하고 말았다.

*출처 : 네이버 오픈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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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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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근하고 예쁜 제목인데, 책 내용은 좀 그로테스크하다.
이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으로 보아 '달'은 비물질적이고 자유로우며 이상적인 세계를, '6펜스'는 물질적이고 억압적이며 현실적인 굴레와 같은 세계를 가리킨다는데 어쩐지 그러기엔 6펜스가 너무 보잘것 없어 보인다.
민음사 책 표지에 투박한 고갱의 자화상이 그려있어, 찰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갱을 오버랩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천재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 중 1순위일 것이다. 어딘가 다른 가치관, 다른 질서가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면 그곳으로 가야할, 마치 천상의 법을 어겨 지상으로 나락한 루시퍼같은 존재 말이다. 그들은 자신이 신과 같은 능력을 지녔고, 그래서 범인들을 내려다보며 야유하는 이질적 종이지만 그래서 고독하고 측은하다. 그들은 이 세상의 법칙을 무시하며 득의만만하게 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오기를 부리지만, 천재들의 능력을 부러워하며 그들의 독설을 받아주고 그 천재성을 읽는 건 역시 범인들이다.
스트릭랜드 또한 여타 천재들처럼 사후에서야 세간의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는 호의든 생계의 이유든 간에 예술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준다. 그림을 받은 이들은 미사여구나 전문적 시각이 아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영혼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다.

천재란 무릇 그 능력 뿐만 아니라 기이한 습성이나 괴팍한 성격 등으로도 이목을 끈다. 스트릭랜드 또한 그런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특히나 고집스런 이기주의와 세상에 대한 무심함이 타히티로 가기 전의 그를 파렴치한으로 판단하게 만든다. 자신의 예술적 욕구와, 어쩌면 부유하며 안주하지 못하는 본성 때문에 두 여자의 생을 내팽개친 그의 냉담함 앞에선 예술의 숭고함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타히티라는 자유의 지대에 속했던 아타의 무조건적인 순종은 빠리라는 굴레의 지대에 속한 블란치의 광란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순수성'을 지녔다. 처음엔 그 또한 이중성을 지닌 한 남자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나, 블란치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무책임했던 스트릭랜드가 아타의 가장 미천한 두 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을 때에야 비로소 문명 세계의 여인들은 그가 추구하는 세계에 속하지 않았음을 이해했다.

이 책의 '나'에게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장인물은 그가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도 이 보편세계의 평범한 것이 아니라 근원에 접근한 단순화되고 일그러진 형이상학적 아름다움이다. 그러한 지고의 아름다움을 체득하기 위해 스트릭랜드는 보통 사람이라면 견뎌내지 못할 무수한 상황들을 담담하게 이겨낸다.

아직은 인간이 살 수 없는 달의 세계를 꿈꾸며 고독한 행복을 갈구하는 천재와, 모든 것이 안정되고 함께 6펜스 만으로도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는 범인의 삶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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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왕 이야기 1 - 엑스칼리버
장 마르칼 지음, 김정란 옮김 / 아웃사이더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부터 '원탁의 기사, 아더왕, 엑스칼리버' 등등의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무궁무진한 환상의 세계'였다. 성배의 탐색이 포스의 평정으로 대체되었지만 기사들의 모험이라는 맥락에서 스타워즈를 좋아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 또한 제다이라는 기사들의 사랑과 모험을 다룬 중세적 신화의 변형에 다름 아니니 말이다.

알베르 베갱과 이브 본푸아가 편역한 '성배의 탐색'이 성배 이야기의 부분적/요약본적 성격을 가진다면, 아직 1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장 마르칼의 아더왕 이야기는 백과사전적/각종 판본의 집대성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1권에는 마치 복음서에서 예수의 족보를 다루듯, 아더왕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브리튼 섬에 성배가 안치된 연유를 수많은 왕국의 흥망성쇠와 외우기도 어려운 이름들을 통해 소개한다. 나 역시 그리스 로마 신화가 지배적인 풍토에서 자라난지라, 이 켈트 신화의 초기 역사는 그야말로 난삽하고 체계화되지 않은 듯한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세상을 하나로 통합할 아더왕의 기운이 슬슬 느껴지면서는 그 무한한 이야기들이 한데 어우러짐을 곧 감지하게 된다.

특히나 주목할 만한 점은  뒤에 덧붙여진 역자의 켈트신화 이야기이다. 람세스를 통해 익히 느꼈지만, 김정란씨의 글에는 힘이 넘친다. 짧은 호흡의 문장과 익살스러우면서도 정확한 단어선택이 8권이라는 이 긴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게끔 해 줄 것을 믿는다.
'아더왕은 엑스칼리버를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원탁의 소유자인 귀네비어와 결혼했기 때문에 왕이 된 것이다'라는 해석은 단도직입적이면서도 페미니즘에  또 하나의 패러다임을 예고하는 듯 하다.

어릴적 만화나 영화를 통해 정확한 지식 없이 그저 재미로 빠져들었던 아더왕 이야기가 어떤 역사성과 인과성을 담고 있을지 앞으로 나올 책들이 너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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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07-25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긴 클레오파트라가 두 명의 로마 지배자와 결혼한 것도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기 위해서였죠^^

부엉이 2004-07-2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어제 킹아더를 보고왔는데, 영화속 아더는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이더군요. 성배가 없는 아더왕 이야기. 전사로 둔갑한 귀네비어. 색다른 느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