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개의 거짓말
라픽 샤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귀가 이제 트인 것인가 어쨌든 오늘 처음 매미 소리를 들었다.
무더위의 시작을 알리는 매미소리, 초복과 동시에 등장해서 더운 느낌을 50%는 증가시키는 소리다.

책상 위에 잠시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던 책을 보고 아빠는 '개의 거짓말', 동생은 '100개의 거짓말'이라고 보았대나. 어찌됐든 누구의 것인가 혹은 갯수가 중요한 것은 아닌, 이 책이 거짓말에 관한 것임은 밝혔으니 그닥 큰 문제는 없을 듯 하다.

내겐 좀 생소한 아랍 작가의 소설이다. 여행길에서 만난 아랍인들이 이렇게 풍성한 이야기 보따리를 지니고 있었던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말이라도 좀 걸어볼 걸 그랬다.

어쩐지 에코의 '바우돌리노'가 생각나기도 하고,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이 생각나기도 하며, 오스터의 '공중곡예사(혹은 미스터 버티고)'가 생각나기도 한다.

복잡하고 수많은 인척관계, 그들의 이야기를 서커스단의 동물들과 접목시켜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사딕,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지만 그 이면엔 뼈를 깎는 고통과 연습을 견뎌야 하는 단원들. 사딕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게 되지만, 웃음 뒤에 숨어있는 그들의 사연 하나하나는 이 책의 모든 등장인물을 삐에로로 만들어준다.
중학교 때 한 친구가 삐에로의 이중성에 대해 제법 어른 스런 얘기를 해 준게 기억난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고 있지만 슬픔이 승화되지 않은 광대짓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웃음을 줄 수 없다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삐에로를 보는 일이 그렇게 자주 있진 않았지만, 그때부터 어쩐지 삐에로는 내게 늘 슬퍼보이기만 하는 존재다.
삐에로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슬픔을 숨기고 웃음을 내어보이는 것처럼, 사딕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가 반드시 전부 사실이 아닌 것처럼 세상엔 좋은 거짓말도 있다. 


'아라비아 사막에서의 삶은 늘 험난했다. 거짓말을 안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이라도 해야 그나마 그 거친 황무지에서 웃고 꿈꿀 수 있었다.'

-p.434

이제 사딕의 '거짓말'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의 거짓말은 웃고 꿈꾸게 하는 거짓말이다. 현실의 냉철함만으로는 견뎌낼 수 없는 메마른 삶에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거짓말이다. 사딕의 이야기가 재밌긴 한데  왠지 마음놓고 웃을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진실보다 더 진실다운 아이러니한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최근 읽은 책 중에 가장 다각적인 느낌을 주는 책인 것 같다. 웃는 동시에 울게 만들며, 교훈을 주는 동시에 재미를 주는. 이 책을 선물해준 친구만큼이나 지혜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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