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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평점 :
생일 선물로 받은 문화상품권을 가지고 무슨 책을 살까 들뜬 마음에 책들이 잔뜩 쌓인 서가를 한참 헤매고 다녔다.
코엘료의 책은 약간의 환각성분이 있어서 책을 펼치기 전 늘 경계하게 된다.
'전혀 살 생각은 없어, 그냥 보기만 하는거야.'
다짐을 하고 첫장을 펼쳤다. 물론 책 날개에는 키퍼 서덜랜드를 닮은 그의 뜬금없는 눈빛이 독자를 부른다. 그리고 다음 두 장엔 11분이라는 책 제목이 있다. 그런데 그 다음장과 그 다음장이 문제였다.
『죄없이 잉태하신 동정녀 마리아여,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아멘.』
최근 마리아에 대한 사랑에 흠뻑 빠져있는 한 친구가 떠올랐다.
『...나는 기적의 샘물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의 루르드에 갔다.』
그리고 그 다음장엔 그 친구가 최근 다녀온 루르드에 작가가 갔었던 일화가 담겨있었다.
어떤 내용인가 짐작케 해주는 소개글을 읽기는 커녕, 이 책의 퉁명스런 제목 '11분'이 도대체 무엇에 소요되는 시간인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조차 해보지 않은 채 두 줄의 짤막한 기도문과 루르드라는 지명 때문에 '덥썩' 책을 사버리곤, 짧은 순간 오르가슴을 맛보게 해 준 섹스처럼 단숨에 읽어버렸다.
코엘료 소설엔 그의 소설을 몇 권쯤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아주 단순한 도식이 있다.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한 인간(대개는 여자)이 있고, 과거에는 그 존재와 하나였다가 어떤 연유로 분리되었을 법한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그 두 존재가 서로를 찾고, 북돋워주어 결합하는 방식은 물론 '사랑'이다. 사랑에 대해 신적인 전능함을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존재는 아직 발견 중에 있는 존재를 도와 그 도정을 단락짓고, 그와 동시에 그 존재는 정체성을 완벽하게 확립한다.
그런데 소설속의 그 두 존재는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너무나 완벽하게 서로의 영혼을 알고, 이 책에서는 이제 서로의 육체까지 완벽히 알게 된다. 물론 사랑하는 대상과, 자신과 또 사랑 그 자체로부터 궁극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 속에서 무소유의 사랑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코엘료는 나처럼 메마르고 '현실' 운운하는 소심한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이런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이래도 되는 거야, 그걸 자유라 생각해도 되는 거야, 정말?'
읽는 내내 여전히 이런 소심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솔직히 마리아가 살짝 부러웠던 것을 고백해야겠다. 부러움의 대상은 그녀의 풍부함이 아니라 '용기와 솔직함'이다.
엄마에게 이 책을 보여준다면, 엄만 나보다 마리아를 받아들이는데 더 많은 시간이 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전히 매춘과 성은 범죄라는 어두운 측면과 연결되어 있으니 말이다. 마리아는 '초심자의 운으로' 코파카바나에서 돈도 벌고 사랑도 찾지만, 뭇여성들이 매춘굴(?)을 이상실현의 장소로 삼기엔 너무나 많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슬픈 현실이 여전히 존재한다.
최근의 다빈치 코드에서 힌트를 얻어, 다빈치, 빅토르 위고 등과 함께 파울료 코엘료를 Priory of Zion의 반열에 올려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시스 찬가와 오르가슴의 순간에 신을 만난다는 밀교의식과의 유사성도 그러하고, 여성 자신도 모를 많은 비밀들을 술술 풀어내는 해박함에 있어서도 여성 숭배사상이 엿보인다.
한편 책마다 빠지지 않는 복음서의 인용과 마리아의 등장이 그의 종교적 입장을 반영해 주면서도 왠지 뉴에이지의 냄새가 나는 건 또 무슨 반항심인지.
헐리우드 냄새가 짙게 풍기는 결말에선 그러길 바라지 않았으면서도, 어느 책에서도 어느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가막힌 결말을 선사해주길 바랬으면서도 행복했다. 코엘료는 사람들의 이런 모순적 기대감을 간파하고, 어떻게 하든 욕을 먹는다면 차라리 해피엔드를 택하자 했을 것이다.
내게 진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감당하기 힘들었을 여러 사건을 경험하게 해 주는 작가들에게 감사하며, 관음증 = 남의 삶 엿보기 = 독서라는 등식에 너무 빠져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마리아와 랄프에게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감동적인 한 장면을 인용하며 마칠까 한다.
"날 축복해주오."
그가 말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를 축복해주었다.
나는 내게도 축복을 내려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그가 말했다.
"내가 많이 사랑한 이 여자에게 축복을."
그의 말은 아름다웠다.
Paulo Coelho, Onze minutes, p.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