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면 반칙이다 - 나보다 더 외로운 나에게
류근 지음 / 해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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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의 새로운 알림 글이 오면 아주 가끔씩 들여다보는데, 정치하는 친구를 가장 먼저, 그다음에 류근 시인의 페이지에서 한두 꼭지씩 글을 읽는다. 페이지를 들여다보는 정도다. 신간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구매해 읽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을 할까.


 

전에 읽었던 산문과는 달랐다. 류근 시인 글 같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까. 유연해진 글들, 어린 시절 특히 어머니에 대한 일화가 많았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들.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 때, 어머니가 건넨 한마디에 위로받던 시절의 일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주무시라고 촛불을 켜고 책을 읽다가 불이 났던 때에도 아들의 안부를 먼저 묻던 어머니를 기억하는 시인에게서 그리움을 엿본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문장들이 마음에 들어와 박힌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느끼는 공감일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신간이 나올 때마다 찾아 읽는 것일 수도 있다.


 

배낭의 무게가 줄어들고 걸음의 속도가 늦춰지면서 비로소 나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줄어들고 늦춰지는 만큼 여행은 나를 받아들였다. 얼마나 불필요한 것들을 믿으며 살아왔는지, 얼마나 과잉한 것들에 의지하면서 살아왔는지 깨닫는 여정이었다. 나는 점점 더 남에게 주거나 버리는 데 익숙해졌다. 행색이 거지꼴에 가까워질수록 내 표정은 맑아졌다. 가난이 주는 평화와 기쁨. (84페이지)

 


25년 전 인도, 배낭 속에 소주 한 박스, 라면 한 박스를 채우고 이등병의 속도로 걸었던 처음과 달리 짐의 무게가 가벼워질수록 비로소 여행다운 여행이 시작되었던 것을 말하는 부분이다. 우리의 현재는 어떠한가. 좀처럼 짐을 내려놓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바로 앞에 중요한 것이 있는 것처럼, 앞을 향해 달린다. 짐의 무게에 짓눌려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바쁜 연말, 출퇴근 시간에 꺼내어 조금씩 읽었던 책인데 금세 읽었다. 20181월부터 4년 여 동안 페이스북에서 사랑받았던 글 중 130여 편을 엄선하여 28컷의 일러스트와 함께 펴낸 산문집이다. 산문집에서 우리는 들비와 함께 산책하거나 아픈 들비를 돌보는 시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다. 따뜻함이 배어있는 깊이 있는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별로 친하지 않았던 저자의 아버지가 생각나는 비 내리는 날의 풍경은 어쩐지 애잔하다. 나이가 들어서야 아버지의 외로움을 깨닫는 일. 비를 바라보며 들비와 함께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라면을 끓이는 저자를 그려본다.


 

혼자서 술을 마시면 푸른 술잔에도 있고, 내 손등 위에도 있고, 창밖의 고단한 빗방울에도 있고, 늙은 가수의 목소리에도 있고, 발등에 툭 떨어진 눈물에도 있고, 천천히 오는 가을과 겨울에도 있네. 이름만 봐도 울고 싶어지는, 이름만 봐도 서둘러 정거장에 나아가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이름이 있다. 당신의 오래고 먼 이름이 있다. (139페이지)

 


외로움과 슬픔이 짙게 배어있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날것의 감정이 살아 있어 감정들에 침잠하게 된다. 위로와 공감의 언어에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시인의 깊은 사유는 오히려 우리를 위로해준다. 가벼움을 추구하는 듯하지만 그처럼 진지하기 그지없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다시, 류근의 문장들을 음미한다. 비속어가 있어도 개의치 않는다. 가벼운 농담 같다. 우리의 오늘을 시적인 문장으로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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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유품정리
가키야 미우 지음, 강성욱 옮김 / 문예춘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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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의 유품을 누가 정리했을까. 아마 여동생과 남동생, 아빠가 하셨을 거 같은데, 내게 엄마의 유품 하나 없어 서운했다. 병원 생활을 오래 하셔서 나이 든 사진은 없고, 젊었을 적 사진이나마 휴대폰에 남겨 보고 싶을 때 꺼내 보는 정도다. 어느 날은 몹시도 엄마가 보고 싶어 운 적도 있다.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사셨을까, 엄마의 삶을 생각해본 적도 있다. 우리와는 다른, 힘겨운 삶을 살았을 엄마를 그리워한다.

 


모토코는 시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유품정리 비용을 아끼려 시어머니가 살던 곳으로 왔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도 있듯 고가의 물품은 없이 집안 가득 쌓인 시어머니의 물건과 가구를 보니 아득했다. 시어머니가 마치 옆에라도 있는 듯, 살아계셨을 적에 좀 치우지 그러셨냐는 혼잣말하며 정리하기 시작한다. 외동아들인 남편은 일이 늦게 끝나 올 수 없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모토코가 시간이 날 때마다 와야 한다. 도쿄를 가로질러 1시간 반이나 걸리는 시어머니의 집은 버릴 물건이 가득하다. 반면 돌아가신 친어머니는 얼마나 깔끔하고 단정하셨는지 여러모로 비교가 된다. 암에 걸려 돌아가실 때도 수술도 받지 않고 신변 정리를 하셨던 분이다.

 


시어머니와는 사이가 좋았다고 볼 수는 없다. 모토코는 친구 후유미의 권유와 업체에 맡기라며 찾아온 여성을 보낸 후, 추억이 담긴 물건은 남편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직접 정리하고 싶었다. 집안에는 몇 년 치에 달하는 신문지, 시아버지의 양복과 시어머니의 옷이 가득 있었다. 인형 장식장에는 조개껍데기로 만든 물건 등이 있었고, 시아버지의 몇십 년간의 월급봉투도 있었다. 알록달록한 꽃무늬가 그려진 손수건, 가방 등 절약하지 않고 쓴 시어머니에게 원망 가득한 마음도 들었다.




 


시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고 있는데 자치회 부회장 단노 씨가 찾아와 도와주겠다고 한다. 무거운 신문지 등은 남성 자치회 멤버를 불러 아래층으로 내려보내고 키와 체구가 작은 단노 씨가 직접 물건을 나른다. 시어머니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단노 씨의 말을 들으며 몰랐던 시어머니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된다.

 


평소 성격대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친어머니에 비해 시어머니는 얼마나 인간적인가. 단 음식을 좋아하고, 촌스러운 꽃무늬의 옷을 즐겨 입은 시어머니는 곤란에 처한 이웃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시어머니를 깔보았던 모토코는 시어머니의 다정한 마음을 엿보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이웃집의 아이를 생각한다. 마음이 쓰였지만, 유괴 등의 말을 듣기 싫어 혼자 있는 아이를 모른 척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아마 결혼 전 직장을 다닐 때였던 것 같은데, 퇴근 후 집에 가면 초등학교 1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와 있곤 했다. 아빠와 둘이 사는 애였는데 엄마는 그 아이가 안쓰러워 집에 데리고 와 밥도 먹이고 돌봐 주었다. 아마 1년여 동안 계속되었던 거 같다.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의 일도 떠오른다. 퇴근 후 집에 갔더니 큰 딸아이가 어린 남자애를 데려와 아들과 셋이 놀고 있었다. 아빠와 둘이 사는 아이로 혼자 놀고 있자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아빠가 돌아올 때쯤 돌려보냈었다. 마치 데자뷔처럼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일기장을 발견하고 시어머니의 마음을 엿보았듯, 부모님과의 추억이 묻어있는 주택이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친어머니의 일기장을 보며 모토코는 성격이나 행동은 달랐지만 친어머니의 마음을 깨닫는다. 추억이 깃든 물건 등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와 생을 즐기며 살았던 시어머니의 다름과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남긴 물건을 일일이 손으로 직접 확인한 일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시어머니의 방에 있던 수많은 유품은 시어머니의 인생을 응축시켜 보여주었다. (292페이지)

 


어떤 삶이 더 좋았다고 말할 수 없다.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정을 배제하고 절제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 나이 오십이 넘으면 정리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너무 많은 물건을 가지고 살지는 않은 지 돌아볼 일이다. 아이들과의 추억이 깃들어 있다고 하여 다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실물로 남길 수 없는 건 사진으로 담아도 된다. 좋아하는 물건이어도 정리하며 단순하게 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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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2-12-26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들이 연세가 드니 언제든 떠나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시골의 낡은 집에 앉아서 이 집을 정리하려면 비용이 얼마나 들까, 미리 정리 좀 할 수 없나, 그런 생각을 했더랬어요. 저 자신도 돌아보게 되더군요. 될 수 있으면 물건을 많이 두지 말자. 언제 떠나도 뒤가 깔끔한 사람이 되자. 끌리는 소설이네요. 읽어봐야겠습니다. 브리즈님 건강하고 행복한 한 주 보내세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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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간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오늘을 살지만, 곧 흘러가 버릴 세계, 과거의 한순간이 될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모든 게 미래를 위해 산다고 할 수 있을까.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에 갇혀 무리한 결정을 해야 할 때 그 앞에서 망설이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어떠한 계기로 새로운 시간을 설계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가 건네는 한 마디가 삶의 희망을 줄 수도 있는 법이다.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소설가는 대학 시절 지민과 함께 외삼촌이 일하던 출판사를 찾았다. 자살한 지민의 엄마가 쓴 오래전에 절판된 소설을 찾고자 했다. 미래가 현재를 바꾸는 순간, 평범한 현재를 사는 것처럼 우리의 미래 또한 거창하지 않은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알게 한다.




 


언어는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 뜻이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야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야기의 형식은 언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 역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 이렇듯 인간이 정체성은 허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규정하는 것도 언어이므로 허상은 더욱 강화된다. 말로는 골백번을 더 깨달았어도 우리 인생이 이다지도 괴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19페이지, 이토록 평범한 미래중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소설가 혹은 배우, 범죄심리학자. 저마다 과거의 기억을 안고 있는 인물들이다.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의 한순간을 기억하고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는 인물들이다. 그러고 보면 여덟 편의 소설은 과거의 기록, 시간의 기록인 것 같다. 과거에 사랑했던 연인을 우연히 만나 그 시간을 반추하고, 애써 지우려 했던 인물들조차 어떤 인연으로든 찾아드는 기록인 것이다.


 

남해의 한 섬의 중학교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섬에 도착한 정현은 대학 때 문학 동아리를 함께 했던 손유미 씨, 즉 은정이를 다시 만난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라는 소설이다. 손유미가 쓴 소설을 보여주는데 조선시대 명문가에서 태어난 정난주의 이야기였다. 관아의 노비가 될 처지였던 난주가 아들을 살리려 바다에 빠지려고 했던 내용이었다. 하나의 삶이 끝나고 두 번째 삶이 시작되었듯 손유미 또한 아이를 잃고 남해의 한 섬에서 두 번째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마치 세컨드 윈드처럼, 거침없이 부는 바람을 향해 나아갔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세상을 거울이라고 생각해왔다. 자신의 내면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도 어딘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믿음에 가까웠지만, 그는 늘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모습을 통해 지금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점검하곤 했다. 거리의 풍경을 면밀히 살펴보거나 들리는 소리에 자세히 귀를 기울이는 건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44페이지, 난주의 바다 앞에서중에서)

 


소설 속 배경은 남쪽 바다 그리고 제주의 바다였다. 세월호 침몰이 일어났던 그 배를 타고 제주를 건넜던 자의 깊은 고민, 세찬 바람이 두렵지만 건너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현재. 마치 삶의 한 모습인 것 같다.

 


아버지를 살해했을지도 모르는 유진주의 심리를 담당했던 범죄심리학자에게 메일이 온다. 정황상 치매 아버지를 간병했던 딸이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를 살해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던 방송을 보고서 말이다. 자신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진주의 메일이었다. 범죄심리학자라고 해도 살인자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건의 정황, 증거 등을 보고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진주의 결말은 그렇게 타인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글을 써대는 저를 보고는 이상한 애야, 라고 간단하게 이해해버렸겠지요. (85페이지, 진주의 결말중에서)

 


누군가의 노래 하나가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자살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카페에 들어섰을 때 들리는 노래가 다시 살고자 하는 용기를 주었다. 노래를 부르고 메모를 쓴 가수를 오랫동안 찾았고, 그 사연을 말하는 사람을 통해 감동의 전이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에서 울림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읽어 좋았다. 소설이 주는 즐거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삶에 대한 대리만족이랄까. 단편소설임에도 마치 한 편의 긴 이야기로 압축되는 듯했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거쳐 미래의 시간을 머무는 우리. 시간은 이토록 혼재하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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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1-06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3-01-07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eeze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아무튼, 잠 - 이보다 더 확실한 행복은 없다 아무튼 시리즈 53
정희재 지음 / 제철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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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여덟 시간은 자야 하는 사람이다. 밤 열한 시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난다. 잠에 관하여 가장 동의할 수 없었던 게 네다섯 시간만 자도 충분하다는 거였다. 체질상 일고여덟 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일주일 내내 병든 닭처럼 힘없이 지낸다. 눈 밑이 거뭇거뭇하고 볼이 패는 현상은 당연하다. 잠이 많다는 게 조금은 부끄러웠다. 게을러서 혹은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게 싫었다. 이제는 안다. 적게 자도 충분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일고여덟 시간은 자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이라는 주제의 아무튼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누구보다 달게 자는 사람으로서 꼭 읽어 봐야 할 책 같았다. 정희재 작가가 처음이지만 잠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책을 최근에 읽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잠이 이토록 중요하게 될 줄이야. 잠은 기억력을 높이는 동시에 우리가 느끼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에서 자유로워진다. 비로소 편안한 감정, 안식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비록 내일 해야 할 일 중 마음에 걸리는 게 있더라도 그건 내일의 일인 것이다. 밤새 꿈속에서 처리하지 못한 일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깨어있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말이다.




 


텅 빈 학교는 조용했다. 그 큰 건물에서 홀로 잠들면서 무섭다기보다는 서러워서 눈물을 훌쩍였다. 어른의 세계란 더럽고 치사하다는 생각, 가난이란 상상 이상으로 불편한 것임을 온몸으로 실감하던 밤. 타들어가는 쑥색 모기향의 따가운 냄새에 재채기가 쏟아졌다. 문자 그대로 갈 곳이 없다는 실향 의식을 사탕 녹여 먹듯 음미하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그대로 아침까지 푹 잤다. 역시 잠 덕후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내 인생의 첫 도둑잠은 그렇게 완성됐다. (52페이지)


 

낯선 장소에서 잘 자지 못한다. 여행을 좋아하면서도 선잠을 자는 바람에 늘 피곤하다. 그럼에도 여행을 포기할 수 없어 외국에 갈 때는 수면유도제를 사 가기도 한다. 먹어도 잠이 오지 않아 눈만 감고 있는 때가 여러 번이었다. 꽤 오래전, 토요일에도 근무할 적에 친구가 운영하는 학원에 갔다가 피아노 치는 아이들 틈에서 꿀잠에 빠져든 적이 있었다. 피아노 소리가 꼭 자장가처럼 들렸었다. 갈 곳을 잃은 소녀(작가)의 도둑잠. 전혀 잠들 상황이 아닌데도 까무룩 잠에 빠져드는 순간처럼 말이다.

 


어릴 적의 나는 여덟 시 반에 하는 드라마를 못 봤다. 기필코 눈을 뜨고 있으려고 했음에도 눈을 떠보면 아침이었다. 대학 기숙사의 방, 신생아실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잠에 빠져 있기도 했고, 30분만 자자고 누웠던 게 24시간을 내리 자느라 친구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작가의 일화는 잠 덕후답다. 잠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한 덕분에 작가처럼 24시간을 내리 잔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규칙적인 생활을 오래 해 온 까닭이다.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특히 계절상 겨울에는 이불 밖으로 나오기 싫어 미적거리다가 지각할 뻔한 적도 많았다. 눈이 많이 내려 추운 겨울 아침.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외치면서도 제시간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한다.





 

수면계의 홀든 콜필드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를 빼고 누군가 잠의 열락에 빠진 사람에게 부채를 부쳐준 적이 있었던가. 홀든 콜필드는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으로 호밀밭에서 노는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낭떠러지 가장자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했던 인물이다. 많은 사람에게 오래도록 회자되는 작품으로 숙면에 이르도록 돕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이 배어 있었다. 작가가 말하는 잠 파수꾼의 역할은 휴대폰 무음으로 해두기,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내려 어둡게 하기 등이다. 침실을 어둡게 했을 때 숙면을 취할 수 있다. 암막 커튼을 고르고, 안대를 사용하기도 한다.


 

죽음을 영면이라고 표현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잠을 못 자면 굉장히 힘들어한다. 잠에 필요한 도구를 이용하고 늦은 밤이면 카페인 섭취를 줄이는 등 잠에 유익한 차를 마시기도 한다. 죽으면 영원히 잘 수 있는데 우리는 왜 잠에 그토록 예민할까. 숙면을 도와주는 잠 파수꾼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가 불안해하는 모든 감정들을 잠의 뒤편으로 보낼 수 있다. 그걸 알기에 우리는 오늘도 편안한 잠을 자고자 한다. 하품하며 침대로 향한다. 내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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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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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과 함께하는 중세의 죽음의 춤을 추는 그림을 보자. 해골은 아이 틈에서 손짓하듯 춤을 춘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 곁에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손짓하자 아이는 죽음에게 향한다. 새 생명과 죽음이라, 전혀 상관없는 관계 같지만, 죽음이라는 건 순서가 없다. 누구에게든 갈 수 있고 어느 때고 다가갈 수 있다. 아무도 모른다. 어린아이라고 하여 일찍 가지 않는다고 보장하지 못한다.


 

삶과 죽음은 한 끗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의 희열이 더 생기는 법일까. 삶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건 분명하다. 내 존재가 사라지는 죽음. 타인이나 가족이 나를 기억하고 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기에 삶이 더 소중하지 않은가 말이다. 삶의 유한성 때문에 최선을 다하여 오늘을 살아간다.




 


인생의 허무라는 말에 꽂혀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묵직한 내용의 글이었다. 허무를 바라보는 방법, 사상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삶의 통찰을 엿볼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무거운 질문과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직장 생활에 지친 사람은 여유로운 삶을 꿈꾼다. 저자는 지나친 여가는 공허하고 무료하게 만드는 법이다, 일을 즐길 수 있어야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둘 것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책 속에는 전시장 벽면 가득히 헌 옷들을 걸어 만든 볼탕스키의 설치 작품이 나온다. 삶의 유희를 설명하는 작품이다. 문득 어떤 작가가 올리는 버려진 작품에 대한 사진이 떠올랐다. 목에 두르고 다니는 머플러, 장갑 등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버려진 물건 들이었다. 한때는 소중했으나 버려진 물건들은 더 이상 쓰임새를 갖지 못한다. 마치 우리의 삶처럼.

 




유유자적한 삶을 바랐다. 시골에서 밭을 가꾸고 정원 삼아 사는 것도 바쁜 생활 속에 잠시 취해야 즐거운 법, 시간이 계속된다면 지루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일상의 지겨움을 피하기 위해 여행을 다니고 새로운 일에 매달리게 된다. 현재의 일상을 사랑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지나친 여가는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더불어 노동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바꾸는 것이 구원이다라고 했다.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이다. 일을 하므로써 무료함을 없애고 삶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얻는 것 같다.


 

사상사 연구자인 저자는 고전 시의 문학성, 그림의 예술성이 함께 어우러져 밋밋할 수 있는 부분을 채웠다. 그림을 보며 삶의 허무를, 죽음과 삶의 연관성을 느끼게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최근에 읽은 리사 제노바의 기억의 뇌과학의 결론과도 일맥상통한다. 모든 게 마음가짐에 달렸다. 책의 뒤편에 소식의 적벽부가 수록되어 인생의 허무를 논하게 한다. 차고 기우는 것을 반복하지만 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듯한 물과 달을 보며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는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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