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의 인사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8
김서령 지음 / 폴앤니나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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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민원 부서에 근무할 때 자주 찾아오던 젊은 남자가 있었다. 찾아오기도 했고, 음반을 선물한다며 들고 온 적도 있었다.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직원들이 너를 좋아하나 보다. 잘해봐라이런 소리를 할 때 불편했었다. 특별한 일 없어 다행이었지, 만약 수정처럼 자꾸만 고백하고 찾아왔다면 굉장히 힘들었으리라.


 

한주은행 연정시장지점 한수정 대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수정이 연정시장지점으로 오게 된 이유는 박은영 과장 때문이었다. 신입사원 연수 때 박 과장의 강연을 듣고 자신의 커리어를 향해 나아가는 과장님처럼 되고 싶었다. 수정을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매일 오후 3시면 짝퉁 루이뷔통 가방에 현금을 가득 담고 금목걸이와 금반지를 번쩍이며 사랑 고백을 해왔다. 자주 오던 고객이어서 수정은 제대로 된 거절을 하지 못했다. 그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미소가 화근이었을까. 제대로 된 거절이 잘못이었을까. 사람들은 왜 상대방의 감정에 무딘 것인지, 자기만의 감정이 다인 줄 아는 건지 모를 일이다. 좋은 이별이란 게 있을 수 없겠지만 딸을 키우는 사람으로서 이별을 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게 된다. 자기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보복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편으로 불안한 까닭이다.

 


혼잣말하듯 미친 새끼라고 했을 뿐인데 그걸 듣고 날개떡볶이집 사장 철규는 수정에게 망치를 휘둘러 죽였다. ‘한 대리님을 사랑한 거 말고 제가 잘못한 일이 뭐가 있어요?’라고 한 철규의 말에서 우리는 고백을 받아들이는 것과 그러지 않은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직업과 관련된 고객에게 제대로 거절의 말을 하기 어려워 미소를 지었을 뿐인데 남자는 자기를 좋아한다는 거로 받아들였나. 시장 사람들과 은행 직원들은 수정에게 그만 떡볶이집 사장의 마음을 받아들이라고 말해왔다. 그저 농담을 던지듯 하는 말이었다. 수정이 죽고 난 뒤 그 말들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를테면 수정이 미소를 지었던 건 좋아서 그런 거였고, 먼저 꼬리를 쳤다는 식으로 변질됐다.

 



 

 

사람을 죽였는데 살인죄가 아니고 상해치사로 징역 6년이었다. 피해자 측에서는 가해자가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해자 측에서는 청년의 순정이었다고 우긴다. 나는 수정 엄마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금쪽같은 새끼가 죽었는데 엄마에게는 남은 딸들이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다시 나와서 해코지하면 그게 더 무섭지 않겠나. 더 두려운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엄마는 자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힘든 시간을 보낸다. 자매들도 마찬가지다. 자다가 일어나서 누군가를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남은 사람들은 살아가야 한다. 동감하지 못하는 말이면서도 또한 동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제대로 작별하지 못한 가까운 사람에게 하는 수정의 인사다. 작별인사를 하지 못하고 떠난 자의 슬픔 혹은 울분이 느껴지는 내용이다. 두렵고 고통스러운 기억일 테지만 묵묵히 지켜보는 수정을 느끼게 한다.

 


어느 것이 맞다 단언할 수는 없겠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마련이므로. 그런데도 어떤 것이 옳은 일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더 옳은 일로 나가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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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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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내와 아이, 아버지마저 죽자 신에게 반항하기 위해 뒤로 걷는 자가 있다. 죽음이 주는 슬픔과 상실감, 신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은 사랑이며, 사랑은 곧 집이다. 퇴근 후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집을 잃은 것과 같다.


 

집을 잃은 세 남자가 있다. 1904년의 포르투갈 리스본의 고미술 박물관 학예사 토마스, 1938년의 부검 병리학자 에우제비우, 1981년의 캐나다 상원의원 피터가 그들이다. 세 남자는 아내를 잃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각자의 방법으로 견디는 중이다. 토마스는 율리시스의 일기장에서 읽은 십자고상의 본질을 확인하고자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에우제비우는 새해로 넘어가려는 순간 아내 마리아가 찾아와 함께 읽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 속에 숨은 복음에 관한 대화를 한다. 같은 이름의 다른 마리아가 찾아와 남편을 부검해 달라고 한다. 남편이 왜 죽었는지가 아닌 어떻게 살았는가, 그것이 궁금하다.

 


필립은 아내를 잃고, 아들마저 이혼하자 큰 슬픔을 느낀다. 우연히 방문한 유인원 연구소에서 침팬지를 보고 형언할 수 없는 교감을 한다. 거금을 치른 후 침팬지와 함께 살기 위해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슬픔을 견디는 각자의 이야기면서 하나의 이야기다. 죽음이 가져오는 슬픔은 달리 표현할 수 없다. 커다란 슬픔을 짊어지고 그 무게에 짓눌려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죽음을 거부하고 싶어 뒤로 걷는 자와 사랑하는 남편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부인, 남편의 몸이 자신의 집임을 깨닫는 과정과 그걸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다른 사람은 유인원에 의지해 안식을 얻게 된다. 토마스가 간절히 찾았던 십자고상에서 율리시스 신부가 느꼈던 신에 대한 사랑과 감동은 다시 신의 사랑을 느끼는 것과 같다.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253페이지)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토마스가 찾고자 했던 십자고상의 본질을 알게 되는 순간이 생긴다. 다른 어느 것과 바꿀 수 없는 신의 사랑을 느끼는 장면이기도 하다. 거부했던 신의 존재와 사랑,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맞이하고서야 마주하게 되는 감정은 우리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 그 본질을 깨닫는 과정과 같다. 구원의 길도 다르지 않다. 낮은 자들 중에서 가장 낮은 자들, 인간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신은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그 속한 것이 구원의 길이며 안식이었다.

 


믿음과 신의 존재, 삶과 죽음, 인간과 동물의 차이,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길에 서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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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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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을 소설로 아는 경우가 많다. 글 쓰는 작가들의 책임이 무거운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는 것. 소설 등 다른 형식으로 독자들이 읽게 하는 역할을 하는 이가 작가라고 본다. 작가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한강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여 그걸 문학으로 풀어낸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이어 제주 4.3사건에 대하여 말하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가족애에 관한 이야기다. 4.3사건으로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이 찾는 그 무엇은 상실과 애도의 시간이기도 하다. 지키지 못했던 거에 대한 애달픔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살아가면서 겨우 버틴다. 고통을 알기에 다른 이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길에 서기도 한다.


 


 

 

소설에서 눈은 여러 감정의 매개체다. 눈 속에 파묻혀 생사의 갈림길에 서기도 하며 녹아 없어지는 눈은 우리의 생과 사를 보는 듯하다. 슬픔으로 가득한 시간은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눈이 내려 쌓이고, 녹는 시간이 오래 걸리듯 우리의 마음도 비슷하다. 내리는 눈은 역사가 남긴 얼룩이다. 눈 속에 파묻혀 길을 잃고 교착상태에 빠진 것도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44~45페이지)

 


시간은 자꾸 과거로 돌아간다. 경하의 시선 속에서 진행되었던 꿈으로부터, 사진을 찍고 영상물을 만드는 인선에게로, 인선의 엄마가 애타게 찾았던 외삼촌의 생사와 기억으로 향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직접 겪지 않아도 전염되어 나타난다. 엄마가 이모와 함께 가족의 시체를 확인하러 다녔던 그 광경은 인선이 직접 겪은 것처럼 나타나 그를 괴롭힌다. 그가 영상을 제작하여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던 이유와 같다. 눈물로 얼룩진 엄마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 했고, 알리고 싶었다.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87페이지)

 


전체적으로 슬픔이 내재해 있다. 인선의 가족을 고통으로 몰고 갔다. 일하다 전기톱에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고 서울의 병원에서 접합수술을 한 것도, 신경을 죽이지 않기 위해 3분에 한 번씩 바늘로 찔러주는 장면은 마치 내 손가락이 찔린 듯 아프고 아팠다. 인선의 엄마와 아버지의 가족이 죽임을 당하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것을 보며 자라는 것 또한 슬픔을 넘어 격통에 가깝다.


 


 

 

제주4.3의 역사의 한 장소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 외에 남은 자들의 고통이 크게 느껴졌다. 등신대를 세워 사람들에게 알리는 효과도 크지만 이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나타나는 것이 우리를 그 시간에 있게 한다. 내가 인선이었다면, 내가 정심이었다면 어땠을까. 제주4.3사건을 일깨워 준 작가를 통해 우리나라가 가진 역사와 아픔을 생각해 보게 된다.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 고통의 근원을 파헤치며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촛불 하나에 의지해 기억 속으로 향하는 장소는 작별의 시간을 거치는 것과 같다. 눈이 쌓인 곳에서 길을 잃고, 촛불이 꺼져가는 그곳에서 함께 걷는 길은 어둠뿐인 우리의 삶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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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 에세이&
김현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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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읽는다는 건 그 사람의 생각을 느끼는 일.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을 아는 일. 결국 에세이는 그 사람을 아는 일이 아닐까 싶다. 에세이 보다는 소설을 읽어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읽게 되는 일. 마음의 허함을 달래는 일인 것.


 

김현 시인의 글을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다. 시면 더 좋겠고, 산문이어도 좋겠다 여겼다. 비로소 읽게 되면서 시인이 퍽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알겠다. 다정한 말, 다정한 행동, 다정한 생각들이 드러나는 글이었다. 다정한 언어를 쓰는 사람은 그 마음도 다정하리라. 그래서 제목도 이렇게 지었을까.


 


 

 

삶을 이루는 여러 구성 요소 중에 집은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최근엔 이러한 자기의 터전을 멀리 옮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는 집을 세놓고 정리하여 제주로 이주하는 사람들 중에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이 많은데 책 좀 읽는다는 사람은 부러워하지 않을까. 정작 당사자는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지만 그래도 희망 사항인 건 어쩔 수 없다.

 


시인이 친구의 제주 책방에서 일일 책방지기를 하며 느낀 것 중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는 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이라는 문장이 와닿는다. 많이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벌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행복한 거지 다른 데 있지 않다. 책방지기를 마친 후 친구와 술 한잔하고 책방 창업의 초기투자비용을 검색했다. 세부적인 사항을 검토해보며 이 또한 쉽지 않다는 걸 알지 않았을까.


 

오랜 시간 함께 걸어온 연인과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 더불어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이야기와 함께 어릴 적 이야기도 드러냈다. 나와 다르다 하여 배척하는 건 옳지 않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을 차별하고 배척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어느 순간 그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되었다. 마음먹은 대로 하지 않았을 때의 후회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작가로서 혹은 시인으로서 글 쓰는 것에 대한 마음이 빠질 수 없다.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기보다 쓰고 싶은 글이 많이 떠오른다고 말하는 작가에게서 마음 깊은 곳에서 수많은 생각을 품고 있을 그것들을 생각해 본다.

 


봄은 아직 멀리 있지만 봄에서는 달콤, 가벼운 탄산미가 느껴진다 하고, 진정한 술꾼들의 막걸리는 겨울. 입동 무렵에는 겨울 하나 봄 하나를 마셔야지 마음먹으며, 그리운 사람 몇을 떠올렸다. 그리운 사람이란 그리운 시절이고, 그리운 시절이란 그리운 옛날. 그리운 옛날에는 옛 방식으로 사람들과 어울렸다. (9페이지)

 


어느 곳에 가면 그 지역에서 나는 막걸리를 한 잔씩 해보는데 계절마다 다른 맛이 있다고 여기지 못했었다. 역시 시인은 이래서 다른가. 막걸리 마시는 방법에도 이처럼 계절별로 다르다는 점. 막걸리 예찬론마저도 시처럼 느껴지는 거. 시인의 언어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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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06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역마다 막걸리!좋지요. 왠지 당기네요 오늘. 우리에게 사계절이 있어 좋은 건 막걸리 마시기에도 해당되네요. 브리즈 님 리뷰도 음미하며. ^^
 
그날 저녁의 불편함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지음, 김지현(아밀)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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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의 아이가 그날 이후 코트를 벗지 못한다는 첫 문장에서부터 독자를 사로잡는다. 어떤 이유로 그러는지 선뜻 들어서지 못하겠다. 코트를 벗지 못하는 아이는 왜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인지 그 감정에 다가가는 일이 힘에 부쳤다.

 


열 살의 야스는 스케이트 대회에 나가는 맛히스 오빠가 호수 너무 강 건너편으로 갈 때 따라가고 싶었다. 더 크면 데려가 주겠다는 말로 타이르는 오빠가 미웠다. 크리스마스 음식으로 다른 집에서는 오리나 꿩, 칠면조로 음식을 만들지만 자기가 이름을 지어준 토끼를 먹겠다고 하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토끼를 데려가지 말라고 말이다.

 


야스에게 손 인사를 하며 나간 맛히스 오빠는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고작 열 살의 아이지만 오빠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그 날 입었던 코트를 벗지 않는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한결같다. 야스에게 코트는 자신을 감추는 것이었으며, 죽음과 고통을 이해하고, 자기만의 속죄의 의식이었다.


 


 

 

자식을 잃은 엄마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았으며 엄마와 아빠는 그날 이후 짝짓기를 하지 않는 듯하다. 최소한의 키스도 하지 않는 부모를 보며 두꺼비가 짝짓기에 성공하면 부모의 짝짓기도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맛히스 오빠가 살아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성적으로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감출 수밖에 없는 그들이었다.

 


개혁교회를 다니는 가족은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행하였다. 모든 것을 성경대로 하였으나 오빠가 죽자 모든 재앙의 첫 번째로 여기고 불안해한다. 마을에 구제역이 돌아 젖소들을 살처분하게 되며 이 가족은 점점 각자의 고통 속에 빠진다.

 


내 시선을 거꾸로 돌려서, 그러니까 쌍안경의 커다란 쪽 렌즈를 들여다봄으로써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것을 가까이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66페이지)

 


야스는 오빠가 죽은 뒤로 코트를 벗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변을 보지 못한다. 그 또한 죄의식의 한 행동인 것 같다. 야스에게 코트는 일종의 보호막이었다. 자기의 죄를 가려줄 보호막이자 안전고리였다. 보호막을 벗는 순간 자기의 존재가 사라질지도 몰랐다. 소중한 것들을 보관하고 그 감정을 감싸둔 장소로 여겼다. 아무도 가져가지 못하게, 혼자만 간직할 수 있게. 죽음의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야스에게는 죽음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자신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슬픔과 고통에 눈이 멀어 다른 아이가 자라는지 모르게 되고, 그 고통을 즐길지도 모른다. 죽은 아들의 부모뿐만 아니라 형제들도 그렇게 느낀다는 게 문제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겪을만한 모든 일과 감정들이 들어 있었다. 가족을 잃어도 사춘기 아이들은 자랄 것이며 성적인 충동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그럼에도 애써 감추려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생각한다는 거였다. 행복하지 않으려 했고, 고통 속에 침잠해야 용서를 구하는 일이라 여겼다. 다만 그 슬픔이, 고통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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