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류상태 지음 / 삼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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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의 늪에서 발 빼기

이 책의 저자는 목사였다. 그것도 예장 통합쪽의 목사로 활동했었고, 대광고등학교의 교목이었으며, 숱한 고등학생에게 종교과목을 가르쳤던, 그냥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한국사회의 목회자였다. 하지만, 강의석 사태를 분기점으로 하여서 그 틀에서 벗어난 '이단아'가 되었고, 현재의 시점에서 그는 교목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다. 그냥 한 사람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갖는 이가 되었다.

보통, 평신도들에 있어서 교회에 지쳐 나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고, 주위에 수두룩하다. 교회에 가서 누리고 싶었던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평안' 등의 정신적 안위였다면, 교회에 가서 그걸 도대체 찾을 수 없는 요즘이기에 그들은 교회를 나오고야 만다. 보통 이런 이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깊이 탐구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에서 부딪히는 현실과 괴리된 교회의 '몰상식'에 놀라거나 정서적 '황폐함'에 자괴감을 느끼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경우인 것이다.

다만, 이 책의 저자 류상태의 경우에 놀라운 것은, 그는 주류기독교가 주는 관념에 대해서 타협이든 동의이든 간에 그 신학과 신앙의 방향성에 발을 맞춰가던 사람이었고, 어쩌면 그것들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주위 사람에게 '선생'으로써 가르치던 사람이었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보수적 한국 기독교 신학의 'Zealot' 역할 만을 했던 것은 아니고, 나름의 고민에 비추어 가면서 그것들을 바라봤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것의 요소에는, 그가 언급했던 '예수 세미나' 그룹의 '역사적 예수' 논의가 있을 것이고, 한국의 민중신학 등의 요소가 있었을 것이다(내가 알게 된 김강기명도 약간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한국 기독교의 배타적 관점이 제공하는 '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왔고, '불거토피아'(http://cafe.daum.net/bgtopia) 등에서 지속적인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전에 읽었던 그의 책(http://blog.aladin.co.kr/hendrix/1713606) "당신들의 예수"에서 가장 센세이션했던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부분에 흠뻑 빠지고, 한국 기독교에 대한 가치관 하나를 잡을 수 있었는데, 먼저 쓰여진 이 책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같은 경우 그런 관점의 시작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는 어떤 점에서 예수를 배반했는가?

도대체 뭐가 문제인걸까? 이제는 더이상 한국의 기독교가 확장하지도 않는 형국이다. 오히려 천주교 같은 경우 신도의 수의 확장이 있지만, 더 이상 기독교(개신교)는 수의 확장도 오히려 (-)로 전환된 상태고, 사회 병리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어쩌다 그렇게 된건가?

이 책에는 그 병리적 현상들과 그 현상들에서 나타나는 뿌리 깊은 병패가 나타나있다.

근데, 자꾸 저자가 쉽게도 '기독교' 신앙, 신학 그 자체를 공격하는 이유는 뭘까? 사실, 기독교의 특정 부문에 대해서 공격하면 되는 것 아닌가?


   
 
 사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성장한 것이 아니라 살찐 것이었다. ... 체계적인 다이어트를 해서 살을 빼고 건강을 회복하지 않으면 심각한 질병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건강을 되찾아 우리 사회로부터 존경을 회복하는 길은 없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이 너무도 멀고 험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며 뼈를 깎는 자성의 노력이 없이는 한국 교회가 살 길은 요원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반성과 개혁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며, 정통 교리로 인정하고 따라온 모든 신학적인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해 보고 예수가 전한 복음의 원형, 즉 예수의 삶과 정신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pp.80-81)
 
   

즉, 한국 교회의 병패의 이면에는 한국에서의 특수한 '신학적 문제'들의 근본적 해결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한국 교회의 배타성, 세속화 및 물신화, 역사성 결여, 가부장적 권위주의, 성서 문자주의(축자무오설), 종말론적 환상주의 등의 병패를 지적한다.

그리고 그 병패의 중심에 기실은 평신도들보다 목회자들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데올로그화 된 목회자 집단.. 그들은 '예수의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가르치고 선포하며, 대속신앙에 의거 지속적인 인간의 '죄'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모든 승리를 얻는 다는 식의 협박을 지속한다. 그들의 정화를 바랬기에, 그 권력 구조에서 류상태는 갖고 있던 지위를 바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책을 읽던 도중, 강의석 사건에 대한 일지가 나온다. 상식적인 선에서의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라는 것이 학교라는 '억압 기제'에서 얼마나 무력한지에 대해서 배운다.

부흥회에서 나오는 '성령의 불'이 우리를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 지에 대한 그의 말들이 귓가에 맴돈다.


   
 
 사흘 동안의 집회가 끝나자 회원들의 얼굴은 천사같이 변했다.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 천진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3일간의 체험'을 통해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당했으며, 거의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제 그들이 교회에 가면 새로운 움직임이 일 것이다. 그들이 속한 교회 한가운데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그들은 성령의 불덩이가 되어 다른 교인들의 심령에도 불을 지를 것이며,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될 것이었다. 집회에 참석한 회원들은 그렇게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소중한 이성과 분별력을 교회에 갖다 바쳤다(p.20).
 
   

개개인의 '의심하는 신학'에 대한 강조도 되새길만 하다.


   
 
한국 교회 목사여! 성도들에게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스스로 어리석고 분별력 없는 바보가 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목사와 장로들이여! 예수를 제대로 믿고 전하고 싶다면, 당신들이 하느님 편에 서 있는지 하느님을 등지고 서 있는 지 의심하며 돌아보라. 그리고 성도에게 자유롭게 의심하고 말할 수 있도록 하라. 교회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면, 당신들뿐 아니라 성도도 쉽게 중병에 전염될 것이다.
 바른 목회자, 바른 장로, 바른 신앙인이 되고 싶으면 의심하라. 한국 교회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서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pp.39-40).
 
   

 
그 외에도 성서에 대한 기존 해석들에 대한 비평등도 있는데, 기실 이 것들의 그의 강조따라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사실 신학자들은 대충 알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안팔릴 까봐 잘 '설교' 시간에 말하지 않고, 감추는 것들에 불과하다.
 
'생동감 있는 신학'을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깨어진 사고와 끝없는 의심 그를 통한 성장이 필요할 테고, 그것들이 해결되면서 참 '신앙'을 이야기할 수 있을 거고, 그 때쯤에서야 한국사회에서도 '예수'에 대해서 툭터놓고 더 도그마 없는 열린 대화와 영성에 대한 교류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류상태의 글은 이런 '문제제기'로 훌륭하다.
 
다만, 대안적 공동체에 대해서 '새길교회' 같은 '예수 클럽' 형의 모델을 보여주지만, '안티테제'를 크게 못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 좀 아쉽다. '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온라인을 벗어나서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게도 연장되야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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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신학의 미소 - 동시대인 총서 11
김진호 지음 / 삼인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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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꼬뮤날레 1회로 기억이 된다, 들뢰즈와 관련된 논의들을 가지고 예수를 읽어내는, 신학을 읽어내는 일군의 학자들이 토론을 시작했고, 마지막에 김진호라는 목사가 한마디 한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왜 아직도 목사의 직함을 달고 있는 걸까요?" 서로 너털거리는 웃음을 지으면서 끝났지만, 어쨌거나 잠시 정적.

그리고 나서, 그들이 주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라는 곳에서 민중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동안 그 홈페이지를 기웃거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에도 이야기했듯이(http://blog.aladin.co.kr/hendrix/1848274) 민중신학에 대해서 관심만 갖고 아무런 읽는 노력을 해보지 않았던 나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리도 만무했고(지금도 일천한 데 말이다.), 역시 열심히 게시물을 열람하지 않았다.

<반신학의 미소>를 산건, 2007년 8월 5일인데, 사게 된 것도 한동안 갖고 싶어했지만, 크게 우선순위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참 망설이다가, 류상태의 <당신들의 예수>를 읽다보니 우선 순위가 앞으로 오게되었다(http://blog.aladin.co.kr/hendrix/1713606). 하지만 당시에 읽기에 너무 난해해서 덮고 있다가, 요즘에 벼른 김에 읽어버리자는 마음으로 한 번 주욱 읽었다.

이 책은 삼인의 '동시대인 총서'의 다른 책들 구성과 같이 논문들의 모음이고, 따라서 논문들의 주제도 다양하고, 한군데로 딱 모아진다고 말할 수 없다. 저자도 인정하는 바다. 다만 저자의 말처럼 '반신학의 구상'을 하는 차원에서 그나마 이야기의 선이 모아진다고 주장한다.

1,2 장의 내용은 사실 별로 와닿지 않았고, 분석적인 사회과학 논문식으로 쓰여진 3장 "교회의 위기와 반신학" 부분이 나에게 가장 쓸모가 있었다.

'민중신학'을 도대체 왜 하는가? 그에 대한 그의 대답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교회라는 제도적 실재를 반그리스도적인 것이라고 규범적인 비판을 가하는 것과,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현실태로서의 교회의 유의미성을 부정하지 않는 것 사이에 모순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원리적인 규범성과 그것의 현실적인 실행은 종종 상보적인 실천의 패러독스를 담고 있다(p.235).

 
   

그리고 그가 민족주의라는 것의 황폐함을 알고 있고, 젠더의 문제가 단순한 차이의 인정의 문제가 아니라 푸코식의 미시권력-훈육질서 와 관련되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 굉장히 놀라웠다. 실은 내가 바라보는 신학자에 대한 편견일 수 있겠다. 또한 민중의 구상에 있어서 '민족'처럼 '상상속의 공동체'가 아닌 그것을 다시금 어떻게 구성해 낼 것인가의 문제를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7년이 지난 저작이지만 굉장히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의 구상에서 역동적인 '니체적' 활력이 느껴지는 것이었고, '생동' '생명' 그 자체의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또한 요즘 한참 읽었던 '예수 세미나'(역사적 예수 연구) 동향에 대한 논평도 굉장히 세련되고 그것의 '실천적 함의'에 대해서 짚어내는 부분들이 내 공부의 '지도의 필요성'을 다시금 일깨워 줬다.

그의 <예수 르네상스>와 <예수 역사학>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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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으로 세계 읽기. 나를 처음 책에 빠뜨리게 했던, 진중권을 이제사 다시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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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당신의 추천도서는?

교회에 정착하다. 그것도 내가



나를 잘 아는 지인들은 놀라곤 한다. 요즘 내가 교회에 정착했고, 그곳의 모임에 한 주도 빼놓지 않고 나가고 있으며, '신앙' 따위엔 아무 관심도 없으리라 생각하는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고, 여러가지 핑계로서 삶의 자세를 바꾸고 있지 않지만, 어쨌든, 습관이라는 타성을 이기고 교회에 나가고 있다.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했다. "너 왜그래?"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를 떠올려 볼 수가 있다. 그 중 큰 축은 이 두가지일 것이다.

먼저, 교회에 대한 그들의 생각 때문일 터다. 예를 들면, 교회란 곳은 항상 경건할 것이라 예측되는 곳이고, 교회에 다니는 이들이란 '신앙심'이 두텁고, 나름대로 우리가 묵시적으로 합의하는 '도덕적 인간' 혹은 '윤리적 인간'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 교회가 주는 '구속복'을 입을 까 하는 생각에서일 테다. 이런 류의 주장은 주로 나와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 하는, 혹은 군대에서 맞딱 드리고 있는 이들에게서 나타난다.

또, 교회의 '사회적 이념좌표'와 내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있다. 사실 위의 주장과 그리 다르지 않은 주장인데, 조금 다른 층위의 문제기도 하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에 물들 지 않기'를 주장하는 것의 효과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강한 주장을 하는 것을 꺼리고(사실은 방조하고), 반대로 온건한 가치들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는, 기성 질서에 대해서 적대적이며, 언제나 비판적이다. 쉽게 말해, 교회라는 곳이 생각되기는 온건한 우파인데, 나는 아무리 떠올려봐도 레디컬한 좌파로 분류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시금 재차 이야기하지만, 놀라고 또 놀란다. 이제 사람들의 전망은 두가지가 다시금 되는데, 먼저 내가 교회를 금방 떠날 것이라는 생각과, 혹은 그 교회에 젖어 들어가서 바뀔 것이라는 전망. 전자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이고, 후자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나와 그나마 이야기해본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실은 이 두가지 부류의 사람들 모두, 굉장한 믿음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에 대한 규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규정'일 테고, 또 하나는 교회는 '변하지 않는' 집단이라는 사고이다.

하지만, 나는 위에서 언급한 두가지 판단 자체에 대해 반대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즉, 실천적으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사회적 실천의 층위에서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반대하고, 동시에 이론적으로 살펴볼 때에도 '온당한 진리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잘못된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항상, 회고와 반추만을 행하는 것의 근저에 내가 무력하다는 것의 반증이 함께하는데, 사실 2006년 이후, 그리고 앞으로 제대하기 전까지의 내 모습은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할 듯하다. 군인이라는 신분이 주는 제약이 생각보다 막강하고, 그것은 단순히 '안된'다는 소극적 통제가 아니라, 어느 층위에서 항상 수위를 고민하게 만드는 적극적인 통제의, 훈육의 차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이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권력은 항상 생산적이기에 그렇다.

 

 

잠깐 돌아왔지만, 여튼 내가 지금 지닐 수 있는 사유의 양식이라는 것이 '회고와 반추'에만 있다 하더라도 난 그것에 대해서 '회의'먹고 멈출 수는 없다. 그나마라도 하는 것이 내 '반성적 사유'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명제들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내가 대학생활 동안에 느꼈던 사회과학이 주었던 사유덕택일 것이다. 지난 번, 우석훈의 칼럼집에 대한 서평에서도 이야기 했었지만(http://blog.aladin.co.kr/hendrix/1744566) 내가 접했던 사회에서 나는 싸울 수밖에 없었고, 사회과학서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교회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전에 다니던 나의 모(母)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접했던 세상의 모습과 교회가 모사하는 세상의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할 내 자세에 대한 교회의 인도와 내 판단이 언제나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그나마 길이 있었는 지, 내 청소년기에 함께 했던 전도사가 주었던 길을 통해서 경동교회를 찾게 되었고, 그 후 '교회'라는 것 자체가 모사하는 사회의 상이라는 것도 교회에 따라서 다를 수 있고, '기독교'를 내 종교로 삼고, 주를 섬긴다는 것도 여러가지의 방법으로 가능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마찬가지로 내 삶의 자세 또한 그 전의 교회에서 제시했던 방법 만이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했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해서 한 번도 정립된 뚜렷한 사고를 해본 적이 없었고, 동시에 외삽적인 기독교에 대한 선입견은 갖고 있으되, 그 안으로 들어가서 '내재적'으로 파고 들고, 그 안에서 어떤 내 나름의 해석을 뽑아낸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 얼치기였고, 대학생 기독교 단체의 사람들과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으며, 도망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름의 문제의식은 발전되지 않은 채로 '맹아' 수준으로만 있었으며, 나름대로의 한국 교계에 대한 실망과, 신학이 나아가야할 길,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취해야 할 삶의 자세들에 대해서 밑그림만 그려놓고, 그 디테일을 추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교회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그건 어떤 신의 계시도 아니었고, 대단한 실존적 결단도 아니었다. 솔직하게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람들의 공동체에 끼어서 일원이 되고자 했던 알량한 자리 욕심도 없다할 수 없고, 동시에 '죄론'에서 완전히 이탈하지 못한 나머지, 교회에 다니기는 다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군생활 2년이 다 되어가는 와중에 누리기 시작한 주5일제의 혜택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집에서는 언제나 교회에 가라고 달달 볶아 댔고, 또 "너 가고 싶어하는 교회에 다니니깐, 거기는 열심히 가라. 주일마다 뭐하는 거냐?"라는 질문에 대해 못이긴척하면서 교회로 향한 것이다.

 

민중신학을 만나다.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었지만, 어쩌다 보니 할 수없이 책벌레가 되어버렸다(http://blog.aladin.co.kr/hendrix/1718148). 나에게 가장 훌륭한 소통수단은, 말보다는 사실 글이다. 말을 하다보면 흥분하고 감정낭비가 많은 편이기 때문에, 되도록 그 자리에서 논쟁은 준비하기 전에는 피하고, 준비되지 않은 자세에서는 구도만 만들고 빼는 편이다. 특히, 군대 입대 좀 전과 지금 군생활 동안은 더 피하는 편이다. 쓸데없는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런 측면에서 나한테는 글이 더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럴 수록 읽는 것에도 더 몰입하게 되었다. 읽고 쓰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경동교회에 터를 잡고, 다니는 동안 몇명의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의 특징은(실상 경동교회에 나이를 먹고 다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기존의 보수적인 신학과 그 신학에 기반을 둔 교회에 불만을 갖고, 회의에 빠져서 찾다가 경동에 정착했다는 점이었다. 그 중에서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김강기명(www.kimkang.net)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내 생각대로 읽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을 받기도 했다. "민중신학은 회춘해야 합니다"라는 그의 말에 놀랐고, 그의 사회과학적 해박함과, 철학적 입지가 비슷한 곳에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공부에 대한 자극을 받게 되었다. 또 경동교회의 공동체가 '다원주의'적이었고, 다양한 입장들이 공존하고 그 논의들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도그마가 없다는 점에서 내 공부는 자극이 되었고, 올해(2008)가 열리자, 내 마음을 부여잡는 기회이자, 또 내가 내 입장에서 가장 가까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민중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처음 내가 읽은 기독교와 관련된 책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였다. 건대 철학과 강영계 선생이 번역한 책이었는데, 읽다가 몇가지로 정리한 생각은, 신은 무한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떠한 척도로 잰다해도, 그 자체의 유한성으로 인해 '등가성'이 인정될 수 없을 것이며, 신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의 '상대적' 진리임을 인정하고 시작한다면, 또한 부담없이 이야기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절대적인 정통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기독교의 신앙이라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4살 때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샀다가 대학교 2학년 때 선배에게 빌려준 후 한동안 읽지 못한 책이 있었는데, 하비콕스의 <세속도시>였다(http://blog.aladin.co.kr/hendrix/1715149). 하비콕스를 통해서 난 사실 에큐메니컬 신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알 수가 있었다. 경동에서 에큐메니컬 신학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그 정수를 처음 느껴본 게 그 때였다. 이 때도 24살 때였다.

 

 


그리고 작년(2007년), 류상태의 <당신들의 예수>를 읽었는데(http://blog.aladin.co.kr/hendrix/1713606), 그 사람이 강의석 사태 때 그 학교의 교목이었다는 점과, 그 사건 이후 목사 직을 그만 뒀다는 점 때문에 더 끌리기도 했지만, 그가 제시했던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의 자유로움이 나를 잡아 끌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읽은 성서에 관련된, 신학에 관련된 책은 이현주 목사의 책이었는데, 이 책도 경동교회에 나오게 된 어떤 여자 교우(경동에서는 형제, 자매의 표현을 쓰지 않는다.)가 추천해서 읽게 되었었다. 또 이 책을 잡은 이유는, 그 출판사가 '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온건해 보이지만, 단단한 진보주의에 대한 확신이 있는 출판사라 평소에 생각해 왔기에, 더욱 믿음이 갔다.

예수의 삶과 길(http://blog.aladin.co.kr/hendrix/1801079),

그리스도의 몸, 교회(http://blog.aladin.co.kr/hendrix/1814042),

탈출의 하나님(http://blog.aladin.co.kr/hendrix/1825061)

이현주 목사의 글들은 개괄적으로 기독교를 종교로 삼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한 책들인데, 장점이라면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었고, 단점이라면 위험한 지점은 다 피해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실존주의에 경도된 경향도 보였다. 나에겐 사회의 구조에 대한 엄밀함이 떨어지는 '마음가짐'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신앙은 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요 몇 달 전, 교회를 갔다가 "경동교회의 역사"를 알자면서, 읽게 된 사람이 장공 김재준이었는데, 그의 평전을 교회 도서실에서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몇 달 지나, 학교 도서관에서 마저 읽을 수가 있었다.(http://blog.aladin.co.kr/hendrix/1812879)

 

 

그리고 최근,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저작이었던, <무례한 복음>을 읽으면서 한국 교회가 미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병리적 현상의 하나인 '선교'에 대해서 다시금 인지하게 되었다.(http://blog.aladin.co.kr/hendrix/1836958)

 

 

요즘 그리고 놀랍게 읽은 책들은 미국의 '예수 세미나' 그룹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의이다. 예수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 맥락에 대해서 짚음으로써, 기존의 '신' 예수가 아니라 '민중운동가' 예수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 다시금 나에게 충격적이었고, 한동안 공부할 주제로 정해지고 있다.

일단 존 도미닉과 호슬리의 책들을 읽었는 데, 도미닉의 <역사적 예수>를 짧게 쓴 <예수>(http://blog.aladin.co.kr/hendrix/1834711), 그리고 <예수와 제국>(http://blog.aladin.co.kr/hendrix/1842633)를 읽었었는데,

 

다음엔 로버트 펑크의 글과 존 쉘 비 스퐁의 책들을 읽어볼 계획이다.

한동안, 민중신학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과학과 역사학과 신학의 접점을 탐구해 볼 계획이다.

 

 

한 동안, 내가 종교 생활에 있어서는 복이 없다고 믿었었는데, 요즘엔 대부분의 기독교 인들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고, 오히려 내가 복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사유의 폭과 깊이를 다시금 재 점검할 기회를 갖는 끊임없이 '차이와 반복' 속에서 고뇌하면서 그런 고뇌의 반복, 그리고 새로운 활력을 북돋을 힘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에 근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가운데 지적 충동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점이 굉장한 나에게 주어진 은혜가 되는 하루 하루다.

언제나 말하듯, 공부할 것은 미어터지지만, 요즘은 그 미어터짐에 묻혀 있는 내 자신의 생활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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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0-06-02 14:35 
    민중 신학, 역사적 예수 관련 서적들 — 2008년 hendrix님이 작성한 포스트. 일단 이렇게 북마크.
  2.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0-06-02 14:37 
    [책] 민중신학, 역사적 예수에 걸친 여정 — via hendrix
 
 
웽스북스 2008-01-18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가 가는 리스트들이에요 ^-^ 세속도시는 저도 스물 네살 때 읽었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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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스 2008-01-18 23:44   좋아요 0 | URL
예전에 고등학교 때 읽었으면, 지금 또 많이 변했을 까를 생각해 보긴 하는데,, 제 관점을 바꾼 책은 그보다는 '인물과 사상'이었다는 ㅎ

김강기명 2008-04-10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훈씨^^ 안병무 선생님의 "민중신학 이야기"를 꼭 읽어보세요. 일단은 그게 민중신학의 '정수'라 할만 합니다.^^

헨드릭스 2008-04-11 00:46   좋아요 0 | URL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셨네요? 신기 신기.. ㅋㅋ

- 2019-10-26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동교회는 즐거우신가요? 10년이 지난지금도 교회에 다니시는지 궁금하네요
 
예수와 제국 - 하느님 나라와 신세계 무질서
리차드 A. 호슬리 지음,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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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예수를 떠올리는 까닭에 대해서

<<예수>>에 대한 서평에서도 이야기했었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분해해서 예수를 읽는 것은, 기실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과 거리가 먼 결과를 산출해 내기 일쑤다.

이를 테면, 예수를 '사도신경'에 나오는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이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절의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니, 이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자체로 인식하는 것이나,

그 말씀의 맥락(Context)에 따라서 읽는 것에 대한 예수의 이해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는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 신자들에게 '맥락'에 따른 성경 읽기는 불경한 것이라 판단 될 것이며, 이런 책을 교회에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눈총을 받을 수 있고, 운이 없으면 눈에 나는 수도 있다. 유일한 예외는 신학생 정도가 되겠지.

예수를 '역사적 맥락'으로 읽어야 되는 이유를, 그러한 까닭게 말해야만 한다. 예수를 '역사적 맥락'으로 읽는 이유는, 지금 현재에서 '내세에 대한' 천국 티켓 처럼 팔아대는 재벌 교회들과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멀고 먼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일단 필요할 테고,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된 '억눌리'고 '피폐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교회가 그것에 대해서 강력한 '선포'와 '심판'의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문제가 있는 지 없는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위해서도 이 과정은 꼭 필요한 것이다.

도대체 예수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에서 말을 했는가??

이 전에 그가 최근의 '탈정치화'되고 '탈역사화된' 예수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은 굉장히 인상깊다.

   
 

 1) 가장 결정적인 것은 현대 서양의 생각, 즉 종교는 정치 및 경제와 분리된다는 생각이다. ...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종교가 정치경제와 분리된다는 현대 서양의 생각을 고대 사회에 투영시킨다. 즉 예수를 종교적 인물로 개념화함으로써, 예수의 설교와 행적의 정치경제적 측면과 의미를 무시한다.

 2) 현대 서양의 개인주의이다. ... 특히 미국사회에서 매우 강한 특성이다. 이런 현대 서양의 생각도 고대 사회에 투영시켜,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예수가 주로 다른 개인들과 관계했지, 사회 집단이나 정치 제도와는 관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3) 예수 해석자들의 과학적인 오리엔테이션이다. ... 복음서들의 "자료들"(data)은 역사적 재구성을 위해 반드시 따로 떼어내어 분석하고 세밀하게 통제해야만 한다.

 4) 최근의 일부 해석자들은 예수의 "진정한" 말씀들의 자료들에서 사람들 귀에 거슬리는, 심판과 관계된 말씀들을 제거시킴으로써, 예수를 더욱 탈정치화시켰다.

(pp.25-26)

 
   

(방법론적으로는,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고대에 '민족국가'를 투영해서 삼국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이 생각나기도 한다. )

예수는 히피 운동가도 아니고, 잠언록이나 읊어대던 노인도 아니었으며, 꿈꾼대로 떠들던 몽상가도 아니었다. 예수는 언제나 폭탄같은 발언을 하던 사람이었고, 민중과 함께 했고, 억압받는 자와 함께 하곤 했다는 건데, 그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해봐야 하는가?

역사적 배경을 살피며 예수 읽기

사실 읽다보면, 졸거나  침대를 찾게 될 확률이 높은데, 이 책의 문체가 어렵다기보다, 번역투라기 보다, 저자의 저술이 계속 늘어지는 투로 했던 말 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훨씬 더 compact하게 전개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런 것이다. 제목과 같이 로마 '제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예수를 봐야 한다는 거다. "예수와 제국"이니까.

예수가 태어나던 시절, 갈릴레아와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의 신정국가(temple-state)로서, 식민지로서 기능하고 있었으며, 로마의 제국 팽창을 유지하기 위한 수탈의 대상이 된 이스라엘의 민중들은 그에 대해서 저항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어느 식민지 국가에나 지배층은 있는 마련인데, 제사장 계급들은 로마에 의해 임명되는 호의를 받으면서 나름 공범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며, 식견있는 지식인 계급들도 나름의 불만을 갖거나 혹은 나름대로 타협하는 관계로 권력을 분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상류 신분들의 생활과 달리,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민중들에게 로마제국의 지배는 기존의 '성직자'들에게 제공했던 세금에 과중되는 착취로 이어지게 되었고, 민중들의 불만이라는 것은 봉기와 시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서 예수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주장이 되겠고, 그와 더불어 예수가 말했던 아름다운 말씀이라는 것들도, 단순한 도덕률의 문제나, 혹은 현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 '폭탄'과 같은 언사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하며, 동시에 굉장한 '반어법'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 그가 '반제국주의 민중운동가' 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 지리하지만, 꼼꼼히 저자는 하나하나 챙기고 있다. 또 로마 제국과 미국 제국의 동형성, 특히 예수의 운동 같은, 저항에 대한 전망을 말미에서 보여주고 있는 데, 여기선 한 번쯤 여러 생각들이 떠오른다.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수탈구조와, 만성화된 테러와 정치적 후견자 관계를 통한 정치적 억압구조하에서 민중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속된 민족의 예언자적인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복음서의 진술을 새롭게 듣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의 권력관계에 안테나를 맞추고, 의심쩍은 표준적 탈정치화된 가정들과 접근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어야만 한다. 예수운동들에서는 로마가 강요한 신세계무질서라는 조건 아래에서, 일부 예속된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취했다.

 또한 제국주의의 권력관계에 안테나를 맞추고, 미국의 정치적 힘과 지구 자본주의의 힘이 결합해서 확립한 현재의 신세계 무질서 속에서 우리의 역할과 상황을 보다 비판적으로 분별하는 작업도 가능해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와 복음서들이 미국인들, 즉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의 이런 그리스도교적 측면과 동일시하는 미국인들에게 줄 수 있는 영향은 현재 새로운 제국적 무질서의 정상에 있는 사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공동체들의 집단적 토론과 행동을 통해서만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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