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신학의 미소 - 동시대인 총서 11
김진호 지음 / 삼인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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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꼬뮤날레 1회로 기억이 된다, 들뢰즈와 관련된 논의들을 가지고 예수를 읽어내는, 신학을 읽어내는 일군의 학자들이 토론을 시작했고, 마지막에 김진호라는 목사가 한마디 한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왜 아직도 목사의 직함을 달고 있는 걸까요?" 서로 너털거리는 웃음을 지으면서 끝났지만, 어쨌거나 잠시 정적.

그리고 나서, 그들이 주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라는 곳에서 민중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동안 그 홈페이지를 기웃거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에도 이야기했듯이(http://blog.aladin.co.kr/hendrix/1848274) 민중신학에 대해서 관심만 갖고 아무런 읽는 노력을 해보지 않았던 나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리도 만무했고(지금도 일천한 데 말이다.), 역시 열심히 게시물을 열람하지 않았다.

<반신학의 미소>를 산건, 2007년 8월 5일인데, 사게 된 것도 한동안 갖고 싶어했지만, 크게 우선순위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참 망설이다가, 류상태의 <당신들의 예수>를 읽다보니 우선 순위가 앞으로 오게되었다(http://blog.aladin.co.kr/hendrix/1713606). 하지만 당시에 읽기에 너무 난해해서 덮고 있다가, 요즘에 벼른 김에 읽어버리자는 마음으로 한 번 주욱 읽었다.

이 책은 삼인의 '동시대인 총서'의 다른 책들 구성과 같이 논문들의 모음이고, 따라서 논문들의 주제도 다양하고, 한군데로 딱 모아진다고 말할 수 없다. 저자도 인정하는 바다. 다만 저자의 말처럼 '반신학의 구상'을 하는 차원에서 그나마 이야기의 선이 모아진다고 주장한다.

1,2 장의 내용은 사실 별로 와닿지 않았고, 분석적인 사회과학 논문식으로 쓰여진 3장 "교회의 위기와 반신학" 부분이 나에게 가장 쓸모가 있었다.

'민중신학'을 도대체 왜 하는가? 그에 대한 그의 대답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교회라는 제도적 실재를 반그리스도적인 것이라고 규범적인 비판을 가하는 것과,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현실태로서의 교회의 유의미성을 부정하지 않는 것 사이에 모순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원리적인 규범성과 그것의 현실적인 실행은 종종 상보적인 실천의 패러독스를 담고 있다(p.235).

 
   

그리고 그가 민족주의라는 것의 황폐함을 알고 있고, 젠더의 문제가 단순한 차이의 인정의 문제가 아니라 푸코식의 미시권력-훈육질서 와 관련되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 굉장히 놀라웠다. 실은 내가 바라보는 신학자에 대한 편견일 수 있겠다. 또한 민중의 구상에 있어서 '민족'처럼 '상상속의 공동체'가 아닌 그것을 다시금 어떻게 구성해 낼 것인가의 문제를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7년이 지난 저작이지만 굉장히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의 구상에서 역동적인 '니체적' 활력이 느껴지는 것이었고, '생동' '생명' 그 자체의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또한 요즘 한참 읽었던 '예수 세미나'(역사적 예수 연구) 동향에 대한 논평도 굉장히 세련되고 그것의 '실천적 함의'에 대해서 짚어내는 부분들이 내 공부의 '지도의 필요성'을 다시금 일깨워 줬다.

그의 <예수 르네상스>와 <예수 역사학>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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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으로 세계 읽기. 나를 처음 책에 빠뜨리게 했던, 진중권을 이제사 다시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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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당신의 추천도서는?

교회에 정착하다. 그것도 내가



나를 잘 아는 지인들은 놀라곤 한다. 요즘 내가 교회에 정착했고, 그곳의 모임에 한 주도 빼놓지 않고 나가고 있으며, '신앙' 따위엔 아무 관심도 없으리라 생각하는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고, 여러가지 핑계로서 삶의 자세를 바꾸고 있지 않지만, 어쨌든, 습관이라는 타성을 이기고 교회에 나가고 있다.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했다. "너 왜그래?"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를 떠올려 볼 수가 있다. 그 중 큰 축은 이 두가지일 것이다.

먼저, 교회에 대한 그들의 생각 때문일 터다. 예를 들면, 교회란 곳은 항상 경건할 것이라 예측되는 곳이고, 교회에 다니는 이들이란 '신앙심'이 두텁고, 나름대로 우리가 묵시적으로 합의하는 '도덕적 인간' 혹은 '윤리적 인간'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 교회가 주는 '구속복'을 입을 까 하는 생각에서일 테다. 이런 류의 주장은 주로 나와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 하는, 혹은 군대에서 맞딱 드리고 있는 이들에게서 나타난다.

또, 교회의 '사회적 이념좌표'와 내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있다. 사실 위의 주장과 그리 다르지 않은 주장인데, 조금 다른 층위의 문제기도 하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에 물들 지 않기'를 주장하는 것의 효과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강한 주장을 하는 것을 꺼리고(사실은 방조하고), 반대로 온건한 가치들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는, 기성 질서에 대해서 적대적이며, 언제나 비판적이다. 쉽게 말해, 교회라는 곳이 생각되기는 온건한 우파인데, 나는 아무리 떠올려봐도 레디컬한 좌파로 분류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시금 재차 이야기하지만, 놀라고 또 놀란다. 이제 사람들의 전망은 두가지가 다시금 되는데, 먼저 내가 교회를 금방 떠날 것이라는 생각과, 혹은 그 교회에 젖어 들어가서 바뀔 것이라는 전망. 전자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이고, 후자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나와 그나마 이야기해본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실은 이 두가지 부류의 사람들 모두, 굉장한 믿음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에 대한 규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규정'일 테고, 또 하나는 교회는 '변하지 않는' 집단이라는 사고이다.

하지만, 나는 위에서 언급한 두가지 판단 자체에 대해 반대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즉, 실천적으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사회적 실천의 층위에서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반대하고, 동시에 이론적으로 살펴볼 때에도 '온당한 진리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잘못된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항상, 회고와 반추만을 행하는 것의 근저에 내가 무력하다는 것의 반증이 함께하는데, 사실 2006년 이후, 그리고 앞으로 제대하기 전까지의 내 모습은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할 듯하다. 군인이라는 신분이 주는 제약이 생각보다 막강하고, 그것은 단순히 '안된'다는 소극적 통제가 아니라, 어느 층위에서 항상 수위를 고민하게 만드는 적극적인 통제의, 훈육의 차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이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권력은 항상 생산적이기에 그렇다.

 

 

잠깐 돌아왔지만, 여튼 내가 지금 지닐 수 있는 사유의 양식이라는 것이 '회고와 반추'에만 있다 하더라도 난 그것에 대해서 '회의'먹고 멈출 수는 없다. 그나마라도 하는 것이 내 '반성적 사유'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명제들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내가 대학생활 동안에 느꼈던 사회과학이 주었던 사유덕택일 것이다. 지난 번, 우석훈의 칼럼집에 대한 서평에서도 이야기 했었지만(http://blog.aladin.co.kr/hendrix/1744566) 내가 접했던 사회에서 나는 싸울 수밖에 없었고, 사회과학서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교회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전에 다니던 나의 모(母)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접했던 세상의 모습과 교회가 모사하는 세상의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할 내 자세에 대한 교회의 인도와 내 판단이 언제나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그나마 길이 있었는 지, 내 청소년기에 함께 했던 전도사가 주었던 길을 통해서 경동교회를 찾게 되었고, 그 후 '교회'라는 것 자체가 모사하는 사회의 상이라는 것도 교회에 따라서 다를 수 있고, '기독교'를 내 종교로 삼고, 주를 섬긴다는 것도 여러가지의 방법으로 가능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마찬가지로 내 삶의 자세 또한 그 전의 교회에서 제시했던 방법 만이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했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해서 한 번도 정립된 뚜렷한 사고를 해본 적이 없었고, 동시에 외삽적인 기독교에 대한 선입견은 갖고 있으되, 그 안으로 들어가서 '내재적'으로 파고 들고, 그 안에서 어떤 내 나름의 해석을 뽑아낸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 얼치기였고, 대학생 기독교 단체의 사람들과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으며, 도망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름의 문제의식은 발전되지 않은 채로 '맹아' 수준으로만 있었으며, 나름대로의 한국 교계에 대한 실망과, 신학이 나아가야할 길,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취해야 할 삶의 자세들에 대해서 밑그림만 그려놓고, 그 디테일을 추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교회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그건 어떤 신의 계시도 아니었고, 대단한 실존적 결단도 아니었다. 솔직하게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람들의 공동체에 끼어서 일원이 되고자 했던 알량한 자리 욕심도 없다할 수 없고, 동시에 '죄론'에서 완전히 이탈하지 못한 나머지, 교회에 다니기는 다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군생활 2년이 다 되어가는 와중에 누리기 시작한 주5일제의 혜택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집에서는 언제나 교회에 가라고 달달 볶아 댔고, 또 "너 가고 싶어하는 교회에 다니니깐, 거기는 열심히 가라. 주일마다 뭐하는 거냐?"라는 질문에 대해 못이긴척하면서 교회로 향한 것이다.

 

민중신학을 만나다.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었지만, 어쩌다 보니 할 수없이 책벌레가 되어버렸다(http://blog.aladin.co.kr/hendrix/1718148). 나에게 가장 훌륭한 소통수단은, 말보다는 사실 글이다. 말을 하다보면 흥분하고 감정낭비가 많은 편이기 때문에, 되도록 그 자리에서 논쟁은 준비하기 전에는 피하고, 준비되지 않은 자세에서는 구도만 만들고 빼는 편이다. 특히, 군대 입대 좀 전과 지금 군생활 동안은 더 피하는 편이다. 쓸데없는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런 측면에서 나한테는 글이 더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럴 수록 읽는 것에도 더 몰입하게 되었다. 읽고 쓰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경동교회에 터를 잡고, 다니는 동안 몇명의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의 특징은(실상 경동교회에 나이를 먹고 다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기존의 보수적인 신학과 그 신학에 기반을 둔 교회에 불만을 갖고, 회의에 빠져서 찾다가 경동에 정착했다는 점이었다. 그 중에서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김강기명(www.kimkang.net)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내 생각대로 읽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을 받기도 했다. "민중신학은 회춘해야 합니다"라는 그의 말에 놀랐고, 그의 사회과학적 해박함과, 철학적 입지가 비슷한 곳에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공부에 대한 자극을 받게 되었다. 또 경동교회의 공동체가 '다원주의'적이었고, 다양한 입장들이 공존하고 그 논의들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도그마가 없다는 점에서 내 공부는 자극이 되었고, 올해(2008)가 열리자, 내 마음을 부여잡는 기회이자, 또 내가 내 입장에서 가장 가까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민중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처음 내가 읽은 기독교와 관련된 책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였다. 건대 철학과 강영계 선생이 번역한 책이었는데, 읽다가 몇가지로 정리한 생각은, 신은 무한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떠한 척도로 잰다해도, 그 자체의 유한성으로 인해 '등가성'이 인정될 수 없을 것이며, 신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의 '상대적' 진리임을 인정하고 시작한다면, 또한 부담없이 이야기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절대적인 정통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기독교의 신앙이라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4살 때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샀다가 대학교 2학년 때 선배에게 빌려준 후 한동안 읽지 못한 책이 있었는데, 하비콕스의 <세속도시>였다(http://blog.aladin.co.kr/hendrix/1715149). 하비콕스를 통해서 난 사실 에큐메니컬 신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알 수가 있었다. 경동에서 에큐메니컬 신학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그 정수를 처음 느껴본 게 그 때였다. 이 때도 24살 때였다.

 

 


그리고 작년(2007년), 류상태의 <당신들의 예수>를 읽었는데(http://blog.aladin.co.kr/hendrix/1713606), 그 사람이 강의석 사태 때 그 학교의 교목이었다는 점과, 그 사건 이후 목사 직을 그만 뒀다는 점 때문에 더 끌리기도 했지만, 그가 제시했던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의 자유로움이 나를 잡아 끌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읽은 성서에 관련된, 신학에 관련된 책은 이현주 목사의 책이었는데, 이 책도 경동교회에 나오게 된 어떤 여자 교우(경동에서는 형제, 자매의 표현을 쓰지 않는다.)가 추천해서 읽게 되었었다. 또 이 책을 잡은 이유는, 그 출판사가 '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온건해 보이지만, 단단한 진보주의에 대한 확신이 있는 출판사라 평소에 생각해 왔기에, 더욱 믿음이 갔다.

예수의 삶과 길(http://blog.aladin.co.kr/hendrix/1801079),

그리스도의 몸, 교회(http://blog.aladin.co.kr/hendrix/1814042),

탈출의 하나님(http://blog.aladin.co.kr/hendrix/1825061)

이현주 목사의 글들은 개괄적으로 기독교를 종교로 삼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한 책들인데, 장점이라면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었고, 단점이라면 위험한 지점은 다 피해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실존주의에 경도된 경향도 보였다. 나에겐 사회의 구조에 대한 엄밀함이 떨어지는 '마음가짐'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신앙은 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요 몇 달 전, 교회를 갔다가 "경동교회의 역사"를 알자면서, 읽게 된 사람이 장공 김재준이었는데, 그의 평전을 교회 도서실에서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몇 달 지나, 학교 도서관에서 마저 읽을 수가 있었다.(http://blog.aladin.co.kr/hendrix/1812879)

 

 

그리고 최근,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저작이었던, <무례한 복음>을 읽으면서 한국 교회가 미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병리적 현상의 하나인 '선교'에 대해서 다시금 인지하게 되었다.(http://blog.aladin.co.kr/hendrix/1836958)

 

 

요즘 그리고 놀랍게 읽은 책들은 미국의 '예수 세미나' 그룹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의이다. 예수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 맥락에 대해서 짚음으로써, 기존의 '신' 예수가 아니라 '민중운동가' 예수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 다시금 나에게 충격적이었고, 한동안 공부할 주제로 정해지고 있다.

일단 존 도미닉과 호슬리의 책들을 읽었는 데, 도미닉의 <역사적 예수>를 짧게 쓴 <예수>(http://blog.aladin.co.kr/hendrix/1834711), 그리고 <예수와 제국>(http://blog.aladin.co.kr/hendrix/1842633)를 읽었었는데,

 

다음엔 로버트 펑크의 글과 존 쉘 비 스퐁의 책들을 읽어볼 계획이다.

한동안, 민중신학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과학과 역사학과 신학의 접점을 탐구해 볼 계획이다.

 

 

한 동안, 내가 종교 생활에 있어서는 복이 없다고 믿었었는데, 요즘엔 대부분의 기독교 인들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고, 오히려 내가 복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사유의 폭과 깊이를 다시금 재 점검할 기회를 갖는 끊임없이 '차이와 반복' 속에서 고뇌하면서 그런 고뇌의 반복, 그리고 새로운 활력을 북돋을 힘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에 근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가운데 지적 충동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점이 굉장한 나에게 주어진 은혜가 되는 하루 하루다.

언제나 말하듯, 공부할 것은 미어터지지만, 요즘은 그 미어터짐에 묻혀 있는 내 자신의 생활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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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0-06-02 14:35 
    민중 신학, 역사적 예수 관련 서적들 — 2008년 hendrix님이 작성한 포스트. 일단 이렇게 북마크.
  2.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0-06-02 14:37 
    [책] 민중신학, 역사적 예수에 걸친 여정 — via hendrix
 
 
웽스북스 2008-01-18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가 가는 리스트들이에요 ^-^ 세속도시는 저도 스물 네살 때 읽었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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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스 2008-01-18 23:44   좋아요 0 | URL
예전에 고등학교 때 읽었으면, 지금 또 많이 변했을 까를 생각해 보긴 하는데,, 제 관점을 바꾼 책은 그보다는 '인물과 사상'이었다는 ㅎ

김강기명 2008-04-10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훈씨^^ 안병무 선생님의 "민중신학 이야기"를 꼭 읽어보세요. 일단은 그게 민중신학의 '정수'라 할만 합니다.^^

헨드릭스 2008-04-11 00:46   좋아요 0 | URL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셨네요? 신기 신기.. ㅋㅋ

- 2019-10-26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동교회는 즐거우신가요? 10년이 지난지금도 교회에 다니시는지 궁금하네요
 
예수와 제국 - 하느님 나라와 신세계 무질서
리차드 A. 호슬리 지음,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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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예수를 떠올리는 까닭에 대해서

<<예수>>에 대한 서평에서도 이야기했었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분해해서 예수를 읽는 것은, 기실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과 거리가 먼 결과를 산출해 내기 일쑤다.

이를 테면, 예수를 '사도신경'에 나오는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이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절의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니, 이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자체로 인식하는 것이나,

그 말씀의 맥락(Context)에 따라서 읽는 것에 대한 예수의 이해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는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 신자들에게 '맥락'에 따른 성경 읽기는 불경한 것이라 판단 될 것이며, 이런 책을 교회에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눈총을 받을 수 있고, 운이 없으면 눈에 나는 수도 있다. 유일한 예외는 신학생 정도가 되겠지.

예수를 '역사적 맥락'으로 읽어야 되는 이유를, 그러한 까닭게 말해야만 한다. 예수를 '역사적 맥락'으로 읽는 이유는, 지금 현재에서 '내세에 대한' 천국 티켓 처럼 팔아대는 재벌 교회들과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멀고 먼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일단 필요할 테고,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된 '억눌리'고 '피폐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교회가 그것에 대해서 강력한 '선포'와 '심판'의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문제가 있는 지 없는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위해서도 이 과정은 꼭 필요한 것이다.

도대체 예수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에서 말을 했는가??

이 전에 그가 최근의 '탈정치화'되고 '탈역사화된' 예수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은 굉장히 인상깊다.

   
 

 1) 가장 결정적인 것은 현대 서양의 생각, 즉 종교는 정치 및 경제와 분리된다는 생각이다. ...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종교가 정치경제와 분리된다는 현대 서양의 생각을 고대 사회에 투영시킨다. 즉 예수를 종교적 인물로 개념화함으로써, 예수의 설교와 행적의 정치경제적 측면과 의미를 무시한다.

 2) 현대 서양의 개인주의이다. ... 특히 미국사회에서 매우 강한 특성이다. 이런 현대 서양의 생각도 고대 사회에 투영시켜,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예수가 주로 다른 개인들과 관계했지, 사회 집단이나 정치 제도와는 관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3) 예수 해석자들의 과학적인 오리엔테이션이다. ... 복음서들의 "자료들"(data)은 역사적 재구성을 위해 반드시 따로 떼어내어 분석하고 세밀하게 통제해야만 한다.

 4) 최근의 일부 해석자들은 예수의 "진정한" 말씀들의 자료들에서 사람들 귀에 거슬리는, 심판과 관계된 말씀들을 제거시킴으로써, 예수를 더욱 탈정치화시켰다.

(pp.25-26)

 
   

(방법론적으로는,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고대에 '민족국가'를 투영해서 삼국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이 생각나기도 한다. )

예수는 히피 운동가도 아니고, 잠언록이나 읊어대던 노인도 아니었으며, 꿈꾼대로 떠들던 몽상가도 아니었다. 예수는 언제나 폭탄같은 발언을 하던 사람이었고, 민중과 함께 했고, 억압받는 자와 함께 하곤 했다는 건데, 그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해봐야 하는가?

역사적 배경을 살피며 예수 읽기

사실 읽다보면, 졸거나  침대를 찾게 될 확률이 높은데, 이 책의 문체가 어렵다기보다, 번역투라기 보다, 저자의 저술이 계속 늘어지는 투로 했던 말 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훨씬 더 compact하게 전개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런 것이다. 제목과 같이 로마 '제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예수를 봐야 한다는 거다. "예수와 제국"이니까.

예수가 태어나던 시절, 갈릴레아와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의 신정국가(temple-state)로서, 식민지로서 기능하고 있었으며, 로마의 제국 팽창을 유지하기 위한 수탈의 대상이 된 이스라엘의 민중들은 그에 대해서 저항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어느 식민지 국가에나 지배층은 있는 마련인데, 제사장 계급들은 로마에 의해 임명되는 호의를 받으면서 나름 공범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며, 식견있는 지식인 계급들도 나름의 불만을 갖거나 혹은 나름대로 타협하는 관계로 권력을 분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상류 신분들의 생활과 달리,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민중들에게 로마제국의 지배는 기존의 '성직자'들에게 제공했던 세금에 과중되는 착취로 이어지게 되었고, 민중들의 불만이라는 것은 봉기와 시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서 예수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주장이 되겠고, 그와 더불어 예수가 말했던 아름다운 말씀이라는 것들도, 단순한 도덕률의 문제나, 혹은 현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 '폭탄'과 같은 언사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하며, 동시에 굉장한 '반어법'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 그가 '반제국주의 민중운동가' 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 지리하지만, 꼼꼼히 저자는 하나하나 챙기고 있다. 또 로마 제국과 미국 제국의 동형성, 특히 예수의 운동 같은, 저항에 대한 전망을 말미에서 보여주고 있는 데, 여기선 한 번쯤 여러 생각들이 떠오른다.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수탈구조와, 만성화된 테러와 정치적 후견자 관계를 통한 정치적 억압구조하에서 민중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속된 민족의 예언자적인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복음서의 진술을 새롭게 듣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의 권력관계에 안테나를 맞추고, 의심쩍은 표준적 탈정치화된 가정들과 접근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어야만 한다. 예수운동들에서는 로마가 강요한 신세계무질서라는 조건 아래에서, 일부 예속된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취했다.

 또한 제국주의의 권력관계에 안테나를 맞추고, 미국의 정치적 힘과 지구 자본주의의 힘이 결합해서 확립한 현재의 신세계 무질서 속에서 우리의 역할과 상황을 보다 비판적으로 분별하는 작업도 가능해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와 복음서들이 미국인들, 즉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의 이런 그리스도교적 측면과 동일시하는 미국인들에게 줄 수 있는 영향은 현재 새로운 제국적 무질서의 정상에 있는 사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공동체들의 집단적 토론과 행동을 통해서만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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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복음 - 한국 기독교의 선교, 그 문제와 대안을 성찰한다
김경재.김창락.김진호 외 지음,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기획 / 산책자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한국의 선교, 그 폭력성과 그 대안에 대해서

수십명의 샘물교회의 단기 선교팀이 아프간으로 출국했고, 활동 도중 탈레반과 연계될 것으로 보이는 테러단체에 납치가 되었고, 그 중 두 명이 목숨을 잃었고, 국가정보원과의 협상으로 수십일이 지난 후에야 돌아올 수 있게 되는 일이 발생했었다.

선교팀의 대다수가 20대 여대생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고, 국익을 쓸데없이 훼손하게 했다는 '국익론'부터, 기독교의 만행을 고발하는 '개독교'의 시선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사회를 맴돌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물론 두 차원의 문제제기가 가능할 것이다. 먼저, '선교'의 문제를 들 수가 있을 테고, 다른 층위에서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끄집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는 '냄비근성'에 대한 이야기부터, '안티'로 상징되는 누리꾼들의 폭력적인 댓글 문화 등을 들 수도 있겠지만, 기실 다른 한축의 문제제기는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한국 교회'에 대한 밖에서의 비판은 강하게 일고 있었지만, 기독교를 믿는 이들의 '내재적'인 비판과 성찰은 없었던 것이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담고 있다. 하지만 저자들이 어떤 인가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는다면, '교인들'이 다 이렇게, '목사들'이 다 이렇게 생각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을 크게 묶자면, 민중신학자들과 진보적인 관점으로 기독교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일군의 학자들을 제외한다면 절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반성하지 않다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샘물교회 선교팀 사건 이후, 한국의 교계는 잠시 움츠러 드렀다가 곧바로 '더 많은 이들의' 선교 봉사를 시작하겠다고 공언했고, 내가 며칠 전 개인적으로 겪은 일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샘물교회에서는 많은 이들의 '선교팀'을 출발시키고 있었고, 그 행렬에는 멈춤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죽음' 마저도 '순교'로 생각하는 집단적 사고가 따라다니고 있다.

그럼 도대체, 한국의 선교 무엇이 문제일까?

이 책의 나온 그 이유들은 사실 우리가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기독교를 믿는 이들에게서 그런 말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만 해도 신선할 정도이다.

'경쟁적'인 교파들의 선교경쟁, 그리고 보수적 성서해석에 따른 선교 이념의 몰이해-이에 대해서 선교 신학은 없고 선교 신앙만 있다고 공저자는 이야기한다-를 들 수 있으며, 이는 본질적인 신학적 해석의 문제를 추동한다.

이런 문제가 기존에 강고하게 뿌리박혔던 근본적 문제들이라면, 요즘에 벌어지는 문제들은 한국 경제가 양적으로 발전함과 그와 병행했던 교회의 물질적 강화로 인해서 해외선교의 조건들이 충족시켜진다는 측면, 또 개발NGO 들의 활동이 늘어남에 따라서 제3세계 국가들에 개발 NGO를 빙자함으로써 벌어지는 '눈가리고 아웅 식'의 '선교' 봉사 등이 나타날 것이다.

서구의 복음이 들어오는 것과 식민지를 동시로 체험했던 제3세계 국가들에 있어서, 한국의 선교사들, 특히 단기로 들어와서 마치 정복자의 깃발처럼, 교회의 십자가를 꽂아대려 하는 이들을 그 지역의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더 문제는 '씨너지'이다. 이슬람 국가 등에서 '기독교 포교'에 대해서 강하게 압박하고 금지하면 할 수록, 이 뜨거운 '예수쟁이'들은 그것을 '주께 다가가는 천로역정'인냥 알면서 더더욱 강하게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이런 거다. '예수 믿지 않다 지옥갈 이들'이라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 그들은 한편으로 그들의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 불쌍하게 생각하지만, 포교 당하는 이들의 '신앙적' 저항이 더 완고하게 되면, 그들은 반대로 '정복자' 혹은 '성전을 치르는 십자군'의 모습으로 순식간에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식의 근본적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도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한국교회가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확증은 더 굳어져만 가고, 나의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에 출발을 두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을 굳히게 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다시 사유해야하고,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신학적 '망상'(박해룡 식의 해석과 최근의 복음주의 무브먼트의 겉과 속에 대해서)을 깨야하며, 다시금 예수를 생각해 봐야 한다.

다만, 어떤 정책적 솔루션이나, 교회에 대한 내재적 '실천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기대했으나, 그런 내용에 대해서는 단지 'open question'으로 남겨두었다는 점이 좀 아쉽다.

한국 교계는 이제 정말 바리새적인 신학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티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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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14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중인 책이었어요, 덕분에 리뷰 잘 읽었습니다

헨드릭스 2008-01-15 00:13   좋아요 0 | URL
이 책 꼭 읽어보시고~~ 또 이어서, <<무례한 크리스마스>> 인가요? 그 책도 괜찮다고 하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