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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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다!

해방 이후 고향인 정주로 돌아가 북에서 살고 있는 백석 시인의 삶을 다룬 김연수 작가의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고 떠오른 책이다. 책 속에서 "비밀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다고 말했던 친구"(『일곱 해의 마지막』, 88쪽)가 살짝 언급되기 때문이다.

※ 주의 : 이 리뷰는 다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꾿빠이, 이상』에는 이상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상이 남긴 흔적을 추적하는 세 사람이 등장해 각각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형태다.

첫번째 이야기 「데드마스크」에서는 이상의 "가짜 데드마스크를 둘러싼 희대의 사기극"(80쪽)이 펼쳐진다. 이 이야기는 이상을 흉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첫 문장이 왜 이런 꼴인지 모를 수도 있는 독자들을 위해 작가는 친절하게 "이상을 흉내내려는 생각은 절대 아니다"(9쪽)라는 코멘트를 달아놓았다.

이 일은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됐다. 잘못 걸려온 전화. 잘못 전화한 사람은 잘못 전화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잘못 전화하지 않은 사람은 잘못 전화한 사람이었다. (9쪽)

출판전문 잡지사의 기자인 '나(김연화 기자)'는 자신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 상대방은 김연 기자를 찾는다. 이곳에는 김연 기자가 없다고 했지만,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서 자신이 김연 기자라고 말하는 '나'. 전화를 건 남자는 서씨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서 소설가 이상에 대해 이야기하면 믿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모두 가짜이며, 그런 식으로 해처먹은 게 꽤 된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호기심을 느낀 '나'는 이상과 관련된 그동안의 기록들을 찾아보게 된다. 이것은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남자'의 트릭이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남자는 '나'에게 전화를 건게 맞았을 것이다. 즉, "잘못 전화한 사람은" 사실은 "잘못 전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문제의 서씨, 즉 서혁수라는 사람은 자신의 형님이 이상과 절친한 사이였던 서혁민이라고 하면서 아직 발표하지 않은 유고나 유품을 상당량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이상의 데드마스크를 공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상의 데드마스크가 존재했다는 증언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데드마스크는 언젠가 유실되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공식적인 기자 회견에 앞서 전문가들만 모셔놓고 열린 비공식 모임에서 '나'는 "서씨는 가장 완벽하게 구현된 데드마스크의 전달자"(45쪽)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거짓으로 꾸며진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교수도 누군가를 사칭한 가짜였을 뿐이고, "검찰에서 나는 왜 그 데드마스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밝히는 일이 중요하지 않은지, 혹은 진위를 왜 밝힐 수 없는지, 내가 왜 김연기자라고 거짓말을 했는지 설명해야 했다."(80쪽) "검사는 기자라는 공인이 자기 느낌만 믿고 피해자가 생길 게 뻔한 이런 기사를 쓰다니 미친 게 아니냐고 말했다."(80쪽) 결국 '나'는 물의를 일으킨 기사에 대해 책임을 지고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나'는 "진짜라고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기사를 쓴 것은 아니다. 내가 본 데드마스크가 가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도 수없이 했었다."(86쪽) 그러면서도 그가 기사를 쓴 것은, "문제는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는 것이죠. 보는 바에 따라서 그것은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 진짜라서 믿는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진짜인 것"(83쪽)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상은 예수처럼 신화의 영역에 있는 사람이고, 사람들은 예수를 진짜 존재했기 때문에 믿는게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기사를 읽은 편집장 역시 재미교포 평론가 피터 주가 쓴 『참조로서의 이상 텍스트』를 보고 '나'가 본 데드마스크가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이상의 데드마스크라는게 중요"(82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기사를 싣기로 결정했다는 것.

※참고로 그 흉내내려던 이상의 「오감도 시 제3호」를 적어본다. (이 짧은 문장을 옮겨 적으면서도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부분이 어느 부분인지 헷갈렸고, 습관적으로 띄워쓰기를 하게 돼 한참 걸렸다.)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

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이상의 시는 어렵다. 1934년 이상이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 15편을 연재했을 때, '미친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며 성난 독자들의 공격성 투고가 날마다 신문사로 밀려든 일은 이제 웬만한 사람은 다 잘 아는 사실이다.(11쪽)

「잃어버린 꽃」에 등장하는 '나'는 아마추어 이상 연구가이자 무명 시인으로, 「데드마스크」에 등장했던 사기꾼 서씨의 형이다. 그는 이상의 삶과 문학을 닮고 싶어서 평생 이상을 연구하며 산다. 그에게 "이상의 작품에 버금가는 시를 쓰는 일과 이상의 미발표 유고를 찾아 헤매는 일은 언제나 같은 의미"(114쪽)였고, 그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는 원고라도 찾을까 해서 주말이면 몽유병자처럼 헌책방과 고물상을 떠돌아"(114쪽) 다녔다.

그러다가 몇 년만에 이상의 수필에서 언급된 『세르팡』이라는 잡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마침 그 잡지를 찾아서 일본에서 건너온 와타나베를 만나게 된다. 그 또한 오랫동안 하루야마 유키오의 유고를 모으고 있었는데, '나'가 발견한 그 잡지가 그에게 없는 낙질이라는 것이다. 누가 더 간절하게 이 잡지를 찾고 있었는지 이야기하다가 와타나베는 이상도 소설가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가 가지고 있는 하루야마 유키오의 친필 원고 중에 다른 사람의 원고를 가필한 것이 있는데, 그 원고를 쓴 사람이 바로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그 원고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세르팡』을 와타나베에게 양보한다.

일본으로 돌아간 와타나베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나'는 일본으로 그를 찾아간다. 그런데 와타나베는 이상의 원고를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루야마에게 쓴 편지에서 이상이 "지금까지 자신이 쓴 모든 작품이 가짜"(160쪽)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며, 진정한 추종자라면 그 원고가 세상에 공개되지 않도록 포기하는게 맞다고. 그렇게해야 이상의 문학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이라는 것은 삶과 현실의 불순물을 제외한 것입니다. 불순물에는 물론 한 작가의 삶까지 들어갑니다. 당신이나 나나 한 작가의 뒤를 좇은 이유는 그 작가의 문학을 완성시키려는 일 아니었습니까? 그 사람의 삶이 자꾸만 자신의 문학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단연코 그 삶이 아니라 문학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 당신이 진정으로 이상을 추구한다면, 그 원고를 손에 넣을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160쪽

와타나베의 이야기에 동의한 그는, 하루야마의 유고에 들어 있었다는 이상의 시를 완벽하게 모방한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를 쓰고 도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생을 마친 이상처럼 도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죽는다. "이는 바로 내가 죽어 영원히 이상으로 다시 사는 길이기도 하다. 내 오랜 꿈. 이로써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자─ 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꾿빠─이." (166쪽)

세번째 이야기인 「새」는 서혁민이 쓴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를 두고 일어난 일이다. 이 원고를 공개한 연구자는 이것이 이상의 유고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를 베껴 쓴 것으로, 도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한편, 「데드마스크」에서 잡지사를 그만 둔 김연화 기자는 이상의 원고를 베껴 쓴 원고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피터 주에게 연락한다. 피터 주는 역시 「데드마스크」에서 각주 정도로 언급된 『참조로서의 이상 텍스트』의 저자다. 마침 다른 연구자가 원고를 공개하는 바람에 곤란을 겪고 있던 피터 주는, 김연화 기자로부터 또다른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어차피 자신은 가짜 '데드마스크' 사건에 연루되어 공개해봤자 믿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 원고를 피터 주에게 넘긴다는 것이다.

김연화 기자가 넘긴 원고는 "평생 이상을 추종하며 살았던" 서혁민의 수기를 복사한 것으로, 그 수기 안에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 '가짜 데드마스크'와 이 원고를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원고가 진짜로 밝혀지면 데드마스크 또한 '진짜'가 된다는 말을 덧붙인다.

피터 주가 다른 사람에게 듣고 무심결에 끼워넣은 각주가 가짜 데드마스크의 증거였기 때문에, 피터 주가 들은 이야기를 부정하면 진짜가 될 수도 있는 것. 그 데드마스크가 진짜로 밝혀진다면 피터 주를 곤란에 빠트렸던 다른 연구자의 원고 대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고 또한 진짜가 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진짜와 가짜가 얽혀있다.

"아니, 그런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이 「오감도 시 제16호」가 가짜인 이유는 같이 넘긴 데드마스크가 가짜이기 때문이고 그 데드마스크가 가짜인 이유는 이 「오감도 시 제16호」가 가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잖습니까? 그렇게 치자면 이상의 모든 작품은 가짜입니다." 234쪽

둘다 위작일 수도 있지만(그럴 가능성이 거의 100%지만) 다른 연구자가 공개한 원고와 비교했을 때, 김연화 기자가 가지고 온 원고가 정황상 더 진짜 같았고, 더 완벽하게 이상의 문장을 재현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터 주는 그 원고를 공개하기로 한다. "누군가가 자신이 발표한 원고가 「오감도」 열다섯 편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빈도순으로 재배치해 엮어낸 조작이라는 사실을 어떤 식으로든 발표할 것"(242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얼핏 보면 각각의 이야기 같지만, 마치 한 편의 추리소설을 보는 것처럼 세 이야기는 모두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이 리뷰를 읽으면서 왜 이렇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적어서 리뷰를 이토록 길게 썼냐고 할텐데, 그 시시콜콜한 부분이 모두 이 이야기에 얽혀있고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이야기 곳곳에 실제와 허구가 쉽게 구별되지 않도록 교묘하게 섞어두었다. 심지어 이상의 추종자로 등장하는 '서혁민' 조차 실제로 존재한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그가 썼다는 수기(『이상의 텍스트』)로만 존재할 뿐이며, 그것 또한 문제의 서씨가 꾸민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빠의 데드마스크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유학생들이 떠놓은 것을 어떤 친구가 국내로 가져와 어머니께까지 보인 일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어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라는 이상의 동생 김옥희의 회상을 읽는 순간, 나는 어딘가에 있을 『꾿빠이, 이상』이란 소설을 떠올렸다. 그 소설을 너무나 읽고 싶었지만, 그 소설은 꿈속에서나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내가 제일 먼저 읽을 생각으로 그 소설과 아주 비슷하게 쓴 소설이 바로 여러분께서 잡고 있는 이 책이다. 「작가의 말」, 276쪽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꾿빠이, 이상』, 121쪽



왜 사람들은 이토록 이상의 삶에 매혹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의 삶에 비밀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비밀스런 그의 삶은 단순히 실존의 문제를 떠나 신화의 영역으로 스며들었고, 신화의 영역으로 스며드는 순간 그의 삶은 더욱 신비로워졌을 것이다. 그가 김해경을 죽이고 오직 이상으로만 남길 원했던 이유와 같다. 거기엔 이름처럼 '이상'을 이상화시켰던 평론가들과 전기 작가들의 역할도 컸으리라.

전기란 결국 긁어모은 허섭스레기들로 괴상망측한 그림을 짜맞춰놓은 창작에 불과해 전기 작가가 완벽한 전기를 쓰면 쓸수록 실제 인물과의 차이는 더 커지게 된다. 이후에는 강변밖에 남지 않는데, 이를 전기 집필의 딜레마라고 말할 수 있겠다. (…) 전기를 계속 쓰는 한 전기 작가는 주인공이 가치 있는 삶을 향한 의지를 잃지 않게 해야 한다. (…) 예를들어 이상이 총독부 기수직이라는 편안한 삶을 버리고 금홍과 함께 다방을 차리겠다고 나설 때, 후세의 전기 작가들은 두 손을 들고 환영한다. 이상이 창문사에서 교정을 보다가 김기림이 보고 있는 눈앞에서 창 밖으로 피가 섞인 침을 뱉을 때, 전기 작가들은 이미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써내려갈 태세를 모두 갖추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이런 이상의 면모와 모순되는 증거를 수없이 찾을 수 있다. (106~107쪽)

이 책을 상기시켜준 『일곱 해의 마지막』과 비교한다면, 두 권 모두 그 삶이 비밀에 부쳐진 시인을 다루고 있지만 이야기가 더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는 『꾿빠이, 이상』이 훨씬 더 좋았고, 이 작품들이 제발 3부작이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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