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것이 중세 시대에 유럽 인구의 1/3을 전멸시켰다는 것 정도이다. 그리고 나는 그 후 그 페스트가 뿌리뽑혔을 거라 생각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병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마릴린 체이스의 ‘환경의 역습’은 1900년대 초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뒤흔든 페스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에필로그에서는 현대에도 여전히 페스트가 존재한다는 것 또한 엿볼 수 있었다. (단, 현재는 스트렙토마이신 등의 도움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분명 약간의 지식을 전달해 주었다. 하지만 과연 300쪽에 달하는 분량을 겨우 이 정도 지식을 얻으려고 읽을 필요가 있었나 하는 회의가 든다.

  ‘환경의 역습’이라는 문제의식이 대단히 깊이 스민 듯한 제목을 하고는 있지만, 이 책은 딱히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라는 홍혜걸의 리뷰―“‘환경의 역습’은 인류가 어떻게 사스, 조류독감, 광우병, 에이즈 등에 대처해야 할지 생생한 모범답안을 보여주고 있다.”―에서 말하는 질병 대처의 모범답안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당장의 이익이 없이는 중대 사안에 대해서도 무관심을 보이고 결국 피해를 가중시키는 (미국) 정부에 대한 가감없는 관찰일지가 되어준다. 이 책에 가장 어울리는 부제를 생각하라면, ‘샌프란시스코 암흑의 10년 스크랩 자료집’ 정도일까. 일어난 사건들의 나열일 뿐이니까 말이다. 혹은 열악한 환경에서 페스트 근절에 힘쓴 이들을 비춘다는 점에서 ‘의학적 고군분투의 역사 재조명’, 아니면 샌프란시스코를, 더 나아가 미국을 위해 헌신한 ‘공중보건의 전사들에게 바치는 헌사’도 좋다. 뭐, 이 정도면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너무 쓴소리만 한 것 같은데, 나름대로 재미를 찾을 수도 있었다. 가장 많이 느낀 것은 현실의 드라마성이었다. 분명 사실을 기록한 책인데,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즈벨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세 명의 대통령을 지나는 기간 동안 조지프 키년, 루퍼트 블루 등의 인생이 어떻게 페스트와 엮이게 되었는지를 보는 것은 인생과 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했다. (게다가 태프트 대통령은 그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이 아닌가.) 또, 이즈음 우리나라는 을사조약을 맺었겠지,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겠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으니 참 묘했다. 다시 말해, 질병 이야기와는 별개로 역사의 흐름이나 정치권의 반응 같은 것을 의식해서 한 편의 역사 드라마를 읽을 수도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는 것이다. 이 책은 딱 그 정도다.

●필독 도서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절대 읽지 않았으리라 장담한다. 북 디자인이 아주 가관이다. 심지어 내가 ‘암울하다’고 표현한 바 있는 ‘광고와 대중 문화’의 표지는 애교 정도로 보일 정도다. 외양보다는 내실을 생각해야 하겠지만, 이건 정말 심하지 않은가.

●1900년도의 페스트는 중국인들을 겨냥한 듯 보였었다. 그러나 1907년 놈은 샌프란시스코의 여러 인종을 모두 공격했다. 그런데도 1900년도에나 하던 그릇된 생각들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고 지역 역사가인 프랑크 모튼 토드는 지적했다. “백인들의 장례식이라는 증거를 눈앞에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퍼지는 걸 보면 참 신기합니다.” (227쪽)
얼마전에 읽은 독해 지문에 나온 말이 생각났다. 그 지문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을 다루고 있었다. “It's a myth that we've gained social acceptance in this society.(우리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허구일 뿐입니다.)”

●문제의식이 스민 듯한 제목은 한국 출판사의 판매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 원제는 내용과 매우 어울리는 ‘The Barbary Plague : The Black Death in Victorian San Fransisco'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6-01-24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1-25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明卵 2006-01-25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4일 귓속말님, 반가워요!! ;ㅂ;~ 그렇군요;; 자유분방! 전 이 책이 왜 필독도서로 선정되었는지 통 모르겠습니다^^;

25일 귓속말님, 잘 지내셨어요? ^^ 거 참, 점점 이 책이 싫어지고 있습니다.
 

  읽은 지 꽤 됐는데... 문득 기록장에 올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굉장히 감명깊게 봤는데, 책에서 받은 감동은 그보다 조금 덜했다. 세상은 결코 나누어져 있지 않다. 하나의 큰 진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난 묘지가 무섭지 않아. 죽은 사람들은 너하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똑같이 원하는 사람들일 뿐이야."
  그가 말햇다.
  "우리가 원하는 게 뭔데?"
  나는 몽롱하게 물었다.
  "이런, 자식, 너도 알잖아. 우리가 원하는 건, 그러니까, 지금 여기 누워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똑같아."
  "그게 뭐냐니까?"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사는 거라고 생각해." (84쪽)

죽음은 세상과 좀 떨어진 곳에서 이 세상의 계속되는 역사에 참여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램프와 가구가 있는 방에서 친구들이 더 이상 내가 아닌 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 자리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태로 있는 것. 죽음도 이것과 비슷할 것 같았다. (257쪽)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 과거 속에서만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들이 끝나지 않는 현재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 믿는다. (364쪽)

죽은 사람들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들이 한결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천 년이 지나도 지금과 똑같이 죽어 있을 것이다. (429쪽)

나는 그가 병에 걸린 것 때문에 그에게 화가 나 있었지만, 동시에 내가 만약 병에 걸렸을 때 남들이 나를 보살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그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535쪽)
 ->때로 돕기 싫은 일을 도울 때, 나는 생각하곤 한다. 이 상황에 내가 빠졌을 때, 나는 얼마나 도움을 바랄까.

그러나 이 집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고, 레베카가 스무 살이 됐을 때에도 여전히 여기 서 있을 것이다. (563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울보 2006-01-24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란님 방학이시군요,
그래도 바쁘신가 봐요,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이제 2학년이네요,,에고 점점 힘들어지시겠네요,

明卵 2006-01-24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ㅂ^ 방학인 건 맞는데, 아직 학교입니다. 보충수업이 있거든요.. 지금은 자습시간이고요, 멀티실이랍니다.
 

  엄마의 첫번째 개인전을 하고 있다. 서면 롯데백화점 지하2층 롯데화랑에서, 1월 6일에서 12일까지. 어제도 오늘도 다녀 왔는데, 내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다.

  엄마는 거실에서 작업을 하신다. 올해 여름은 특히, 집에서 유화 냄새가 질 날이 없었다. 엄마는 항상 나와 민이에게 미안하다고 하신다. 하지만 난 그림을 그리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는 게 가장 좋다. 유화 냄새 속에 지낼 수 있는 것도, 예술가의 상담을 해줄 수 있는 것도 모두 엄마의 딸이라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얼마 전까지 집을 가득 채우고 있던 엄마의 그림들로 가득한 전시장 안에서 본 엄마는, 내가 이제껏 본 모습 중에 가장 아릅답고 당당해 보인다.

  어머니,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미달 2006-01-0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정말 대단하세요. ^^
부산에 살았으면 꼭 한번 가보는건데.. 축하합니다.

울보 2006-01-07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화가 이셨군요,
음,,멋진 어머님이시겟네요,
어떤 그림일지 참 궁금하네요,,
저도 축하드려요,

마태우스 2006-01-07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려요. 예술가 딸이라 그리도 감수성이 풍부하시군요!

BRINY 2006-01-08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어머니와 멋진 딸이세요!

어룸 2006-01-08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정말 축하드려요!!! >ㅂ<
아...부산에 살면 꼭 가볼텐데...^^

明卵 2006-01-0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오늘도 전시장에 있었어요 흐흐.. 이상하게 제가 다 들떠 있어요^^;

파란여우 2006-01-09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란님이 제 조카인게 확실해요!
어머니의 함자가 저와 두 글자나 겹치잖아요...
그러니 축하는 당연히 제가 젤 많이 드려야 합니다. 기쁨도 크지요.
담번에는 어머니의 그림 구경도 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실꺼죠^^

明卵 2006-01-26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그렇군요^^~ 흐흐, 역시 이모셨어요..
곧 그림 사진 올리겠습니다!
 

금요일 밤, 그러니까 7일 오전에, 누구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다가, 하나 둘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기숙사 불이 꺼져서 나도 그만 잘까 하던 차에 핸드폰이 울렸다.
불꺼진 방에 앉아 핸드폰에 찍힌 이름을 보면서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 전화, 안 받아주면 안 될 것 같아.
여보세요.
여보세요. 침울한 목소리가 들린다. 안 잤네. 미안하다, 자는데 전화해서.
안 잤어. 알잖아, 나 자습시간에 자고 밤에 팔팔한 거.
하긴 그렇긴 하지...
목소리가 왜 그러냐. 기운 없어 보인다.
그냥, 위로 좀 해달라고 전화했다.
그리고 우리는 정해지지 않은 미래와, 미래는 온다는 정해진 사실 사이에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위로해달라고 전화했다는데, 오히려 내가 위로받은 기분.

잘 자라며 전화를 끊고 몇 분 뒤, 문자가 왔다.
후 그래도 잠이 안오네
노래라도 불러주랴?
답이 없다.
그냥, 내가 부르고 싶어서 이번엔 내가 전화했다.
노래 불러줄게.
들어주마.
귀를 기울이며의 '컨트리 로드'를 불렀다. 친히 뜻풀이까지.
고맙다.
머릿속에서 자장가로 삼다가 내일 아침되면 잊어버려라.
그리곤 전화를 끊고, 아직 안 자는 친구 방에 기어들어가 곧 잠들었다.

어쩐지, 고마운 느낌이다.
우리 반 친구들을 제외하면, 내 싸이코적인 면을 가장 많이 보여주는 놈이랄까.
역시, 뭔가를 저지르는 건 언제나 밤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태우스 2006-01-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도 밤에 자는 게 너무도 억울합니다^^

BRINY 2006-01-08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 명란님네 학교도 기숙사반은 방학 없이 학교에서 보내나요? 그래도 핸드폰은 허용되나 보네요. 울 학교 기숙사반은 통제가 무척 심해서 핸드폰, PC, TV 다 허용 안되는데.

明卵 2006-01-08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는 전원 기숙사제입니다^^ 방학 중 보충은 선택에 따라 듣고요, 보충 수업을 들으면 대부분 기숙사에서 지내요. 멀리 사는 사람이 많아서 집까지 가는 건 체력 낭비니까요. 핸드폰 허용되고요, 기숙사에서의 생활에 그다지 제재를 가하지 않아요. 노트북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던데... 그래도 TV는 못 봤어요^ㅂ^;

파란여우 2006-01-09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죠^^
 

  아, 간만에 정말 재밌는 영화 한 편 보았다. 2005년 하반기에 극장에서 본 영화들 중 가장 좋은 작품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하겠다. (참고로 두번째로 좋은 작품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다.) 내용과 화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작품은 얼마나 나기 어려운가!

  <웰컴 투 동막골>, <형사>같은 작품은 현대적인 분위기와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로 화면을 가득 메워 '색깔'이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던 반면, <왕의 남자>는 모든 색채가 스크린 한 장에 조용하게 녹아들어 한 장면을 이루고 있는 느낌이었다. <웰컴 투 동막골>, <형사> 두 작품을 보면서 옛날을 배경으로 찍어도 채도가 높은 색채로 찍는 게 트렌드인가, 하고 생각했었는데 <왕의 남자>에서는 그런 느낌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화려함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채도가 높은 색상에 안개를 덧입힌 듯한 느낌의 색상을 사용해 화려함은 유지하면서도 색깔이 튀어나오는 감을 줄여주어 서로 어울리도록 하고 있었다.

  또 내용면에서 <왕의 남자>는 광대와 궁중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소재를 잘 이용해 2시간을 한 순간간도 지루함이 없이 이끌어갔다. 특히 끝을 어떻게 맺을지가 궁금했는데 적절한 선에서 결말을 냄으로써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를 지은 것이 내용 구성에 큰 플러스요인이 되어주었다. 이 내용을 살려낸 배우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장생'역의 감우성의 연기를 필두로 '육갑'의 유해진, '칠득' 정석용, '팔복' 이승훈의 연기가 분위기를 살리는 데 가장 큰 몫을 했다. 뿐만 아니라 '장녹수'역의 강성연, '연산군' 정진영, '공길'역의 이준기 역시 약간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런 여러가지 요소들이 더해져서, <왕의 남자>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2005년 하반기를 장식하는 최고의 영화로 거듭나게 되었다. 혹시 제목때문에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영화관에 한 판 크게 "놀러" 갔다 와 보라. 그들의 판은 볼 가치가 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루 2005-12-30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어제 봤는데 참 재밌게 봤어요.

놀자 2005-12-30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다음주에나 되서야 볼 수 있을듯...다들 평이 좋네요~ 기대기대+_+

明卵 2006-01-01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제 또 봤습니다^^ 한가지에 빠지면 헤어나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지금 머릿속에서 무한 반복되고 있어요.

어룸 2006-01-08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보고싶은데 두번씩이나 보셨다니 느무 부럽심당!! 저도 꼬옥...>.<

明卵 2006-01-0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옥>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