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오전 3시 15분, 마드리드
마드리드의 P 집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거실 한 켠 시트를 씌운 소파가 내 자리다. P를 비롯한 다섯 여자가 사는 집이지만 이 시간만큼은 이 집에 내 자리, 랄 것이 생긴다. 어젯밤 비행기 연착으로 지친 상태에서 앞으로 일주일 동안 내가 잘 곳을 봤을 때는 그렇게 초라하고 불편해 보일 수가 없었는데 하룻밤 곤히 자고 나니 여기도 썩 편안하다. 마음 뉘이기에는 온전한 내 것이 제일 좋다.
비행기를 혼자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덩달아 공항에 가는 기차도 생경한 것이 되어버렸다. 기차라면 줄기차게 혼자 탔는데도 말이다. 내가 프린트한 표가 맞는 표인지, 내가 기다리는 곳이 맞는 곳인지부터 시작해서 아주 사소한 것들이 걱정되고 불안했다. 매번 기차 시간표나 내 티켓, 여권 같은 권위 있는 어떤 것들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놓고, 또 다시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두 시 사십 분 기차. 지는 햇살이 반대편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와 캐리어 손잡이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지정석이 없는 기차에서 나는 네 자리를 차지했다. 의자 네 개만큼의 공간이 내 몸뚱이와 캐리어 하나로 모자란 듯 찼다. 내 공간 안에서 나는 아까까지 시간표를 몇 번이고 확인한 적도 없거니와 이런 여행은 아주 이골이 났다는 듯 무심한 표정을 연출했다. 기차 안의 사람들은 서로의 공간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나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노래를 듣다 졸다, 문자를 하다 졸다 그렇게 체크인 마감 한 시간 전에 루턴 공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면 바로 공항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버스를 타야 했다. 그 순간 간밤에 샤워하고 잔 줄 알고 아침 알람에도 잠을 더 청했던 내 자신과, 늦게 끝난 수업과 점심으로 내가 고른 길쭉한 바게트 샌드위치까지 다 원망스러웠다. 한 시간 전에 도착해야 하는데, 삼십 분 전에 도착한다면 무슨 낭패란 말인가? 이제는 더 이상 무심한 자신을 가장할 수 없어 초행길에 오른 수줍은 동양 여자—말하기 부끄럽지만 그때의 심정을 그대로 쓰기로 한다. 이곳에서 나는 스스로를 동양 여자라는 카테고리에 꽤나 자주 넣곤 한다—로 컨셉을 바꿨다. 물론 다닥다닥 붙어 선 버스 안의 사람들도 서로의 공간에, 혹은 이 경우 그냥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여기 와서 P에게 듣고 안 사실인데 나는 짐이 하나라 체크인 마감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 여행에서 유로스타를 놓친 사람은 한번쯤 이렇게 안절부절 일찍 도착하는 게 예의인 것 같다.)
순조롭게 모든 절차를 마치고 라운지에 들어섰다. 제일 앞의 전광판은 고장이었다. 갑작스레 런던에 눈이 와서 혹시나 결항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터라 이륙 시간표를 지금 당장 보고 싶었다. 다음 전광판을 찾았다. 네 시 오십오 분 마드리드. 그리고 옆에 빨간 줄이 주욱 그어졌다. 악… 줄을 헷갈린 거라고 믿고 싶어지던 찰나, 그냥 이륙이 늦어진다는 문구가 따라 나왔다. 원래 이륙 시간보다 한 시간도 일찍 도착했는데 45분이 더 늦어진다는 얘기였지만 그래도 결항이 아님에 감사했다.
공항이 작아서 구경할 것도 별로 없었다. 금방 둘러보고 어딘가 앉기 위해 스타벅스를 찾았다. 겨울 한정 ‘에그노그 라떼’를 마셔보고 싶었는데 안 팔았다. 다시 나왔다. 내가 에그노그 라떼를 주문해서 나오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다시 방황하면서 이번에는 맥주의 강한 유혹을 느꼈지만 참아냈다. 짐 들고 화장실 가기가 너무 싫어서였다. 하지만 목은 마른지라 스무디와 생과일주스를 파는 가게에서 웬 Early Rise라는 이름의 자몽이 들어간다는 주스를 마셨다. 시고 달았다. 자몽이 들어갔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이까지 썼는데 동거녀 J가 돌아왔다. 이 집 사람들 중 가장 붙임성이 좋다. 나와 프랑스어로 대화하려다 영어로 바꾸곤 하는 인물이다. 방금 대화하다 알았는데 콩고 출신이고 부모님이 스와힐리어를 쓰신단다. 내가 스와힐리어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란 눈치다. 스와힐리어를 배우고 있다고 말하면 누구나 그런 반응을 보인다. 물론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말해도 놀라지만 스와힐리어의 스타성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언어를 배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건지 아니면 그 주체가 나라는 게 놀라운 건지 종종 궁금해지곤 한다. 여기서 ‘나’란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유럽에 온 동양인이다. 아 그나저나 이런 복잡한 문제를 찬찬히 생각해보기에는 너무 졸리다. 오늘의 일은 내일로 미루고 잠을 청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