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0일 오전 11시 55분, 마드리드
이 집에서 세 번째 샤워를 했다. 이제는 욕실에 가기 전에 화장품을 어떻게 정리해 놓을지, 뭘 들고 가야 하는지 어떤 순서로 씻고 나올지 패턴이 다 정해졌다. 앞으로 세 번, 더 씻을 일이 남았다.
감기가 악화되었다는 P의 목소리에 일어나 넓데데한 그릇에 시리얼을 잔뜩 먹고 길을 나섰다. 동행이 있는 오늘, 레가즈피 역은 어제 한 바퀴 헤매던 곳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매일같이 지하철을 탔을 P가 민망해질 만큼 사진을 찍어대면서 동행이 있음을 과시했다.
그 손이 이끄는 대로 일요일 아침에 열린다는 라스트로 시장에 갔다. 런던에서 쭈비와 가 본 시장이란 먹는 것, 먹는 것, 그리고 먹는 것으로 끝나는 식도락 여정이었기에 이번에도 그런 느낌일까 생각했는데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일단 거기에서는 먹을 것을 팔지 않았을 뿐더러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대열을 따라 휩쓸리듯 걸으면 되었다. 소란스럽게 외쳐대는 스페인어와 길을 메운 관광객들의 외국어가 섞이고 위로 올라가는 사람과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이 뒤섞여서 아주 혼잡했다.
온통 스트라이프 무늬 옷들만 걸려 있는 집, 플라멩코 부채 집, 질은 나쁘지만 색상이 정말 다양한 가죽 가방을 파는 집, 수많은 스카프 집들, 계속 이어지는 비슷한 노점들을 구경하는 와중에 P는 귀국 준비를 했다. 기념품을 사는 P의 옆에 서 있으면서도 곧 그가 자기 ‘집’에 돌아갈 거란 것이 믿기지 않았다. (최근 여행을 다녀온 뒤 페이스북에 ‘집 도착!’이라고 남겼더니 누군가 한국에 돌아간 거냐고 물어왔다. 어느새 내겐 런던이 집이 되었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는데, 이럴 때 보면 또 참 잠시 머무는 곳 같기도 하고.) 가장 먼저 서울의 형체 없는 ‘집’이 떠올랐다. 인천 공항에 내리는 순간과 서울의 나를 키운 8할인 학교의 모습과 얼굴 없는 친구들의 모습이 이어지고 곧 아주 구체적인 우리 집, 부산 집의 모습이 그려졌다.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시장 끝자락에 웬 물고기 프린트 티셔츠 집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흰 티셔츠에 물고기 캐릭터가 그려진 익살스러운 티셔츠들을 파는 곳이었는데 뭐가 그리 로맨틱한 바람이 불었는지 N 것까지 커플로 사버렸다. 커플로 뭐 다른 것도 아니고 티셔츠라니, 그런 오그라드는 짓은 여행 와서 한껏 기분이 업 되었을 때 해 줘야 제 맛이라며 스스로 자기합리화를 마쳤다. 그래, 그래도 그 옷을 제값 주고 샀다는 건 참 나다운 일이다.
마요르 광장을 지나, 초콜라테리아 산 히네스San Gines에서 츄러스를 먹었다. 비가 온다던 하늘은 파랗게 맑기만 했고, 햇살이 비치니 별로 춥지도 않아서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워낙 게눈 감추듯이 금방 먹기도 했지만 12월에 밖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몸이 굳지 않을 수 있다니 감격했다. 게다가 푸른 하늘! 런던은 드높은 악명만큼 비가 많이 오진 않지만 확실히 날이 많이 흐린 도시다. 깔끔하게 푸른 빛을 내는 하늘을 바라볼 때, 햇살이 눈을 부실 때 행복에 겨운 강아지같이 헥헥거리게 되는 나 자신을 보면 알 수 있다. 평소에 런던이 우울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데 해 앞에서는 자동적으로 무력하리만치 녹아버린다. 태양이 녹인 것 같은 초콜렛이다, 생각하기도 전에 츄러스는 종적을 감추었다.
시원하게 뚫린 그란 비아는 햇살과 잘 어울렸다. P가 ‘마드리드에 이런 곳도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간 카페 씨르코Circo에서는 피에스타가 한창이었다. 말하자면 파티였지만 P는 좀처럼 피에스타를 대신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축제라고 말해버렸다. 그 작은 카페 안에서 축제가 한창이었다. 흠. 영어도 우리말도 퇴보하고 있다는 그는 아쉽지만 그래도 마드리드에 이런 곳도 있다는 걸 알아달라고 재차 강조했고, 우리는 스타일리쉬한 카페 문을 나서야 했다.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들른 다른 곳은 르 뺑 코티디엔 Le Pain Quotidien이었다. 런던인지 파리인지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데 마드리드에서야 가 보게 되었다. 프랑스 이름의 빵집이라면 괜히 신뢰감부터 생기는 마음에 빵을 먹을 것도 아니었지만 신이 나서 들어갔다. 널찍한 홀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귤이 함께 나오는 레모네이드와 커피를 시키고 마주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식사 메뉴를 하나씩 시키고 앉아 점심을 먹는 분위기였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다 맛있어 보이던지…. P와 나는 꼭 다시 와서 식사를 하자는 약속을 했고, 나는 이 순간 세고비아에 갈 생각을 접었다.
에스파냐 광장의 큰 분수와 수제품 시장을 지나, 어딘가 어설프게 손질된 사바티니 정원을 지나 왕궁 앞에 있는 씨엔 몬타디토스 100 Montaditos에 들어갔다. 마드리드에만 지점이 있다는 이 가게에서는 몬타디토스라는 짧달막한 샌드위치를 팔았다. 여러 맛을 먹어보려고 아까까지 먹은 건 생각도 안 하고 일곱 개나 주문했다. 주문한 다음 음식을 찾으러 갈 때 ‘놈브레?’라는 질문을 알아듣고 내 이름을 똑똑히 말한 게 퍽 자랑스러웠다. 클라라Clara라고 불리는 레몬주스 탄 맥주 한 잔도 곁들였는데, 내가 왜 빵과 우유를 먹으면서 속이 불편했는가에 대한 답을 얻었다. 빵은 맥주랑 먹는 거였다.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하며 어젯밤 슈퍼에서 본 배 나온 아저씨를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간만에 아주 늦은 시간에 맞이하는 해질녘이었다. P의 외침에 왕궁 너머의 해지는 풍경을 보게 되었다. 기분 좋은 하늘을 보여주던 날이면 런던의 해질녘도 이렇게 마법 같은 풍경을 연출하곤 했다. 구름이 이루어내는 분홍과 주홍빛이 옅은 푸름 속으로 겹겹이 스미는 하늘은 마치 이곳의 단풍처럼 은은하고 사랑스러우리만치 아름답다. 알무데나 성당의 청색 벽에도 하늘빛이 드리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P가 거의 한 해를 마드리드에서 살면서 그 이름을 몰랐다는 비야 광장을 지나고, 산 미구엘 시장을 지나고, 여전히 꼬맹이를 무등 태운 아버지들이 있는 마요르 광장을 지나고, 쏟아질 것 같은 노란 조명이 가득한 마요르 길을 지나자 푸에르타 델 솔의 큰 트리가 보였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서 켜진 조명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촌스러울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색깔로 조명을 장식한 이 도시의 센스라는 게 그 순간에는 참 우스웠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마요르 광장에 모인 잡스러운 거리예술가들에게 꼭 어울리는 색깔이었던 듯도 하다. 그 잡스러움 속에 경쾌함과 어딘지 모를 정겨움이 있었던 듯 한 것이다. 단정하고 세련되지는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숨 쉴 공간을 주는, 그 만큼의 적당한 촌스러움은 지금까지 내가 느낀 마드리드의 모습과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