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클럽활동으로 뮤지컬반에 들었었다. 첫시간에 한 것은 으레 그렇듯 자기소개 였는데, 내가 지긋지긋하게 여기던 학기 초의 그것과는 좀 달랐다. 옆에 보이는 것 처럼 하얀 A4용지를 이용하라는 거다. 황당. 그냥 이름이나 말하고 들어오면 되겠지 생각하던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런 걸 시킬줄이야. 나를 뮤지컬반으로 이끈 친구를 원망하며 어떻게 이 종이 한장으로 나를 드러낼 수 있을지 고민해봤다. 다른 학생들은 접어도 보고 그림도 그려가며 열심히 자신을 표현할 준비를 하는데 내 앞의 종이는 여전히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첫번째로 떠올린 것은, 정말 성의없게도, 종이에다 이름을 대문짝만하게(그래봤자 A4용지보다 더 커지겠냐마는) 적어서 칠판에다 떡 붙이고는 이것이 내 이름 석자요 하는 거였다. 이랬다간 절대로 인상 못 남겨. 바로 탈락됐다.

두번째로는 종이접기와 그림에 걸어볼까하고 생각했다. 컵이라든가 리본, 배 같은 것들을 차례로 만들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이렇게 말한다. "이 종이로는 다른 종이로 다 할 수 있는 종이접기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여러가지를 만들 수 있죠. 하지만..." 그리고 여러가지 색깔의 펜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것이 흰 종이, 아무것도 없는 백지이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색깔을 모습그대로 보여주며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색 종이로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이 흰 종이와 같습니다.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가졌고 마음이 넓어서 어떤 사람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썩 좋은 아이디어라고 느꼈지만 벽에 부딪혔다. 내가 접을 수 있는 게 몇 안 된다는 것, 또 주어진 종이는 한 장 뿐인데 여러 가지 만들기를 하려면 만들어 나갈 수 없어서 사람들 앞에 서서 접어야 한다는 것. 시간이 많이 걸릴 게 뻔하고, 지루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터였다. 결국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른 생각으로 옮겨갔다.

세번째, 마지막으로 한 생각은 종이를 찢어보자 였다. 그런데 무슨 소리를 하면서 찢지? 그래. 이 종이를 하늘이라고 하자. 교탁과 수평이 되게 종이를 들고 있다가 "하늘이 우리 위에 있었습니다. 모두 평온한 하늘 아래 행복했지요."라고 하는 거다. 운이 좋으면 흥미를 가져줄 거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무너져내렸습니다." 종이를 손으로 쿵 소리 내며 내려놓는다. 관심 없어도 일단 한 번 쳐다보겠지. "사람들은 혼비백산, 정신을 못 차리고 구멍을 찾아 뛰어다닙니다. 어딘가, 어딘가에 구멍이 있을 거야! 물론 구멍은 보이지 않고, 곧 있으면 하늘에 찌부러져 죽을 판입니다. 사람들은 신을 원망하며 구멍을 찾을 생각만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릅니다. 저는..." 종이를 죽죽 찢는다. "하늘을 뚫고 나옵니다! 마냥 기다리지 않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 하늘을 찢는 파워가 있는 사람, 바로 저 하명란입니다." 재밌을 것 같았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다른 걸 생각해냈을까? 아무튼, 저까지 생각했을 때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나는 세번째 생각으로 나에 대해 이야기했고, 생각보다 더 많은 호응을 얻었다. 나 스스로도 꽤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이 나를 주목해주는 게 기분좋아서-사실은 거의 정신이 없었다.- "하늘을 뚫고 나옵니다!"를 말할 때 찢은 종이를 큰 행동으로 흩뿌려버려 자기소개 시간이 끝나고 치운다고 고생한 건 문제였지만.

내가 한 저 소개는 너무 잘난 체 하는 게 기분 나쁘다고? 하늘을 어떻게 찢니, 라고? 장점을 한 가지 말할 때마다 꼭 단점이 한가지씩 붙어나오는 소개를 들어본 적 있다. 자기의 약한 점을 잘 알고 있다는 건 훌륭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무지 재밌게 하지 않는 이상 긴긴 이야기를 하는 건 사람들의 집중을 흩뜨리기에 딱 좋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내 또래 학생들은.) 내가 누구인지 말하는 데, 꼭 단점을 밝히라고 하지 않은 이상, 좋은 점만 말하기도 벅차지 않나? 좀 재수없게 보이더라도 말이다. (솔직히 그게 왜 그리 재수없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좋은 것 좀 말한다고 남한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늘 개학해서, 할 일 없이 책상앞에 멍청하게 앉아있다가 옛 일이 떠올라서 적어봤다. 음... 한번 생각해볼만 한 일이다. 꼭 A4용지가 아니더라도, 갑자기 뭘 하나 내주면서 이걸로 당신이 누군지 말해봐! 라고 하면 나는 나의 어떤 점을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 나의 너그러운 면? 나의 재미있는 면? 나의 귀여운 면? 지금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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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im 2004-02-13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아주 멋진 자기 소개네요... 멋진 퍼포먼스..
저는 아직도 자기소개하라면 언제나 쭈삣거리다 마는데;; ^^

플라시보 2004-02-1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저는 글쎄요. A4용지를 한장 주면서 소개를 해 보라고 하면 그냥 자기 소개서 따위나 끄적거리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흐흐

만월의꿈 2004-02-13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는.. 못하겠는데요,;;;; 그 단시간안에 그렇게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리시다니.. 대단하십니다.

_ 2004-02-13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자개소개, 그리고 A4지 하나 딸랑 주어졌다면, 그래서 요즘의 저를 소개해야 한다면 종이를 갈갈이 찢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무렵 명란님의 '세번째'를 읽었습니다. 저랑 그 의미는 다르지만 행위가 같아(?) 일면 놀랬고 또 일면 우습네요 ^^ (물론, 많은 이들 앞에서 그렇게 할 자신은 없습니다만.;;;)

책읽는나무 2004-02-13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과히 명란님의 재치가 넘치네요...그짧은순간에 시선을 압도할수 있는 강력한 그무언가를 생각해낸다는건 정말 아무나 할수가 있는 일은 아닌듯해요....그리고 옆에서 쭉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버드나무님이랑 명란님은 뜻이 잘 통하는것 같구요...ㅋㅋ....참 이생각도 나네요..제가 고1때였나??...암튼 미술시간에 한번은 선생님이 과제를 내주시길...흰스케치북에 자신의 내면상태를 그려보라고 하시면서 담주에 그것을 들고 발표를 하라는 과제를 내주셨는데..좀 황당하더군요...근데 좀 괴짜기질이 있는지라...좀 이런 특이한 수업을 좋아했었던것 같아요...지금도 그렇지만...^^....암튼...그림소질이 없는 저로서는 영 반가운게 아니었죠...아주 유치한 그림을 몇개 그려가지구서 앞에 나가서 뭐라고 뭐라고 주절주절 했더니....첨에 내그림 보고 인상 찡그리시던 선생님왈...."꿈보다 해몽이 낫다~~"....그때 딱한번 높은 점수를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물론 저뿐만 아니라...높은 점수 받은 사람도 많았지만요...암튼...그때 그기억이 얼핏 나는데.....님처럼 저렇게 A4지에 자기소개를 하란 명제가 주어졌을땐 저또한 그냥 자기소개서 적고 있는 저자신을 발견할것 같네요..ㅎㅎㅎ

明卵 2004-02-23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소개라고들 해 주시다니... 저는 '훗, 그정도니?'하면서 더 번뜩이는 자기 소개방법을 적어주실 거라 생각하고 잔뜩 쫄아있었는데요.^^ 다들 컴퓨터 앞에 앉아있어서 그렇지, 아마 그런 일이 진짜 닥치면 훨씬 대단한 소개를 해내실 것 같아요. 자신의 장점을 꼭 집어서 다른 이의 뇌리에 박아놓을 수 있는 그런 거요. (그러고보니 저거 하고 나서 부원들이 제 이름은 몰라도 얼굴과 소개내용은 기억하더군요. 하늘을 찢는 괴력의 여인이라고..ㅎㅎ)

明卵 2004-02-13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나무님, 그것도 참 재밌을 것 같습니다. 내면을 나타내라니... 갑자기 그 (님의 말에 의하면) 유치한 그림 몇 개가 보고싶어집니다. 전혀 유치하지 않을 것 같은.

윤언경 2004-02-15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자기소개 한번 특이하네 언니.. 난 새 학년 올라가서 자기소개 하라고 하면 아직도 이름, 나이(당연한거-0-), 취미, 특기, 가족관계 밖에 안하는데=_=;;; 그래도 제일 마지막 멘트는 있는말 없는말 다 넣어가면서 주저리를 한다지.;

박경애 2013-09-03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빵터졋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명란아
한장 자기소개 구글링햇다가 니꺼나옴
나 깜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