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무슨 우리 아이가 첫 발걸음을 뗐다는 식으로 뭔가 호들갑스럽다.

  7월 2일은 학점이 나오는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날(?) 새벽 4시에 잠을 청했다. 10시 전에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일찍 일어나버리면 학점이 뜨는 10시까지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나는 전혀 나답지 않게 7시, 8시, 9시, 9시 24분, 9시 33분에 잠을 깨는 기이한 모습을 보였다. 매번 눈뜰 때마다 다시 잠을 청했지만, 9시 24분에 이어 33분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도저히 더는 잘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적이 전부 B로 뜨는 악몽을 꾸면서 어떻게 더 자겠느냔 말이다. 아침을 먹고 어영부영 하다보면 10시가 되겠거니,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반찬은 김치찌개였다.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집에서 만든' 김치찌개. 전날 밤 몇 숟가락 국물을 떠 먹고는 좋다고 아침에 먹을 일을 그리던 그 김치찌개였다. 여전히 맛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숟가락을 들고 김치찌개를 코로 넣는지 입으로 넣는지, 김치를 씹어 넘기고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을 겨우 다 먹었는데, 아니 10시까지 10분이나 남은 게 아닌가. 난 아침밥을 그냥 마셨단 말인가? 그래서 일단 컴퓨터를 켜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일단 만화책을 읽자고 생각하며 전날 빌린 <파파 톨드 미>를 잡고 있었다. 몇 장 넘기고 고개를 들면 겨우 1분이 지나 있는 식으로 5분을 보내다가, 아, 이제 시계를 보지 말고 이 만화책을 다 읽고 확인을 하러 가자, 릴랙스 릴랙스, 라고 생각하며 만화책에 집중(하는 척) 했다.

  그러나 곧 어디선가 익숙한 알람소리가 들려왔다. 그랬다. 10시에 일어나려고 10시에 알람을 맞춰둔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런... 릴랙스는 무슨. 읽던 만화책을 집어던지고 얼른 컴퓨터 앞에 달려가 앉았다. 그리고 접속 폭주로 인한 서버 마비를 20분의 클릭질 끝에 극복해낸 나는 보고야 말았다, 나의 학점을 !



  헐.

  헛것을 본 줄 알았다. (사실 10시 20분 경에 봤을 때는 아직 문학과대중예술 점수는 안 떠 있었다.) 오류가 난 게 아닐까? 친구들과 네이트온을 하는 손이 떨렸다. "야... 나 아직 안 뜬 거 하나 빼고 다 A+ 야..."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서 나는 또 말할 수 있었다. "야... 나 올 A+야... 평점 4.5야..."

  나는 학점을 잘 받고 싶었다. 놀기는 많이 놀았지만, 그래도 아주 이기적이게 학점도 잘 받고 싶었다. 그런데 학기 초에 이런 말을 듣고 나는 좌절한 적이 있었다. '공부와 학점은 비례하지 않는데, 술과 학점은 반비례한다'는 말. 아니 그러면 인주련(학교 인근 주민을 일컫는 말. 이들은 학기 초에는 선배들의 술자리에 불려 나가고, 후에는 스스로 술자리를 만드는 일을 담당한다.)인 나는 학점 잘 받을 생각은 버려야 한단 말인가? 크나큰 절망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빡세게 놀기로 했다. 에잇, 어차피 못 받을 학점 !

  그런데 이런 결과라니. 기분이 정말 좋으면서도 얼떨떨하다. 모두가 피하라고 했던 문학으로 시간표를 채운 나를 보며 많은 이들은 혀를 찼지만 나의 선택은 옳았다. 문학 수업은 읽으라는 책만 잘 읽고(비록 교양 한 수업에서 <감정교육>, <목로주점>, <거꾸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스완네 집 쪽으로->, <인간의 조건>, <전락>을 다 읽고 독후감 쓰게 만들지라도), 써 내라는 것만 열심히 써내면(비록 그것이 아도르노가 말하는 초월성의 관점에서 시를 분석하거나 그림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묘사하는 것일지라도)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는 거였나보다. 아니면 내가 08학번 치고 서술형 문제를 너무 뻔뻔하게 써 내서 교수님이 어이가 없고 귀여운 나머지 A+를 줬을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은, 내 시험지를 돌려 받아서 다시 읽어보는 것이다. 대부분 시간의 압박에 거의 뇌를 거치지 않고 손으로만 써내려가는 기분으로 썼기 때문에 내가 어떤 말을 지껄여놨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참 궁금하다. 그리고 교수님들께 여쭤보고 싶다. 내 답안과 대 과제가 어떤 점에서 A+를 받을 만했는지 말이다. 불만인 건 전혀 아니고 소박한 피드백을 바라는 것이다.

  흠... 긴 이야기를 했지만 결론은 내 자랑이다. 난 대학 가서 탕아처럼 논 기억밖에 없어서 서재질을 못할 정도로(혹시나 가족 중 누군가가 보면 큰일이니까) 그렇게 놀고 4.5를 받았다! ...는 거...히히히^0^..ㅋㅋㅋ 2학기가 좀 걱정이 되긴 하지만 일단 지금은 그저 즐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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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8-07-03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랑하셔도 되지요. 역시 명란님입니다.

울보 2008-07-0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축하해요 명란님 역시

2009-01-06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