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분명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달라도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지만 계속 지켜나가기가 쉽지 않다. 넝마주이도, 장애인도, 외국인 노동자도 모두 결국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순간'이다. 무의식적으로 '순간'을 지배해버리는 나의 생각은 그들의 이름에서 '사람'보다 '다름'을 중요한 것으로 만들곤 한다. 우리 학교 경비 아저씨가 생각난다. 우리는 왜, 다큐멘터리에는 동정심을 느끼면서, 때론 눈물짓기도 하면서, 현실의 소수자들과 어려운 이들은 똑바로 보지 못할까? 이는 분명, 우리에게 '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보여주는 척 하면서 마음대로 왜곡해버리는 눈이, 우리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눈의 이름은 '편견'이다.
아무도 나를 사랑할 수 없으리라 하는 생각을 떠올리던 내게,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그 말 한마디는 나의 모든 것을 내놓게 만들었고, 나의 목숨을 걸게 만들었다. (40쪽)
⇒이렇게,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은 순간적으로 나온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다. 그리고 분명, 순간적으로 나온 또다른 말 한마디가 가장 깊이 '사람'을 상처입힐테지.
"선생님은 이 다음에 늙으면 할머니가 돼요, 할아버지가 돼요?" (64쪽)
(101쪽) '자원 재생 공사'에 대해 읽으면서, 정책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믈 느꼈다. 복지 정책을 시행하고, 그것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삶의 질이라는 것이 전국민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오히려 본래의 목적과 상반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았다. 정책의 손길이 닿지 않는 저 밑바닥 민생은 더 힘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경상이가 떠나면서 남긴 말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다. "내 생애 가장 값진 체험이 될 것입니다." (103쪽)
⇒삶이라는 것은 욕심으로 가득차서, 고통을 부른다. 그 욕심이 세상을 굴러가게 하고 있지만, 세상 따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삶, 그것만 놓고 보면 그 욕심은 왜 그리도 무의미한지. 값진 체험이 끝나도 삶은 계속되고, 삶과의 연도 계속된다. 그 '계속'되는 안에서는 어떤 삶이 이어지는 걸까. 궁금하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교도소하면 인간 쓰레기, 무시무시하고 잔인한 무리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 인간이 비인간적인 죄를 저지르고 죄값을 치르느라고 강제 수용된 장소쯤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반드시 그런 곳만은 아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이 그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245쪽)
나는 '사이버 코뮤니스트'다!라는 글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자살 사이트에 대한 언론 및 세간의 비판에 "우리는 왜 국가의 명령대로 '살아야만' 하는가? 우리는 우리 의지대로 스스로 죽으면 안 되는가? 죽겠다는데 국가가 왜 나서서 지랄하는가? 왜 국가나 언론 매체들은 그것을 그렇게 두려어하는가?(278쪽)" 라고 되물었다. 이 글의 내용은 다 그랬다. 그는 다소 격앙된─때로는 조금 심하게 격앙된─ 목소리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반론을 제기했다. 왜 그대로 두면 안되는가, 라고. 그의 주장에도 분명 문제가 있을테지만, 얼핏 읽어서는 '그럴지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교수는 자기 홈페이지에 락(자물쇠)을 걸어 비밀 번호를 입력해야 자료를 다운로드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은 자기 학생한테만 가야 한다는 논리인데, 이런 속 좁고 비열한 자들은 실질적으로 축적되는 '배움'과 '가르침'의 관계를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283쪽)" 라는 말은 납득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