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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행
시노다 세츠코 지음, 김성은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누가 믿을까. 매사에 삐딱하게 반항하는 사춘기 아이도 아닌 중년의 아줌마가 가출을 꿈꾼다면. 뭐 때문이냐고. 늦바람, 춤바람이 들어서도 아니다. 그저 외로워서. 집에 있자니 금방이라도 숨이 콱 막힐 것 같아서. 무조건 나섰다. 자신의 숨이 붙어있는한 결코 떠나지 않을 거라 여겼던 집에서.
책의 주인공은 오십대의 가정주부 타에코다. 평범한 직장인 남편과 두 딸을 길러낸 평범한 그녀의 일상이 어느날 갑자기 도마 위에 오른다. 9년째 집에서 기르는 개 포포가 이웃집 아이를 물어 죽인 것이다. 공격성을 억제시킨 골든 레트리버였지만 도를 넘어선 아이의 짓궂은 장난에 개는 순간 겁을 먹고 패닉상태에 빠져 끔찍한 사고를 치고 만다. 아이를 죽인 개는 처리해야한다는 주변사람의 성화에 가족들도 동조하고 나서면서 타에코는 궁지에 몰린다. 오직 가족들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자궁적출 수술을 받으면서도 가족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남편은 그녀를 위로하긴커녕 그녀에게 ‘이제 여자로선 끝났다’는 말을 내뱉었다. 이제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다는 걸 느낀 타에코는 포포를 데리고 한밤중에 몰래 집을 떠난다. 남편의 비자금이 든 통장을 가방에 넣고.
전국엔 이미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포포가 살인견으로, 타에코는 무책임한 개주인으로 알려진 상황이라 타에코와 포포의 도피행은 순탄치 않았다. 어딜 가든 그들은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게다가 포포가 그들이 신세진 트럭의 물건을 훔치는 여자의 다리를 물어 부상을 입히면서 더욱 경찰에 쫓기게 된다. 간신히 도착한 외딴 시골마을의 빈집을 대여한 타에코는 포포와 함께 둘 만의 생활을 시작한다. 신의 영역이라 불릴만큼 외진 숲 속에 자리한 그곳은 포포에게 잃어버린 야생의 본능을 일깨우고 타에코는 조금씩 마음의 여유를 찾아간다.
어떤 세간살이나 장식물도 없는 집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 되어 지내던 생활은 포포의 건강악화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노화가 진행되면서 포포는 예전의 모습을 급속도로 잃어갔다. 매일 죽음에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포포의 모습을 보면서 타에코는 뜻밖에도 행복을 느끼며 ‘늙은 개의 남은 생을 돌보기 위해 자신은 지금까지 남아온 생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타에코가 갑작스런 통증과 하혈을 하며 쓰러지면서 사태는 예상치 못한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솔직히 말해 처음 타에코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정당방위라 하지만 이웃집의 소중한 아이를 자신이 기르던 개가 물어죽였다. 개를 안락사 시킨다고 아이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누군들 모르겠냐만, 그렇다고 모든 가족을 팽개치고 개랑 야밤도주를 하다니. 타에코의 무책임한 행동에 화가 났다. 아무리 집에서 살림만 했다하지만 이렇게 생각없는 행동을 할 수가 있는지 의문스러웠고 타에코 같은 사람 때문에 모든 아줌마들이 욕을 먹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난 작가가 쳐놓은 그물에 고스란히 걸려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작가는 독자들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중요한 요소 하나를 끼워넣었다. 바로 포포가 9살, 인간으로 치자면 백발노인에 가깝다는 것이다. 한창시절엔 모든 이의 이목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답고 활기찼던 포포가 눈이 멀어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배변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독자는 타에코와 같은 꿈과 소망을 갖기 시작한다. 포포의 최후를 지켜주자고. 그런데 저자는 독자의 이런 마음을 배려하지 않고 배신을 한다. 포포의 죽음을 지켜주려던 타에코와 포포의 입장을 순식간에 바꿔버린다. 그리고 끝을 맺는다.
불혹을 넘어선 나이 때문인지 타에코의 삶은 내게 낯설지 않았다. 내게 곧 다가올 모습이 보여서 오히려 읽기 거북할 정도였다. 지금이야 한창 아이들이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만 좀 더 성장한 다음엔 어떻게 될까. 부모의 마음이나 정성을 이해해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넌 니 혼자 큰 줄 알지? 하시던 친정엄마의 푸념과 하소연이 귀에 자꾸 맴돌았다. 여자로서의 매력을 잃어가는 아내를 남편은 어떻게 볼까. 변함없는 애정을 기대해도 되는 걸까.
이건 헌 짚신짝의 소설이다. 오래도록 신어서 다 낡아빠진 헌 짚신.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버려지기 일보 직전의 헌 짚신이 서로에게 어울리는 짝을 만나 도피행각을 벌였다. 보잘 것 없더라도 한 쌍의 헌 짚신이 잘 지내면 좋으련만 저자는 잔인하게도 그 둘을 떼어놓았다. 이제 짝을 잃고 외로이 남은 헌 짚신은 어떻게 될까. 홀로 남겨진 포포에게서 타에코의 모습이 느끼지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