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기억, 지도 - KBS 특집 다큐멘터리 지도에 새겨진 2,000년 문명의 기억을 따라가다
KBS <문명의 기억, 지도> 제작팀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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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 부끄럽지만 난 길치에 방향치다. 이전에 갔던 곳이라고 해서 쉽게 찾아가는 일은 지극히 드물다. 지인들은 나의 이런 치명적인 결함을 잘 알고 있기에 내가 낯선 장소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약도와 함께 ‘지하철 몇 번 출구로 나와서 어느 방향으로 몇 블록을 지나서 어떤 건물(1층에 무엇이 있는지까지)’이라고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설명해준다. 상세한 안내 덕분에, 운이 좋아서 단 한 번에 찾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지 주위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한참동안 방황한 적도 숱하게 많다. 기다리다 지쳐서 어떨 때는 지인이 나를 데리러 나오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문명의 기억, 지도>라는 책을 보았을 때 의문이 들었다. 사실 지도라면 어떤 지역이나 나라를 모습이나 여러 사항들을 평면적인 그림으로 나타낸, 단순한 기호이자 표시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의 것, 인류의 ‘문명’을 담아냈다니.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쉽게 상상이 되질 않았다. ‘지도에 새겨진 2,000년 문명의 기억을 따라가다’라는 부제가 달린 <문명의 기억, 지도>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던 것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책은 크게 ‘달의 산’ ‘프롤레마이오스’ ‘프레스터 존’ ‘지도전쟁’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고대부터 중세, 근세, 근현대를 대표하는 지도를 통해 당시 세계의 모습과 상황, 주변국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본문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고 있는 것은 바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라서 시험에 꼭 나올 거라고 외우는데 이름이 난해하다며 투덜댔던 적이 있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다니. 그것도 아프리카 남단의 탐험이 이뤄지기 이전에 아프리카 대륙을 그려 넣었다니 놀라웠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지도의 정확함이다. 나일 강이 두 개의 물줄기로 흐른다는 것에서부터 그 발원지로 알려진 ‘달의 산’을 지도에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산꼭대기가 만년설로 덮여있어 달처럼 하얗게 빛난다고 붙여진 이름 ‘달의 산’을 동양의 작은 나라 조선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을 밝히기 위해 조선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그리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지도를 입수했던 경로와 그 주변 국가의 당시 상황을 짚어보는데 몽골을 비롯해서 아랍, 지중해로 추적해간 끝에 ‘달의 산’이란 이름이 2,000년 전 고대 그리스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밝혀내기에 이른다. 놀라움을 넘어서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 지도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축적, 나라의 크기나 배치, 비율이 전혀 맞지 않아서 왠지 엉성하게 보였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탄생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상상 그 이상. 인류의 문명이 어떻게 탄생하고 다른 나라로 전파되어 가는지 느껴볼 수 있었다.


이외에도 서양지도로는 최초로 중국이 그려진 [프롤레마이오스 세계지도]를 비롯해서 12장의 양피지에 로마의 길을 그려넣은 [포이팅거 지도], [카탈루냐 지도], [이드리시 지도], [대명혼일도] 등을 소개하면서 한 장의 지도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이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하나하나 전해준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현대에 있어서의 지도의 의미, 한 장의 지도가 갖는 힘이 어느 정도이며 지도를 연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네덜란드와 일본, 아메리카 원주민의 구술지도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지도는 그것 자체로 바로 하나의 권력이자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을. 그리고 말한다. 지도는 박제된 과거의 그림이 아니라고. ‘그 속에는 ‘인류의 오랜 상상력과 호기심, 한 시대의 가치관과 철학, 종교와 문화,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살아서 꿈틀대고 있다.(17쪽)’고.


어제와 오늘, 약속 장소를 향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지도를 검색하는 거였다. 단순히 점과 선으로 이뤄졌던 지도는 점차 입체적으로 바뀌어 이제는 위성과 도시 곳곳에 설치된 CCTV를 통해 현장의 모습까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나처럼 지리에 약한 사람들에게 참 편리하겠다고 생각했던 지도. 이 시대의 지도를 미래의 인류는 과연 어떻게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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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오의 하늘 6 -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감동 다큐멘터리 만화 요시오의 하늘 6
air dive 지음, 이지현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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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는 어렸을 때 병치레가 잦았다. 10개월 무렵 폐렴과 홍역으로 병원에 연거푸 입원했다. 간신히 먹은 분유를 다 게워내고 내내 기침하고. 이 작은 몸이 펄펄 끓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열이 나고... 힘겨워 하는 아이의 곁에서 나 역시  잠 못 이루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한밤중에 열이 40도를 막 넘어서는 순간 와락 겁이 났다. 이러다 아이가 잘못되는 건 아닐까? 하필 이럴 때 남편이 근무 중일게 뭐람? 어떻게 하지? 아이를 안고 응급실로 뛰어야 하나? 왜 내 일가친척 중에는 의사가 없는 걸까?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물어볼 수 있을텐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겁이 나는 건 오직 단 하나. 아이가 다치면 어쩌지? 큰 병이라도 생겨서 아프면 어쩌지? 그래서 책도 되도록 그런 이야기는 피해서 읽으려고 했다.


<요시오의 하늘>을 보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서점에 놓인 샘플북에서 잠깐 맛보기로 봤는데 내용이 예사롭지 않았다. 평범한 가족에 한 아기가 태어나는데 의사는 그 야이가 ‘뇌수종'이며 치명적인 장애가 남는다는 진단을 내린다. 소중한 아기에게 병이 생기다니? 결코 믿고 싶지 않은 일에 부모는 절망하는데 그때 그들이 한 명의 의사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타카하시 요시오였다. 다음이 궁금했다. 어떻게 될까. 아이의 병은 낫게 될까?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읽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아픔에, 고통에 허덕이는 아이의 모습은 만화로라도 만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게 모두 의도한데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 언제 어느 순간에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어쩌다 우연히 보게 된 만화는 가슴에 내내 의문으로 남았고. 내가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렸다. 그렇게 난 <요시오의 하늘>을 보게 됐다. 1권에서 5권까지의 내용을 극히 일부만 아는 상태에서 6권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려의 마음을 가지고.


책은 훗카이도의 시원한 바다가 보이는 병원에서 시작된다. 중증의 소아전문 병원으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병원으로 한 간호사가 부임해온다. 낯선 병원이지만 매사에 열심히 노력하는 그녀의 눈을 통해 병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게 된다. 간호사라는 직업이 사명감만으로 임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일에서 상처를 받기도 한다는 것을. 생명을 마주하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간호사가 되었지만 그 일에 혼란이 생길 즈음 그녀는 한 논문을 보게 된다. 바로 타카하시 요시오의 논문이었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의료진은 치료를 절대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타카하시의 논문은 그녀에게 숙제가 되고 그런 가운데 한 명의 아이의 생명이 꺼지고 병원에는 타카하시의 노래가 울려퍼진다. 생전에 아이가 즐겨 불렀던 노래가....


병원에 울려퍼졌던 노래가 ‘내 마음 속에도 울려퍼졌다’로 하나의 이야기가 마치고 책은 다카하시의 청소년시절을 이야기한다. 전학을 간 학교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기 이야기하고 개구쟁이 친구들과 지내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매사에 매를 들어 아이들을 체벌하는 선생님에게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자신을 결코 나쁘거나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소년 타카하시. 정의감에 넘쳤던 소년은 어떤 일을 계기로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을까? 뒤에 이어질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다. 미처 보지 못했던 5권까지의 이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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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 -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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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배명훈을 만났다. 모든 국민이 초고층빌딩에 산다고 설정하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담은 작품 <타워>는 출간 때부터 호기심을 자극했다.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이 어떤 일을 계기로 순간 멈칫, 하고 말았는데 특이하게도 그 작품에 대한 지인들의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린다는 점이었다. 읽어? 말어? 왜 이렇게 평이 다르지? 그 이유는 알아야 되지 않겠어?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2012년. 드디어 그의 또 다른 작품이 출간됐다. <은닉>. 간단하면서도 뭔가 거대한 것을 숨겨놓은 듯한 제목과 표지는 단박에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번엔, 지난번과는 달라야해. 기필코. 어느 누구의 의견에도 흔들리지 않을테다. 아니, 그런 찬스도 주지 않겠어. 서슴없이 책으로 손을 뻗었다. 너, 대체 뭐지? 그 뒤에 뭘 감추고 있는 거야?


‘11년을 일하면 1년은 휴가다’로 시작된 소설의 주인공인 ‘나’의 직업은 ‘킬러’다. 명령에 의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그에게는 노동일 뿐. 감정이란 없다. 해서 그는 자신은 연방이란 조직, 그림자의 도구라고 여긴다. 11년간 연방의 도구로서 시커먼 사람이 되어 일한 그는 1년의 휴가를 맞았다. 호출도, 명령도 없는 동안 그는 보통 사람처럼, 하얀 사람이 되어 평범하게 지낸다. 그런 어느 날 누군가가 그를 찾아온다. 호출이 아니라 무언가를 보고 오라는 것. 그러면서 한 장의 연극티켓을 내민다. <랑페의 결백>.


무엇을 찾아야 할지, 누구를 만나야할지도 모르는 가운데 <랑페의 결백>이라는 연극을 보게 된다. 그는 다시 시커먼 사람이 되어 탐색을 시작한다. 누굴까. 나의 목표는. 연극에 등장하는 배우? 아니다. 그렇다면 소품인가? 그때 마침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어디에도 공개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그야말로 소품에 불과한, 시체였다.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반라의 여인의 죽은 몸. 그런데 놀랍게도 생명이 빠져나간 시체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은경이였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연방권력서열 3위인 장무관의 숨겨진 딸. 그녀의 존재 자체가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그녀의 생존사실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실대로 보고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그녀는 쥐도새도 모르게 제거되고 만다. 그에게 있어 경이로움이자 특별한 존재 은경이는. 내내 고민하던 그는 결심하고. 시체를 보았다고 보고한다. 그의 휴가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킬러와 조직, 첩보전, 쫓고 쫓기는 사람들...한 편의 스릴 넘치는 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이다. 하지만 느낌이 개운하지가 않다. 뭔가 굉장히 거대하고 많은 것을 한꺼번에 머릿속에 우겨넣은 듯한 기분. 이해되지 않은 상태로 마구 몰아붙여서 억지로 종말을 지은 듯한 느낌이 든다. 재미가 없는 건 아니다.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책장을 자꾸자꾸 뒤로 넘기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체 내가 뭘 빼먹은 거지?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거지? 이것조차 종잡을 수가 없다. 이 당황함이란...


문득 <인셉션>이란 영화가 떠오른다. 꿈에서 꿈으로, 다시 꿈으로 몇 번이고 이어지는 나선의 끝에서 영화가 끝났을 때 이게 대체 무슨 얘기지? 꿈이야? 현실이야? 알 수 없어서 영화를 바로 이어서 또 한 번 봤다. 그러고나서야 아하...하고 무릎을 쳤다. <은닉>을 보고난 기분이 바로 그랬다. 연거푸 다시 한 번 봐야 알 것 같은... 그때가서야 난 ‘배명훈을 만.났.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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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음악의 거장들 - 그 천년의 소리를 듣다 : 한국 음악 명인열전
송지원 지음 / 태학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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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바뀌는 걸까? 시간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걸까?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름을, 달라졌음을 느낄 때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먹거리와 생활방식, 일상의 기호에 이르기까지 달라진 지금 나의 모습, 이런 변화의 요인은 대체 무얼까.


국악, 우리의 전통음악을 예전에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피해 다녔다고 해야 할까요? 학창시절 어쩌다 늦은 밤 텔레비전 앞에 앉아 뭔가 재미난 걸 찾다가 채널이 국악프로그램에 머물면 얼른 돌려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지겹고 고리타분한 걸 대체 누가 본다고. 찾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했지요. 그러다 나이를 들어선지 시간이 흘러선지 제 귀에 우리 음악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요. 그때가 서른 고개를 넘었을 때였습니다. 조용하면서도 변화무쌍한 일렁임이 있고 묵직하면서도 솜털처럼 가벼운 국악의 매력에 난생처음 빠져들었는데요. 삼십 대에 두 아이를 배 속에 길러내면서 줄곧 들었던 음악도 바로 우리 음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긴 호흡의 국악을 너끈히 감상하기엔 제 소양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고 있던 차여서 <한국 음악의 거장들>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국악의 전문적이고 자세한 지식보다 우선 우리의 소리, 우리의 음악을 평생 지켜왔던 이들의 삶,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게 더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거든요.


책은 ‘1장. 거문고와 가야금의 거장’ ‘2장. 시대를 울린 음악의 명인’ ‘3장. 노래에 취한 가객’ ‘4장. 장악원의 음악 관리’ ‘5장. 이론가와 작곡가’ ‘6장. 후원자와 감식가’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삿된 마음을 금하고 자신을 이기는 방법으로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조선후기의 문인 오희상을 통해 당시 우리 선조들은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마음을 조용히 가다듬었다고 전하는데요. 거문고를 연주함에 있어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오능), 거문고를 연주하면 안되는 상황(오불탄)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차원이 아니라 도(道)에 이르는 경지라고 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빼어난 연주자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는데요. [악학궤범]의 저자인 성현의 거문고 스승인 이마지의 연주는 얼마나 빼어났는지 사람들은 그의 거문고 연주 속에서 기쁨과 슬픔, 분노, 즐거움, 인생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하고. 거문고 소리가 실로 애절하고 절절했다는 이금사와 그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누구보다 이금사의 연주를 그리워했던 성해응의 사연, [현의 노래]을 통해서도 알려졌던 우륵의 가야금,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가 귀화하여 장악원에서 비파를 가르치기도 했다는 명의 악공 굴씨, 깊은 숲에 울려 퍼지는 대금 소리가 흡사 신선이 숲과 같았다는 억량, 아쟁 연주로 귀신까지 울렸다는 김운란 등 우리 역사에 빼어난 연주자가 정말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요. 관악기도 현악기도 아닌 악기, 흐느끼듯 구슬피 우는 소리를 내는 악기 해금의 명인 유우춘은 자신의 음악세계를 이해해주는 이들 앞에서만 연주하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연주하기를 접었다는 대목은 제가 한창 해금 소리에 빠져있어서인지 무척 안타깝게 다가왔습니다.


올여름은 유독 더웠습니다. 깊은 밤이 되어도 한낮의 뜨거운 열기기 가시지 않아 잠들기조차 힘겨웠는데요. 그럴 때면 우리 음악을 듣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는데요. 쉬운 문장과 길지 않은 글을 낮은 소리로 읽어보니 그 속에 왠지 높고 낮은 리듬이 느껴지더군요.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간간히 풍경을 울리는 가운데 나지막한 우리 음악과 책 읽는 소리가 조화롭게 이어지고 어느샌가 아이는 곤히 잠들곤 했는데요. 그 모습이 참 고요하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이전에 출간된 <옛 음악인 이야기,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고>는 어떨까 궁금해집니다. 그 책도 소리내어 읽고 싶은 마음,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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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정원에는 코끼리가 산다
마이클 모퍼고 지음, 마이클 포맨 그림, 김은영 옮김 / 내인생의책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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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정원에는 코끼리가 산다’ 제목만 보고 처음엔 쿡쿡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희집 아이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대부분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작은 것도 자꾸 부풀리는 경향이 있잖아요. 우리집엔 @@도 있다? ##도 있다? 이러다가 작은 서민아파트가 거의 궁전수준으로 탈바꿈해 버리는. 그래서 이 책도 그런 깜찍하고 엉뚱한 아이들의 일상을 담은 생활동화이거나 판타지 동화일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표지를 보니 아니더군요. 몹시 추운 겨울밤, 눈 덮인 길을 코끼리와 걸어가는 이가 있습니다. 그 뒤로 밤하늘을 비추는 몇 개의 불빛.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이들은 추운 겨울밤 거리로 나선 걸까? 그것도 코끼리를 데리고...? 의문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요. 표지 아래의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폭격’ ‘독일의 드레스텐 사건’이라는 글귀를 보고 그제야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책의 화자는 노인요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입니다. 그녀에게는 아홉 살 난 아들 칼이 있는데요. 가족이라고 해봐야 단 둘뿐이기에 그녀는 주말에 일을 해야 될 때면 아들을 요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것 외엔 달리 방법이 어쩔 수 없었으니까요. 이런 엄마의 염려와는 달리 칼은 너무나 잘 지냈습니다. 아니, 조용하지만 생기 없는 요양원에 칼과 그 친구들이 드나들면서 활기를 불어넣자 노인들이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였는데요. 그런 어느 날 그녀는 아들 칼이 리지 할머니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게 됩니다. 그녀는 칼에게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줍니다. 그 할머니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고. 우리집 정원에 코끼리가 있었다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한다고. 하지만 칼은 리지 할머니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정원에서 코끼리를 키웠다는 것도 사실일 거라고. 그리고 다음날 그녀는 칼과 함께 리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리지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마들렌이라 불리는 코끼리와 수많은 이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과 리지 할머니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몹시 추운 2월 13일에 벌어진 이야기들을...


이후 책은 리지 할머니의 이야기로 이어지는데요.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독일 드레스덴에 폭격을 가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드레스덴 사건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얘기지만 아는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수십만의 민간인이 죽음을 당한, 참혹한 학살이 벌어진 드레스덴 사건이 제2의 히로시마라고 부른다는 것조차도 몰랐습니다. 그러다 작년초에 지인들과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이라는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드레스덴 사건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우리집 정원에는 코끼리가 산다>와 <제5도살장>은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느낌과 분위기는 조금 다르더군요. SF소설의 형식을 띤 <제5도살장>이 융단폭격이 가해진 이후의 참혹함을 “그렇게 가는 거지”란 말로 다소 황당하고 유머러스하게 전했다면 이 책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의 혼란 속에 피난을 가면서 코끼리를 데려간다는 것에서부터 그런 와중에 벌어지는 일들이 아픔과 슬픔, 안타까움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결코 살벌하지 않다는 겁니다. 이야기의 진행이 현재 시점이 아니라 과거의 있었던 일을 초로의 노인이 아이에게 들려주는 형식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특히 후반부, 추위와 굶주림 속에 힘겹게 길을 가면서 함께 노래를 부르는 대목에서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면서도 순간 눈물이 맺혔습니다.


마이클 모퍼고. 그는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책장을 덮어도 자꾸만 생각나고 왠지 마음이 끌립니다. 이제 그의 다른 작품들을 하나씩하나씩 만나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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