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질문 - 내 안의 두려움을 마주하는 인생의 지혜를 찾아서
다큐멘터리 〈Noble Asks〉 제작팀 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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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자는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서 운다고 하더니 딱 내가 그 형국이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신지 몇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상실의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모를 여읜 자식들이 대부분 그렇지 않은가 싶지만 꼭 그렇다고 장담할 순 없다. 일상에 쫓기다가도 문득 멍하니 있거나 생각에 잠길 때 거리에서 다정한 모녀의 모습을 볼 때면 문득문득 후회가 밀려온다. 난 다른 형제에 비해 엄마의 속을 덜 썩였지만 반면에 살가운 딸은 아니었구나. 깨닫는다.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무뚝뚝한 딸. 그게 나였다고.



날 왜 낳았어!

어쩌면 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슬픔의 이유를. 오래전, 사춘기도 모르고 지냈다 싶은 내가 딱 한 번 엄마의 가슴에 날카로운 대못을 박았다. 날 왜 낳았냐고. 물었다. 그때 엄마의 기분이 어땠을까,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 지금 내가 새삼 느끼고 있다. 아들을 키우면서... 난 알고 있다. 그날의 내 무모한 행동을 생전에 엄마에게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얼렁뚱땅 넘긴 게 이렇게 한으로 남았다는 것을. 그리고 아직 모르고 있다. 난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길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오래된 질문>은 생물학계의 대석학으로 알려진 과학철학자 데니스 노블 박사가 한국의 사찰을 방문해서 고승들과 나눈 대화를 정리한 책이다. 통도사의 성파 스님, 실상사의 도법스님, 백양사 천진암의 정관 스님, 땅끝 미황사의 금강 스님. 불교를 믿거나 불교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큰스님들이다. 그런데 생물학자가 불교의 스님들과 대체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내 안의 두려움을 마주하는 인생의 지혜를 찾았을까? 과학과 종교는 극과 극인데 그들의 만남이 과연 순탄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나로 하여금 책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중요한 건 쓸데없는 걸 많이 아는 게 아닙니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모르고 있다는 껄 모르는 것, 그게 가장 큰 병입니다. - 33.(성파)



책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삶은 왜 괴로운가?’ ‘나는 누구인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 네 개의 대주제 아래 그것을 풀어가기 위한 스님들의 말씀과 데니스 노블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한 꼭지마다 글의 길이는 짧은데 그 속에 핵심을 단번에 꿰뚫는 글이 많았다.



머리는 하늘을 향해 있고 두 발은 땅을 딛고 서 있는 모습으로 생긴 사람이 깨달은 자, 부처다. 밥이 오면 입을 열고 졸음이 오면 눈을 감으며 사는 사람이 깨달은 자, 부처다. 바꿔 말하면 이런 얘기를 하는 거죠. 나와 당신, 우리 모두가 부처다. 인간은 누구나 다 부처다 125(도법)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누가 나를 화나게 한다면 우선 원인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사실을 정확하게 직시해야 한다거나 세상은 많은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는데 그걸 잊고 따로따로 살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자연이, 제대로 온전히 살아가기 힘든 거라고 짚어준다.



만약 당신이 남과 비교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훨씬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내가 보는 현상과 주변 환경들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와 겸손한 마음가짐이 걸림 없는 삶, 자유로운 삶을 만들어줄 것입니다. - 147(정관)



과학자와 스님들의 대화가 겉돌지는 않을까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데니스 노블이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의 관점을 보여주는 시의 원문을 해석하기 위해 한자를 배울 만큼 동양사상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인지 그들의 대화는 때론 굳이 통역을 거치지 않아도 통했다고 한다. 마치 염화미소의 부처님과 가섭처럼.



참선을 하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 참선은 삶을 다르게 인식하는 방법입니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환영에서 벗어나고, 헛된 망상들이 걷히면서, 자연스럽게 현재로 초점이 맞춰지는 거지요. (……) 비로소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게 됩니다. - 186, (금강)



마음편히 사찰을 자주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 일 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사람에게 오른팔이 있으면 왼팔이 있듯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인데 요즘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예전처럼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다. 시원하게 소통되지 못하고 어딘가 막힌 듯 답답함을 느끼는 날이 많아지면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의문이 들곤 했다. <오래된 질문>을 틈틈이 조금씩 마음 내키는 대로 손에 집히는 대로 읽어 나갔다. 몇 번을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결국 덮어버리고 마는 책보다 <오래된 질문>은 짧지만 금방 공감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몇 번이고 곱씹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글이 많아서 좋았다. 그때그때 연필로, 형광펜으로 줄을 긋고, 포스트잇과 플래그를 붙여 가며 메모를 했다. 곳곳에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는 책, 필사하면서 생각을 가다듬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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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왕생 1
고사리박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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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 노래 불러. 체리필터의 <낭만 고양이>로…"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합정에서 당산행 지하철에 나타나는 귀신이 있단다. 이름하여 '당산역 귀신'.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인간에게 귀신은 다짜고짜 말한다. "들려?" "노래불러. 체리필터의 <낭만고양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귀신은 상상만으로도 무서우니까. 또 아주 곤란할 것 같다. <낭만고양이>란 노래를 모르기 때문에.



귀신이라면 대개 이승에서 원한이 있을때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산역 귀신'은 대체 어떤 원한이 있는 걸까. 그의 행태를 보면 불쑥 나타나 인간에게 특정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는 것 외에 특별히 해를 끼치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을 놀라게 하고 이승의 질서를 혼란을 줄수 있는 귀신은 이승에 있어선 안되는 존재이기에 지옥의 호법신 도명이 출동한다. 잡아서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도명이 당산역 귀신을 잡아서 끌고 가려는 찰라, 누군가 나타나 그를 가로막는다. 바로 천수천안의 관음보살. 관음은 귀신이 악귀도 아닌데 무턱대고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했냐며 도명을 호되게 꾸짖는다.





관음은 도명에게 묻는다. 자비의 마음을 잊었느냐고. 당산역 귀신이 왜 하필 비오는 날에만 나타나며, 합정역에서 나타나 당산역에서 사라지는지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죽음을 마주하지 못해서, 윤회를 피해 귀신이 된다고 여겼던 도명은 혼란에 빠진다. 지금까지 이승을 떠도는 귀신을 잡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인가...



그런 도명에게 관음은 특별한 임무를 내린다. 당산역 귀신, 박자언에게 스물여섯 해의 인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를 다시 살게 해주겠다고.



"도명 당신은 그 한 해 동안 박자언의 보리심이 피어나도록 도우면서 한 해가 끝나는 날 박자언을 극락왕생 시키십시오"




박자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해는 2011년. 당시 고3이었던 자언은 자신이 다시 태어난 시점이 왜 하필 고등학교 3학년때인지 알지 못한다. 자언을 곁에서 지켜보며 도움을 줘야하는 도명 역시 같은 학교의 학생이 된다. (교복이 어쩐지 도명에게 안 어울리는 듯하지만...)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의 후유증일까. 자언은 자신이 이전과 달라졌음을 느낀다. 바로 귀신이 보인다는 것. 학교와 교실 여기저기에서 귀신이 출몰하는데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자언은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학교에서 일어난 크고작은 소동으로 자신은 물론 친구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자언은 귀신을 무조건 잡고 쫓을 게 아니라 그들과 슬기롭게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명과 함께 방법을 찾아나간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자언이 엄마와의 이야기를 다룬 대목이었다.



자언의 실수로 엄마가 귀신의 소동에 휘말리자 어릴적 엄마의 주의를 무시하고 인라인을 타고 멀리까지 갔다가 넘어져서 손바닥이 다쳤을 때 얘기를 꺼낸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혼날까봐 손을 감추었지만 엄마는 금방 알아차렸다고.


"등뒤로 깜쪽같이 손을 감춰도

엄마는 눈만 보고 알아챘다."





수시로 엄마와 티격태격 말씨름을 하지만 서로 깊이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자언. 몇 가지의 일화만을 보면 자언이 왜 죽었는지, 고3 시절이 왜 가장 중요한 해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런 자언을 도와 1년 후 극락왕생으로 이끌게 될 도명. 그는 잊었던 자비의 마음을 다시 일깨우게 될까. 기분전환 삼아 만난 만화책에서 우리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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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 인간과 괴물의 마음 - 나를 잃지 않고 나와 마주하는 경계의 감정
이창일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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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이었다. 중범죄 등으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의사의 면허를 취소하는 법안에 대해 대한의사협회가 크게 반발하면서 급기야 코로나19 백신접종에 협력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집단행동은 사람의 생명이나 안전보다 자신의 이권과 기득권을 놓치지 않는 데만 몰두한 듯했다. 유치원 다니는 어린아이보다 못한 이기적이고 몰상식한 행동을 일삼는 그들이 사회의 지도층이자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도 변함없이 존경을 받고 싶은지 묻고 싶었다. 왜 그들로 인한 창피함은 우리들의 몫인가. 그들의 행위가 왜 이토록 수치스러운가.



인간과 괴물의 마음이란 부제의 책 <수치>의 표지를 한참 바라봤다. 흑백의 사람 옆모습이 아래위로 나뉜 표지를 보면서 온라인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착시 이미지가 떠올랐다. 젊은 여인의 옆모습이라고 여겼던 그림이 어느새 매부리코의 노파 얼굴로 바뀌고 아리따운 여인으로 보였던 그림은 둥지로 날아드는 새였으며 가운데가 불룩하니 휘었다고 생각한 선은 알고 보면 휘어짐이 없는 직선이었다. 이런 경험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흑백의 두 얼굴이 상징하는 건 어쩌면 뇌의 착시처럼 같으면서도 다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창피함과 부끄러움과 수치는 어떻게 다른가. 같은 감정인가. 늘 궁금했다. 심리학과 철학, 상담심리학의 이력을 지닌 저자는 첫 문장에 나의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내어놓는다. ‘부끄러움수치와 같은 뜻을 가진다고. 차이점이 있다면 부끄러움보다 수치가 좀 더 부정적인 의미를 띄고 부끄러움은 순 우리말이지만 수치는 한자어라고 말한다. 좋은 감정이지만 나쁜 감정이기도 한 두 얼굴을 지닌 감정 수치. 저자는 수치의 두 가지 얼굴에 대해 세세하게 풀어놓는다.



우리가 앞으로 탐구할 낯붉힘의 감정인 수치는 조금 특별한 감정이다. 수치는 넓이와 깊이를 모두 가진 감정이기 때문이다. - 6.



책은 크게 다섯 부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각 부는 다시 주제에 따라 2~4개의 장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1수치, 감정과 문화부끄러움의 감정부끄러움의 언어문화라는 장에서 부끄러움이 어떤 감정인지 알기 위해 감정이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 사람의 감정 변화와 관련해서는 뇌의 어느 부위가 영향을 미치는지를 실험을 통해 살펴본다. 부끄러움의 옛말이 붓그럽다붓그리다란 것과 부끄러움이 일차 감정이 아니라 사회감정인 이차감정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인간이 감정을 느낄 때 신체적으로 변화가 나타나는데 그동안 여러 문학작품을 통해 접했던 대목이 많아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 표시해 놓은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고 수치의 의미를 표로 나타내놓아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에 좋았다.



이차 감정이 없는 짐승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없지만, 인간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지각만 한다면 이 또한 인간이 아니다. 그것을 내면에서 다시 불러일으켜서 느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다. - 75.



2수치, 아래쪽 얼굴부터 본격적으로 수치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수치란 감정의 탄생을 이야기하기 위해 저자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에게로 포커스를 맞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알몸으로 지내던 그들이 뱀의 유혹과 부추김에 선악과를 먹은 이후 갑자기 수치, 그것도 부정적인 감정을 알게 되는데 그 순간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역설적으로 인간이 되는 순간 생겨난 감정이 바로 수치다라고.



수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며, 그 길은 이전처럼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엄혹한 현실을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 125.



얼마전에 읽었던 <실낙원>이 바로 이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인데, 기독교를 믿지 않는 내게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하느님을 불복종한 벌로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자 그들이 서로에게 취했던 행동이었다. 신의 완전함을 추구하고자 했던 인간의 의도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보다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질책하는 장면, 수치스러운 모습이었다.



이후부터 프로이트가 등장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이 동원되고 리비도라는 낯선 용어를 통해 인간의 수치가 신화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이전만큼 술술 읽히지는 않는다. 브래드쇼는 수치가 인간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악마적인 존재로 일컬었는데 수치로 인한 질병을 언급하는 대목은 아무래도 마음이 무거웠다.



요즘 뉴스를 보면 우리가 수치심에 둔감한 사회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폭행을 가하고 젊은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을 가십거리로 생각하고 정치인은 어제 했던 말을 오늘 뒤집기 일쑤다. 부끄러움, 수치란 감정이 없는 사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인간에게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부분을 갖고 있지만 그 역시도 인간다움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했을 때 그걸 재빨리 알아차리고 수정하려고 노력하는 자세, 용기가 그 어느때보다도 필요하다. 인간의 감정의 숨은 이면을 알고자 하는 이가 읽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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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최진석 지음 / 북루덴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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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됐을까. 5~6년 정도 된 것 같다. 인문고전 독서토론모임을 시작하면서 인문학이 대체 뭔지 궁금했다. ‘그냥 문..이에요,라고 말하는 지인이 있는가 하면 두 말 않고 철학!’이라고 강조하는 이도 있었다. 종합해보면 철학은 기본적으로 포함된 것 같은데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뒤져봤다. 그때 읽었던 책이 <인간이 그린 무늬/최진석>였다.



저자는 인문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골치 아프고 난해한 이론이나 고차원적인 학문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도구 같은 것이라면서 인간이 그리는 무늬’ ‘인간의 동선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명쾌한 설명이었다. 지인이 인문학을 ..이라고 말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후로 저자의 책은 챙겨서 읽게 됐다. 노자와 [도덕경]을 바탕으로 인류가 철학을 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며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자신으로 돌아가려면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던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인류 역사에 언제나 위기는 있었다면서 위기를 극복하려면 철학이 필요함을, 그러려면 먼저 철학을 고리타분한 학문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며 일침을 가한 <탁월한 사유의 시선>까지. 저자의 글을 읽을 때면 느슨하게 늘어지는 마음을 다잡곤 했다.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출간 소식이 누구보다 반가웠다. 이번엔 어떤 걸 가르쳐주시려나 기대가 됐다. ‘이제는 건너가자. 철학자의 시선으로 본 대한민국!’라고 적힌 띠지를 벗기고 표지를 살펴보면서 깜짝 놀랐다. 왼쪽 아래 귀퉁이에 국회의사당이 뒤집혀 있었다. 비스듬히 그어진 은 단순히 선이 아니라 예리한 칼로 베어버린 것 같았다. 띠지의 건너가자라는 것의 의미가 대체 뭘까 더욱 궁금해졌다.




대한민국에는 정치 공작이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지금은 정치가 사라졌습니다. 철학적으로는 사회 통합이 이상적인 일로 간주되지만,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데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더 유리하다면 차라리 분열을 하나의 방법으로 채택해버리는 것이죠. - 9~10.



삼십대 초반의 저자가 홍콩행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시작한 책은 우리나라를 둘러싼 여건이 어떠한지, 중국과의 관계, 북한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며 강조한다. 친일 청산 문제에서 우리는 독일과 프랑스처럼 전쟁으로 주권을 빼앗긴 게 아니라 눈만 꿈뻑이다가 일본의 속국이 되었고 연합군의 도움으로 해방이 되었지만 우린 마치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줄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국가의 일을 진영의 논리로 다루니, 국가는 표류할 수밖에 없다. 종속적이고 집단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으면, 어떤 문제를 독립적인 사고 능력으로 집요하게 다루지 못하고 바로 반대편을 선택해버리거나 논리를 임의대로 사용하는 특징을 보인다. -88.



촛불집회로 탄생한 정부, 문재인 정부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도 풀어놓았다. 대통령이 처음 내세웠던 경험해보지 않은 나라가 어떤 나라이며 약속했던 인사 5대 원칙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대통령의 고유함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면서 말한다. 과거와 결별하려면 먼저 내 과거와 결별해야 하듯이 적폐 청산도 내 안의 적폐를 먼저 청산해야 한다고. 저자의 <나는 5.18을 왜곡한다>라는 글이 발표되고 나서 논란의 중심에 서야 했던 때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글이 오히려 왜곡 해석되는 현실에 분노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는 세계 모든 나라가 놀랄 정도로 눈부신 초고속 성장을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드리워진 어둠은 매우 짙다. 나라의 모든 정책과 노선이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의 재건과 성장에 맞춰져 있다 보니 인권이나 참된 민주화에 대한 의식은 그에 비해 성장하지 못했다. 이미 예전에 폐기했어야 할 낡은 프레임을 갖고 목청 높이는 정치세력이야말로 자기 탈피를 못하는 사람이라며 꼬집는다.



문제 없는 부부도 없고, 문제 없는 국가도 없다. 문제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미래적으로 풀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다루는 능력이다. 모든 발전은 문제를 해결해가는 노력의 결과다. -175.



목차에 상관없이 매일 조금씩 끌리는 대목부터 읽어나갔다. 뒤표지의 철학자가 낱낱이 짚어낸 대한민국의 문제라는 문구처럼 저자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잘 드러나는 책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저자의 책을 꾸준히 읽어온 나로선 솔직히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다. 진정한 민주화를 쟁취하고 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오히려 정쟁에 휘말려 있는 상황이 저자는 매우 답답했던 듯하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일개 전업주부인 나조차 지금의 우리 정치를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왠지 고개를 젓게 된다. ‘어느 진영도 미래를 말하는 능력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저자의 생각이 미래인가?



새로워져야 할 때 새로워지지 않으면 현재 가지고 있는 새로움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급속하게 더 낡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 239.



내겐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중학생 아들이 있다. 온라인 수업에 농땡이를 치고 시험을 곱게 말아먹는 아들을 보면 난 답답하기만 하다. 아들 인생이니 내비둬,하고 싶지만 아들의 미래가 어떨지 경험상 그려지기 때문에 자꾸만 다그치게 된다. 중학생을 거쳐온 선배로서 조언과 충고를 한다. 하지만 아들은 나의 모든 얘기가 그저 지겨운 잔소리에 불과하다.



난 저자의 글이 잔소리로 취급되지 않았으면 한다. 온라인에서 검색만 하면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정치논평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자면 글에 가득한 흥분을 가라앉혀야 한다. 철학자의 냉철함으로 짧으면서도 핵심을 꿰뚫는 단 하나의 화살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각각의 글마다 발표된 시점을 수록하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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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구둣방 - 소리 없이 세상을 바꾸는 구두 한 켤레의 기적
아지오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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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에 족저근막염 진단을 받았다. 평소에도 운동삼아 많이 

       걷기는 해도 통증은 없었다. 하지만 8년 전에 친정엄마가 병원                 에 입원하시면서 집과 병원을 매일 왕복했다. 제한된 시간 내에 

       볼일을 마치기 위해 발을 재빠르게 움직였다. 발에 무리가 간 상               태로 오래 지속된 탓이었을까. 걷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욱신거리

       는 통증에 밤잠을 설치는 지경이 되어서야 병원을 찾았다. X레이                를 찍니 발꿈치에 뿔 같은 게 삐죽 돋아난 게 보였다. 의사는 

       “너무 부지해서 생기는 병”이라며 치료와 더불어 두 가지를 당부                했다. 걷는 걸 줄이고 편한 신발을 신으라고.

가격과 착용감을 모두 만족시키는 운동화를 찾기란 어려웠다. 적당한 가격에 예쁘게 빠진 운동화는 대체로 발볼이 좁았다. 발볼에 맞추기 위해 치수를 크게 하면 오히려 발이 더 피곤하고 다리도 부었다. 엄청난 소음과 따끔따끔한 통증을 참고 체외충격파 치료를 받고 미친 듯이 가렵다는 봉침도 맞으면서 치료를 받았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은 거의 반포기 상태라고나 할까. 걸으면서 짬짬이 스트레칭 하고 저녁엔 아킬레스로 이어지는 종아리 근육을 풀어주면서 통증이 더 심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하는 게 전부다.


‘아지오’를 알게 된 건 문재인 대통령의 신발을 통해서였다. 닳을대로 닳아버린 신발 밑창을 보고 저 신발은 도대체 얼마나 편하길래 저렇게 되도록 오래 신으셨나 궁금했다. 대통령의 신발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당연히 신발을 제작한 업체 ‘아지오’에도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시각장애인이 대표로 있는 업체에서 청각장애인들이 신발을 제작한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라고 감탄했다. 하지만 그때 ‘아지오’는 이미, 폐업한 상태였다.

여기서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사회에서 제 몫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직원들에게 호기롭게 말하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 그 약속은 희망고문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멀쩡한 얼굴로 직원들을 볼 낯이 없었다. (……)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에 유석영은 마음이 찢기는 고통을 느꼈다. -16쪽.

한 땀 한 땀 실과 바늘을 놀려 구두를 짓듯 제작된 책 <꿈꾸는 구둣방>. ‘아지오’가 궁금해서 선택한 책의 ‘첫인상’은 ‘정성’이었다. 아지오의 구두는 천연가죽으로 된 신발이라는 걸 드러내듯 가죽 질감의 표지에서, ‘당신이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산 사람 치고 발이 무사한 사람이 없다’는 속지의 문구까지. 미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감동이란 것이 훅 치고 들어왔다. 난 정치인도 아니고 유명연예인도 아닌 평범한 50대의 전업주부일 뿐인데 이런 나에게 공감해주고 지금까지 고생 많았다며 위로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아지오의 대표 유석영씨는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다. 앞을 볼 수 없다는 악조건에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에서 방송인으로,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주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겠다며 ‘신발만드는풍경’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빨리, 많이’가 아닌 ‘제대로 만든 수제 고급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 이야기가 <꿈꾸는 구둣방>에 수록되어 있다. 첫주문으로 ‘수녀화 300켤레’를 받고 나는 듯 기뻤지만 제작과정은 험난했으며 아지오를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이야기, 대선후보였던 문재인과의 만남과 낙선 후 아지오가 문을 닫은 것까지.

그리고 바로 그 일이 있었던 것이다. 5.18 묘역에서 무릎 꿇고 참배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낡은 구두 사진 한 장.

‘대통령의 구두’로 대박을 일으켜 승승장구하는 업체일거라 생각했던 아지오는 개업 3년 만에 폐업이라는 실패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구두’로 인해 경영에 대한 지식도 탄탄한 자본도 없이 출발한 아지오가 어떤 목적과 마음으로 신발을 만들었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아지오는 기적적으로 다시 재기를 한다.

‘아지오’란 이름이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책을 읽기 전에 난 ‘아지오’가 ‘알지요’는 아닐까 생각했는데 본문에 이름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아지오’란 이탈리아어로 ‘편안한’ ‘안락한’이란 뜻이라고. 아지오는 알지요. 어떤 구두가 진짜 편안한지 알지요.

      패자는 말이 없다지만 우리는 실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                실패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 있다. 우리의 실패와 거기에서 얻은 

      깨달음을 나누면 누군가는 실패하지 않고도 실패의 원인을 알고 

      그것을 경계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실패가 누군가에게는 교훈

      과 지혜가 될수 있지 않을까. -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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