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1 - 청소년 성장 장편소설 아사노 아쓰코 장편소설 1
아사노 아쓰코 지음, 양억관 옮김 / 해냄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특별히 좋아하는 스포츠가 없다. 잘하는 스포츠 역시 없다. 그런 내가 스포츠 만화라면 사족을 못 쓴다. 시작은 <슬램덩크>였다. 나이 서른을 코앞에 두고 지인에게서 우연히 건네받은 만화에 나는 쏙 빠져버렸다. 두어 달 간격으로 감질나게 한 권씩 출간되는 만화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른다. 덕분에 농구의 ‘농’자도 모르던 나는 농구 경기의 기본규칙이나마 알게 됐다. 만화로 스포츠를 배울수도 있다는 거, 이때 처음 알았다.




<슬램덩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휘슬> <스피드 도둑> <플라이 하이> <신학원 라이벌전> <H2> <그린의 정복자> <Happy!> <테니스의 왕자> <저스트 고고> <홍색히어로> <카페타>...같은 만화를 읽으며 여러 종목의 스포츠를 하나하나씩 섭렵해나가고 있다.




옆으로 찢어진 날카로운 눈, 꼭 다문 입매에서 반항아 기질이 엿보이는 소년이 그려진 표지의 <배터리>를 손에 들고 가슴이 설렜다. 제목이 ‘배터리’인 걸 보니 야구인 건 분명한데, 누가 투수고 누가 포수인 걸까.




전근가는 아버지를 따라 닛타로 이사가게 된 다쿠미. 그는 누구도 손댈 수 없을 정도의 강속구를 던지는 한마디로 천재투수다. 작은 지방도시에서 살게 된 것에 불만을 갖고 있던 다쿠미는 우연히 ‘나가쿠라 고’란 소년을 만난다. 예전에 다쿠미의 경기를 보고 그의 공에 반한 고는 자신이야말로 다쿠미와 배터리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다쿠미 역시 자신의 공을 제대로 잡아줄 포수는 고가 유일하다고 여기면서 둘은 단짝 친구가 된다.




다쿠미에겐 고가, 고에겐 다쿠미가 있기에 환상적인 중학시절이 될 거라 생각했던 두 사람에게 위기가 닥친다. 상냥하고 배려심이 깊은 고에 비해 너무나 자신만만하고 이기적인 성격의 다쿠미는 다른 팀원과 쉽사리 융화되지 못한다. 야구부 선배들은 다쿠미의 재능과 실력을 시기한 나머지 폭력을 행사하고 그 일로 인해 야구부의 활동이 정지되는 사태에 이르는데....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사춘기 소년들의 야구에 대한 정열과 고민을 담은 책 <배터리>. 스포츠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만화의 등장인물이 으레 그렇듯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천재투수와 그의 포수이자 단짝친구가 있고 그 반대쪽에 대립되는 성격의 인물들이 있으며 주인공과 운명적인 대결을 펼칠 또 한명의 천재타자가 기본적인 인물구도를 이룬다. 그리고 작은 것도 엄격하게 따지는 감독과 그들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때로 중요한 조언을 해주는 전직 야구감독인 다쿠미의 할아버지와 오직 야구밖에 모르던 아버지로 인해 야구를 싫어하게 된 다쿠미의 엄마. 천재투수인 형을 동경한 나머지 야구를 시작하게 된 동생 세하. 이렇게 일종의 공식 같은 전형적인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야구를 사랑하고 오직 야구밖에 모르는 많은 소년들이 등장하지만 이 책의 엄연한 주인공은 배터리, 다쿠미와 고이다. 언제나 최고의 공을 던지면 자신의 역할은 다하는 거라고 여겼던 다쿠미는 고로 인해 자신 이외의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고 역시 포수는 투수의 공을 잘 받기 이전에 그가 던지는 마음과 내면 역시 보듬어줄 줄 알아야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일본에선 800만부 이상이 판매되고 영화와 만화로까지 제작됐다는 소설 <배터리> 두 소년이 만나 서로 끌어안고 부딪히면서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이 펼쳐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지난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어떤 것에 뜨거운 열정을 갖기보다 무덤덤하게, 선생님의 눈 밖에 나지 않고 학교 - 집 - 학교 - 집....이것만을 반복하면서 그저 무사히 학교생활을 마치는 것에 치중했던 날들이었다. 성장소설을 좋아하고 스포츠 만화를 즐겨보는 이유도 아마 밋밋하고 재미없는 나의 학창시절에 대한 보상심리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럼 또 어떤가. 나의 학창시절은 지났지만 내 아이들에겐 몇 년 후 다가올 미래의 모습이다.(운동신경이 무딘 큰아이가 스포츠 선수가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서 내 눈엔 사춘기 소년들의 열정과 고민도 그저 이쁘게만 보인다. 몇 년 후면 내 아이에게 이 책을 슬쩍 건네줄 날이 오겠지. 그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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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숲 15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박선영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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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마악 마라톤을 끝내고 돌아온 기분이다. 호흡이 가쁘다. 계속 숨을 몰아쉰다. 

       

카이의 피아노는!!

역시나 굉장하다.
 

쇼팽 콩쿠르 1차 예선 다섯째날, 

아마미야 슈우헤이를 포함한 네 명의 참가자 연주가 있었다.

예비선발 때 실수했던 기억을 떠올린 카이는

'쇼팽의 숲'으로 달려가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콩쿠르 출전이 무섭고 두렵지만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고,

결과가 어떻든간에 최선을 다해서 뛰어넘을 거라고.


 

아지노 : 산기슭에서 보는 풍경과  중턱에서 보는 풍경,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아주 다르지? 그러니까 올라가야 돼. 올라가면 본 적도 없는 풍경이 보이게 되지.

카이 : 그럼 그 산을 다 올라가면 끝이에요?

아지노 : 아니....더 높은 산을 올라가고 싶어지지....

카이 : ( 난 여태껏 본 적 없는 풍경을......보고 싶어.)

 

카이의 피아노를 어서 듣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내달렸다.

그리고 15권 중반 이후에 등장한 카이의 피아노. 숲의 피아노!!

 

1차 예선 마지막날,

카이 특유의 매력적인 소리를 듣기 위해

장 자크 세로를 비롯한 아마미야 슈우헤이와 아버지 요우이찌로우,

이상하리만치 아지노의 피아노를 증오하던 중국인 출전자 팡 웨이 등,

유명인사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한다.



사실, 콩쿠르 마지막날이라 심사위원들이나 관객들은

연이어 들은 쇼팽의 음악에 지쳐있고 어느정도 긴장이 풀어진 상태.

 

선발기간 내내 컨디션 난조로 연주순서를 여러번 바꿨던 폴란드의 레프,

섬세하면서도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유리알처럼 투명한 그의 연주에

폴란드 심사위원들은 '샛별'이라며 기뻐하고

청중들 역시 폴란드 참가자 중에 우승후보가 나타났다며 환호한다.



그 다음 두번째로 등장한 카이!

그는 초등학교 음악실에서 아지노의 음악을 통해 쇼팽을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린다.

 

'여어, 쇼팽. 나 드디어 여기까지 왔어.

고마워, 쇼팽. 나한테 이 무대를 선물해줘서...'


 

드디어 연주를 시작한 카이,

그의 연주로 콩쿠르 회장안은 일순 살랑살랑...바람이 이는듯,

콩쿠르 회장 안의 모든 사람들을

숲의 가장자리, 피아노의 숲으로 데려간다.

 


아아....어떻게...어떻게 이런 소리가!

피가 끓어오르는 이 느낌....

생명을...불어넣는 것 같은 느낌은...

이 피아노는....

쇼팽을 듣느라 지친 나와....

쇼팽에게 마비되어 있는 청중들을

아니, 이 회장 전체를....

서서히 깨어나게 만든다.

 



어둠이 내린 숲을 살며시 지나가는바람, 나뭇잎들의 속삭임....

 
카이는 쇼팽 그 자체였다!!!



그리고 갑작스레 번쩍하고 내리치는 번개!!

.....

 

<피아노의 숲>을 읽고나면 늘 갈증에 허덕인다.

유아들을 위한 사운드북처럼 만화도 그렇게 제작할 순 없나???

음악을 듣고 싶어. 카이의 음악!!!!!

 

띠지를 보니 조만간 국내에서 애니메에션이 개봉될 예정이라는데...

과연 언제일까....기다려진다.

아이 손 잡고 가서 눈으로만 듣던 파이노의 숲, 카이의 피아노에 푹 빠져보고 싶다.

(카이가 드디어 쇼팽의 강아지 왈츠를 연주한다. ^^)

 

이제 목을 길게 늘이는 일만 남았다.

16권.....제발 올해안으로 나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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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사 오디세이
쓰지 유미 지음, 이희재 옮김 / 끌레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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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보통 평범한 사람에 비해) 조금 많이, 꾸준히 읽는 편이지만 번역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번역된 책을 읽을 때 매끄럽지 않은 문장이나 몇 번을 읽어도 그 뜻을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하거나 껄끄러운 대목이 나오면 ‘이게 내 한계야...’라며 넘어가곤 했다. 그러다 아이의 그림책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데 리듬감없이 밋밋한 문장이나 단어나 용어의 선택에 의심가는 대목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눈으로 읽는 글과 입으로 소리내어 읽는 글에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을 줄이야!) 그림책의 역사애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세계의 모든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이라는데 내 아이는 외면했다. 왜 그럴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린이독서지도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됐다. 바로 '번역'의 문제였다. 그럴때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들은 원문을 비교해서 확인해 본다지만 한글 외엔 어떤 나라의 외국어도 모르는 내겐 불가능했다. 번역자가 누구인지 확인해보고 책을 선택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번역사 오디세이> 이 책은 프랑스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번역가인 저자가 쓴 프랑스 번역사이다. 번역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로 얘기를 시작한 이 책은 서유럽과 아랍권, 다시 프랑스를 아우르며 그 곳에서 어떤 분야의 책이 주로 번역되어지고 그 번역이 어디로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그리하여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꼼꼼하게 짚어주고 있다. (학창시절 세계사를 배우지 않아선지 사실 이 부분은 그리 쉽지 않았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 서유럽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 이슬람을 정복했지만 그들은 이슬람의 문명, 아랍문화에 놀라게 된다. 자신들이 야만족이라 여겼던 이슬람이 따로 번역기관을 두고서 그리스, 로마의 문명을 고스란히 받아 아랍어로 번역하고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모습을 봤으니!! 그에 자극을 받은 서유럽은 번역에 몰두하게 되고 그로 인해 ‘르네상스’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번역의 힘이란, 실로 놀랍다.

 




번역의 질을 거론하면서 ‘벨 앵피델’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프랑스어로 벨 앵피델은 글자 그대로 말하자면 ‘부실한 미녀’인데 ‘아름답지만 원문에 충실하지 않은 번역’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프랑스가 라틴어보다 우월하고 아름답다는 우월감이 아름답지만 정확하지 않은 번역을 낳았다는 것이다.

 




또 번역사마다 번역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있었다. 그 유명한 <율리시즈>를 번역한 발레리 라르보는 한 권의 책을 번역하는 과정을 연애와 비슷하다고 했다. 자신이 번역하는 책은 바로 먼 나라의 공주님이어서 그 아름다운 공주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남편의 지위를 얻고 얼마나 행복한 부부생활을 할 수 있는지는 바로 번역자의 열의에 달려있다고 했는데 무척 인상깊은 대목이었다.

 




의외의 흥미로운 사실도 알게 됐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작가 중에 번역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저자 알렉상드르 뒤마가 <햄릿>과 <아이반호>를 번역했으며 프랑스문학의 대표작가인 앙드레 지드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는데 20년이 넘는 시간을 오직 <햄릿>을 번역하는데 몰두했다고 한다.

 




2년전인가? 국내 모방송국의 아니운서가 번역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화제가 됐다. 얼마후에 그 책은 다시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아나운서 자신이 번역한 것으로 알려졌던 책에 엄연한 번역자가 따로 있었던 것, 즉 대리번역을 했다하여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됐었다. ‘번역도 엄연한 창작’인데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독자를 우롱했다며 반환소동까지 일었던 기억이 난다.

 




'번역은 창작이다.' 당시엔 그 말이 100% 진실인 줄 알았다. 하지만 <번역사 오디세이>를 통해 번역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또 깊이 생각해보게 됐다. 번역은 창작이 아니다. 그렇다고 창작이 아니냐면 그것 역시 아니다.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번역은 반역’도 아니다. 번역은 단순히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기는 일이 아니다. 저자와 일대일로 만날 수 없는 독자들을 위해 둘 사이에서 안내와 조언을 하고 더불어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 예술, 철학을 또 다른 언어로 옮겨 표현하고 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문화의 전달은 바로 번역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걸 기억하자.

 







‘번역은 한마디로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 저울의 한쪽에 저자의 말을 얹고 또 한쪽에는 번역어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이 둘이 균형을 이룰 때까지 작업을 계속해나간다. 하지만 저울에 올리는 것은 사전에 정의된 말이 아니라 저자의 말이다.... 그것은 살아서 고동치는 말이며 원문에서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다리를 뻗어 작품 전체와 긴밀히 얽혀 있다. 저울에는 그 생명의 무게가 얹힌다. 따라서 저울의 또 한편에도 ‘똑같은 생명의 리듬을 타고 움직이는 등가의 무게’가 필요하다. -- 발레리 라르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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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공주 2008-06-3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어머.꼭 읽어보고 싶어요! 알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글샘님의 서재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기사를 읽는데 눈물이 앞을 가리더군요.

 

저 역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데....

제자신이 왜 이렇게 부끄럽게 여겨지지....모르겠습니다.

 
제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이고 싶습니다.

당당한 대한민국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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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어머니 가로막고 "내 세금으로 왜 그러나"

비아냥·제지에도 끄떡 않자 34분만에 차 돌려 

6월26일 새벽 1시31분, 기자는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 앞 도로 위에 있었다. 새문안교회 골목에서 전경들에게 밀린 촛불시위대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새벽 1시32분, 서대문 경찰청 방면에서 왕복 8차로를 가득히 메운 전경들이 방패를 앞세우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전경들의 대열은 끝이 없어 보였다. 뒤로 살수차가 보였다.

▶8차선 꽉 메운 채 방패로 땅 쿵쿵 치며 위협행진






1시40분, 전경들은 새문안교회에서 광화문쪽으로 시위대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전경들은 방패를 어깨 높이까지 치켜올렸다 땅을 내리쳤다. 그때마다 땅이 울렸다. 선임의 선창에 따라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자기들만의 구호를 일제히 외쳤다. 여성들은 겁먹은 표정이었다. 제자리에 얼어붙어 울먹이는 젊은 여성이 보였다. 시위대들은 광화문쪽으로 밀려났다.

1시41분, 2대의 경찰 소속 살수차가 전경들 뒤에 바짝 붙어섰다. "깃발부터 잡아, 강하게 저항하는 놈부터 잡아." 마이크에서는 쉼없이 지령이 내렸다. 살수차는 물대포이자, 전경들의 대오를 지시하는 지휘부였다. 윙~하는 펌프엔진 소리가 들렸다. 살수가 시작됐다. 물대포였다. 시위대들은 물에 젖었다. 여름의 초입인 6월 끝자락의 밤이지만, 차가운 물에 젖으면 살이 떨린다. 곧 입술이 파래진다. 시위대들은 전경들의 위력과 물대포의 서슬에 아무런 저항도 못해보고 광화문으로 광화문으로 떠밀렸다.

1시48분, 먼저 살수를 시작했던 노란색 살수차 대신 옆에 대기하고 있던 회색 살수차가 물을 뿜기 시작했다. 물길이 두 배는 멀리 나가는 듯 했다. 한없이 쏘았다. 살수차의 물탱크에는 6500리터의 물이 들어간다. 7.5미터까지 쏠 수 있다.

▶경찰 인도로 끌어내려 하자 "내 아이에 손 대지 마!"

1시52분, 회색 살수차가 물대포를 멈췄다. 노란색 살수차와 임무교대를 하려는 듯 보였다. 그때였다. 한 30대 어머니가 유모차를 끌고 노란색 살수차 앞을 가로 막았다. 경찰들이 몰려와 인도로 끌어내려 했다. 어머니는 "유모차에 손대지 마, 내 아이에게 손대지마"라고 외쳤다. 서슬에 놀란 경찰들은 물러났다. 시민들은 "아기가 있다"며 유모차를 에워쌌다. 경찰들은 당황했다. 윙~하고 움직이던 노란색 살수차의 펌프엔진 소리가 멈췄다.

곧 한 무리의 전경들이 방패를 앞세우고 몰려 왔다. 방패로 땅을 치며 구호를 외쳤다. 시민들이 "애가 놀라잖아"라고 항의했다.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전경들은 상황을 파악하고 조금 뒤로 물러섰다.

순간 노란색 살수차가 뒤로 빠졌다. 회색 살수차가 이제 주된 역할을 할 모양인 듯 했다. 방금보다 더 강한 엔진음이 들렸다. 물대포 발사 준비 소리였다. 어머니는 곧바로 회색 살수차로 유모차를 끌기 시작했다. 전경들이 몸으로 막으려 했지만, 유모차를 가로막진 못했다.

▶유모차 밖으로 아이 두 발이 쑥, 아! 눈물이 핑~

1시55분, 어머니는 두번째 회색 살수차 앞에 섰다. 전경들은 멈칫 거리며 다시 대오를 갖췄다. 어머니가 하늘을 쳐다보다 손으로 눈을 가렸다.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두 눈가는 젖어 있었다. 그 순간 그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두 아이의 아빠인 기자는 그냥 망연히 유모차 앞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2시01분, 전경들이 빠졌다. 회색 정복을 입은 순경들이 대신 유모차를 에워쌌다. 일부는 불량스런 표정으로 껌을 씹고 있었다. 유모차를 등지고 있던 순경 한명이 유모차 덮개를 슬쩍 들치려 했다. 껌 씹던 순경이었다. '안에 혹시 인형이라도 대신 넣고 가짜 시위하는 거 아냐?' 이런 표정이었다. 시민들이 "뭔 짓이냐"고 항의했다. 순경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유모차를 등졌다.

사람들이 모인 광경을 보고 사진기자들이 몰렸다. 플래시가 터졌다. 어머니는 "제 얼굴은 찍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폴로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는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유모차가 심하게 요동 쳤다. 그리고 유모차 밖으로 아이의 두 발이 쑥 삐져 나왔다. 온갖 굉음에 격한 소음과 쏟아지는 플래시, 아기는 얼마나 심한 공포와 불안에 불편했을까. 눈물이 핑 돌았다.

▶"저 평범한 엄마입니다, 근데 왜 저를 여기 서게 만듭니까"

2시10분, 여경들이 투입됐다. 뒤에서 "빨리 유모차 인도로 빼"라는 지시가 들렸다. 여경들은 "인도로 행진하시죠. 천천히 좌회전하세요"라고 유모차와 어머니를 에워쌌다. 어머니는 동요하지 않았다. "저는 직진할 겁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내가 낸 세금으로 만들어진 도로 위에서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자유가 있습니다." 또박또박 말했다.

2시15분, 경찰 간부 한명이 상황을 보더니 "자, 인도로 가시죠. 인도로 모시도록"하고 지시했다. 여경들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어머니는 다시 외쳤다. "저는 저 살수차, 저 물대포가 가는 길로만 갈 겁니다. 왜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국민들에게 소화제 뿌리고, 방패로 위협하고, 물 뿌립니까. 내가 낸 세금으로 왜 그럽니까."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떨림은 없었다.

그때 옆의 한 중년 여경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니, 자식을 이런 위험한 곳으로 내모는 엄마는 도대체 뭐야"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대답했다. "저 평범한 엄마입니다. 지금껏 가정 잘꾸리고 살아오던 엄마입니다. 근데 왜 저를 여기에 서게 만듭니까. 저는 오로지 직진만 할겁니다. 저 차(살수차)가 비키면 저도 비킵니다."

2시20분, 아까부터 껌을 씹던 순경이 유모차를 등지고 섰다. "어, 저 허리 아파요, 유모차로 밀지 마요"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시민이 "그럼 당신은 유모차에도 치이냐"라고 면박을 줬다. 순경은 다시 "그 잘난 놈의 아들 얼굴이나 한번 봅시다"라고 곁눈질했다. 어머니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2시23분, 살수차가 조금 뒤로 빠졌다. 경찰들이 다시 "인도로 행진하십시오"라고 어머니를 압박했다. 어머니는 외쳤다. "전 저 차가 가지 않으면 하루 종일 여기에서 서 있겠습니다."

▶"전 저 차가 가지 않으면 하루 종일 여기에서 서 있겠습니다"

2시26분, 경찰 간부가 다시 찾아왔다. "살수차 빼고, 병력 빼." 드디어 살수차의 엔진이 굉음을 냈다. 뒤로 한참을 후진한 차는 유턴을 한 뒤 서대문쪽으로 돌아갔다.

2시27분, 어머니는 천천히 서대문쪽으로 유모차를 밀기 시작했다. 경찰들이 다시 유모차를 에워싸려 했다.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야, 유모차 건드리지마, 주변에도 가지마." 경찰들은 뒤로 빠졌다.

어머니는 살수차가 사라진 서대문쪽을 잠시 응시하다 다시 천천히 유모차를 끌었다. 유모차를 따라 갔다. 하지만 말을 걸 수는 없었다. 기자이기 이전에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묵묵히 유모차 뒤를 따랐다.

2008년 6월26일 새벽, 서대문쪽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던 물세례에 소스라치던 이들은 갑자기 물대포가 끊긴 이유를 잘 모를 것이다.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 기자는 그것을 대신 전할 뿐이다. 온몸으로 2대의 살수차를 막아선 한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을.

이태희 < 한겨레21 >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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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일이래???

오늘 이 시간까지 내 서재를 방문한 사람이 96명이라고???

우와, 최고 기록이군.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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