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포스 Olympos
댄 시먼스 지음, 김수연 옮김 / 베가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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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가을이었다. 독서모임 때문에 찾은 대형서점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책이 있었다. 10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툼한 책. 서가에 꽂힌 다른 책 중에서 후광이 비친 듯 월등함을 자랑하던 책. 그건 바로 <일리움>이었다. 그 날 이후로 <일리움>은 한동안 날 괴롭혔다. 내 머릿속에서 두 명의 내가 끝없이 싸웠다. “두 눈 딱 감고 질러버려!” “아니, 그럼 안돼. 어떤 책인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잖아.” “질러버렷” “절대 안돼”...그러다 잊혀졌다. 아니, 포기해버렸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그러다 2009년 가을. 2년 만에 난 감격의 순간을 맞았다. <일리움>의 후속작이자 완결편인 <올림포스>를 드.디.어. 만난 것이다. 전편보다 더 두툼해진 위용을 자랑하는 책을 안고 얼마나 기뻤던지. 꿈에 그리던 연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일리움>을 읽지 않고 <올림포스>를 먼저 봐도 상관없을까? 두툼한 두께만큼 책에 실린 이야기도 장난아니게 복잡할텐데 그걸 몽땅 생략하고도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맛난 음식을 앞에 두고 무시하는 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일단 먹어야지....어디어디, 맛 좀 볼까?




책의 시작은 사뭇 도발적이다. 동트기 직전, 잠에서 깨어난 헬렌은 연인 호켄베리가 있었던 자리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아폴로와의 결투에서 목숨을 잃은 남편 파리스. 그토록 아름답던 파리스가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헬렌은 장례식을 앞두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한편 메넬라오스는 전부인이자 자신을 배신한 헬렌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미는 순간만을 노리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소동이 일어난다. 오이노네란 여인이 자신이야말로 파리스의 진정한 아내라고 주장하며 파리스를 죽인 것은 아폴로가 아니라 필록테테스가 쏜 치명적인 화살 때문이라고 폭로한 것이다.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혼란에 휩싸여 술렁이는 사이 오이노네는 파리스의 시신을 뒤덮은 화염 속으로 뛰어들고 마는데...




초반 극히 일부에 불과한 이야기를 읽고 일순 혼란에 빠졌다. 파리스가 죽었다? 아니, 죽은 건 파리스가 아니라 헥토르가 아니었나? 거기다 헬렌의 연인이라는 호켄베리는 누구고 오이노네는 또 누구야? QT는? 이거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한 거 아니었나?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얘기야? 그리스로마 신화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 조금은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그것과 미묘하게 어긋나는 이야기 전개에 적잖이 놀라고 당황했다. 책장을 덮고 표지부터 다시 찬찬하게 훑어보니 눈에 들어오는 한 줄의 문장이 있었다. ‘오래된 미래와 신화의 과거가 조우한 스페이스 판타지의 대단원’...그제서야 ‘아하!’ 무릎을 쳤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호메로스의 ‘일리어드’는 10년간 이어진 그리스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노래한 대서사시다. 그걸 저자 댄 시먼즈를 교묘하게 틀어놓았다. 거기에 그리스로마의 수많은 신들의 이야기까지 덧붙여서. 가장 큰 결정타는 이 소설이 역사팩션이 아니라 ‘SF'라는 점이다. 이쯤 되면 궁금증이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기 시작한다. 그리스의 신들을 지구도 아닌 우주로 데려다놓고 그들의 손에 과학문명을 쥐어주었다. 그런 다음 전쟁을 벌였던 그리스와 트로이가 힘을 합해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맞서도록 치밀한 전략을 세워놓은 거였다. 무수히 많은 그리스로마의 신들이 저자가 각본대로 움직이는 배우이자 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었고 그 이야기에 탄력과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모라벡이라던가 고전인류가 등장하고 호켄베리가 그들을 이어주는 중요한 인물로 나타난 것이었다.




솔직히 아흔다섯 개의 꼭지로 이뤄진 <올림포스>를 읽는 건 쉽지 않았다. 1087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무게로 인해 팔과 어깨가 묵직한 건 차치하고 난생 처음 듣는 인물과 용어로 본문 중간중간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되짚어 나오기 일쑤였다. 스타워즈 시리즈도 통달하지 못한 나였으니 오죽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나의 도전에 충분한 보상이 될 만큼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마지막 결말을 보고 나면 흥미가 떨어지는 여타소설과 달리 이 책은 완결편을 보고 나니 전편인 <일리움>이 더 궁금해진다. 이제 남은 건 시기뿐. 대체 언제 지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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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책쟁이들 - 대한민국 책 고수들의 비범한 독서 편력
임종업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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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하는 분이세요?” 책이 담긴 택배상자가 일주일에 평균 3~4번 집에 오는데 택배 기사분이 간혹 질문을 한다. 그때마다 내 대답은 뻔하다. “뭐하긴요. 그냥 아줌마죠” 집안의 가구 배치를 바꾸기 위해 피아노를 옮겼다. 크고 무거운 피아노를 남편 혼자 옮길 수 없어서 불렀던 이삿짐센터 아저씨는 이담에 이사 갈 때 자기네들 절대 부르지 말라 한다. 이유는 저 많은 책 옮기다 골병든다는 것. 문제는 그렇게 말한 이삿짐센터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거다......ㅡㅅㅡa;; . 




도서관 자원봉사 때 작은 아이를 봐주시기 위해 집에 오시는 친정엄마는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하시는 말씀. “집이 이게 머꼬?” 방방마다 쌓여있는 책을 둘러보고 혀를 끌끌 차며 “이건 사람 사는 집이 아니다.”, “이러다 집 내려앉겠다”고 하고 곁에 머쓱하게 서있는 사위에게 “책만 자꾸 사들이는 각시 어째 데리고 사노. 야단 좀 치라.”고 하신다. 친정엄마는 알뜰살뜰 살림사는 것보다 책 읽고 모으는 재미에 푹 빠져있는 딸이 답답하고 못 마땅하신 거다. 허나 어쩌겠는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걸.




<한국의 책쟁이들>에는 우리나라에서 책에 관한한 내노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한마디로 책 고수 중의 고수들이 털어놓는 일편단심 책사랑 이야기다.  집안일 하다 잠깐 짬이 나서 이 책을 들었는데 초반부터 빠져들고 말았다. 조선시대 이름난 간서치 이덕무의 일화를 시작으로 책 때문에 방고래가 꺼진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파트가 무너질까봐 걱정하는 사람, 오랫동안 애지중지 모아온 책으로 책 박물관을 개관하거나 아예 부부가 북카페를 차리는 사람, 독서모임에서 평생의 반쪽을 만나 결혼한 사람들... 그들에게 있어 헌책방 나들이는  성지순례였고 가장 큰 슬픔은 책을 공간이 없다는 거였으며 책을 버릴 때마다 가슴 한 켠이 무너지는 아픔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눈만 뜨면 출근도장이라도 찍듯이 서점으로 달려가서 바리바리 책을 안고 들어오는 그들의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틈만 나면 책 살 궁리만 하지만 그나마 술이나 도박, 사치를 안 하니까 같이 사는 거라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펼치는 좌충우돌 책 애정론에 쿡쿡 웃음을 터뜨리는가 하면 때론 고개를 끄덕였고 회사에서 책 구입비를 준다는 대목은 부러워서 샘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병영도서관에 관한 대목이었다. “군인이 총만 잘 쏘면 됐지 뭐가 필요한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창 젊은 시기에, 어떤 분야든 열정적으로 몰두할 시기의 젊은이들에게 그저 너희들은 병역의무만 다하라고 하는 건 올바른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병역을 다하는 동안 꾸준히 교양을 쌓아 올바른 가치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부대에는 병영도서관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아니, 12개의 기지 도서관에 15만 9천여 권이 넘는 장서를 갖추고 있는 미군에 비하면 우리 군 도서관은 아예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고 싶어서 안달하던 어린 시절에 비해 지금의 나는 읽을 책을 쌓아두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어린 시절에 비해 더 안달을 한다. 책을 많이 못 읽는다고 책을 더 못 갖는다고 불평을 했다. 많이 읽고 많이 갖고 있는 게 제일이라고 여겼던 거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고 자만에 빠진 자의 모습이란 걸 알 수 있었을텐데, 그렇지 못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간다면 내겐 미래가 없다.




<한국의 책쟁이들>을 만나 다행이었다. 이 책을 통해 책에 목말라하던 과거의 나와 책에 빠져사는 현재의 나를 만났다.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내 미래의 모습을 그리는 계기를 갖게 됐다. 나만의 작은 도서관을 가꾸기 전에 모두를 위한 도서관을 일궈나가자고. 마침 군복무 중인 조카가 군대에서 도서관을 꾸민다며 내게 도움을 청해왔다. 절묘한 순간의 포착.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는걸까. 희미하던 내 미래가 조금씩 뚜렷한 형체를 찾아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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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본능 - 법의곤충학자가 들려주는 살인자 추적기
마크 베네케 지음, 김희상 옮김 / 알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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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전이었다. 지인이 며칠 여행하고 돌아오니 집에 도둑이 들었더란다. 인근의 다른 집도 빈집털이범 때문에 소소하게 잃어버린 게 많았던 모양이다. 파출소에 신고하니 경찰 몇 명이 와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지인의 가족에게 질문도 했다는데. 주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웃집 아저씨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근데, 족적은 떴습니까?” 지인을 통해 그런 얘길 듣는 순간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핫, 그 아저씨, 텔레비전 너무 많이 보셨다”하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CSI나 본즈 같은 미국 드라마를 통해 처음 만나게 된 과학수사대. 사건현장에 남겨진 작은 단서 하나만으로도 미궁에 빠졌던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그들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다. 놀랍고 눈부셨다. 텔레비전이 아닌 실제 과학수사대는 어떨까. 궁금했다. 마르크 베네케의 <살인본능>을 통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법의곤충학자가 들려주는 살인자 추적기’란 부제만으로도 길 그리썸의 카리스마와 포스가 느껴진다.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연쇄살인범의 고백>에 이어 저자의 범죄 3부작이자 완결편인 <살인본능>은 그야말로 엽기적이고 참혹한 사건들이 총집합된 책이었다. 토막살인의 전말을 밝히는 과정으로 시작한 책은 요즘의 사건수사에서 필수적으로 행해지는 지문감식이나 유전자 감식이 수사기법으로 도입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간혹 숲이나 인적이 뜸한 장소에서 뼈가 발견됐다는 뉴스를 접하는데 그런 사건의 경우 발견된 뼈나 사체를 통해 사건의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보디 팜’을 설립했다고 한다. ‘보디 팜’은 시체의 부패가 진행되는 과정은 물론 곤충들이 서식하는 양상을 관찰하는 연구소인데 그 장소가 대학교의 축구장 지하에 자리잡고 있다는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또 부패가 진행되는 사체의 사진 한 장이 수록되어 있는데 본문의 내용을 읽기 전에는 모형일거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나중에 보니 실제 사진이란 걸 알게 됐다. 그 순간의 오싹함이란....




이후 책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건들에 대해 얘기한다. 희대의 납치극 찰스 린드버그 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여인들을 잔혹하게 유린했던 연쇄강간범 폴 베르나르도와 칼라 호몰카, 살해 후 인육을 먹은 뎅케, OJ심슨사건 등 그동안 책이나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접했던 수많은 살인사건들보다 몇 배 더 잔인하고 참혹하게 다가왔다. 그 중에서도 동네의 어린 소년들을 사귄 다음 그들을 집으로 유인해 잔인하게 살인했던 제프리 다머는 정말 소름이 끼쳤다. 17명을 살해한 잔혹하고 엽기적인 범행보다 더 경악했던 건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정도로 순진하고 선량해 보이는 얼굴의 그가 그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다니. 그는 법정의 최후진술에서 말했다. “무엇이 저를 그토록 잔혹하고 흉악한 놈으로 만들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 아들을 지켜보던 부모의 사진이 오래도록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흥미진진하고 스릴 넘치는 과학수사대의 이야기를 만나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손에 들었던 책이다. CSI시리즈의 출연배우들의 원본이자 실제 현실의 모습을 볼 거라 여겼는데,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선 날카로운 경종이 울렸다. 저자는 서두에서 말했다. ‘현실은 그 어떤 판타지 소설보다도 스릴이 넘친다’고. 그 말이 진실이었다. 연이어 계속되는 범죄와 살인,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범인, 사건해결을 위해 개인적인 일상을 포기하는 수사관들. 그건 더 이상 소설도, 드라마도, 영화도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들. 착한 얼굴의 탈을 쓰고 우리 가족을 호시탐탐 노리는 잔인한 사람이 이웃에 없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책제목처럼 우리의 내면엔 정말로 ‘살인본능’이 존재하는 걸까. 결코 열면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마냥 묵직함으로 다가온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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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꿀벌의 세계 - 초개체 생태학
위르겐 타우츠 지음, 헬가 R. 하일만 사진, 최재천 감수, 유영미 옮김 / 이치사이언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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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전 세계적으로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꿀벌이 사라지는 뭐 어때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많은 일간지에서  계속해서 비슷한 소식을 보도하니 왠지 궁금해졌다. 꿀벌이 어떤 연유로 사라지고 있는지 꿀벌이 사라짐으로 해서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전 세계의 꿀벌 집단이 5,60년대에 비해 현재는 절반가량 줄어들었고 지역에 따라선 80% 가까이 줄어든 곳도 있다고 하는데 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온도변화가 꿀벌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했으며 농약의 대량살포나 전자파 등이 꿀벌의 감소를 불러온 주된 원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꿀벌이 사라짐으로 해서 양봉업계는 물론이고 농업분야 전체, 더 나아가 생태계의 위기로 이어진다고 하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꿀벌을 단순히 자연의 일부이자 생태계의 일부라고 여겼는데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걸 알게 되니 꿀벌이 어떤 곤충인지 더욱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호기심 가득한 상태로 표지를 넘겨 본문에 들어가기도 전에 또 한 번 놀랐다. ‘꿀벌이 포유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전공공부랑 담을 쌓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생물학도였던지라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최재천 교수인데 허튼 소리를 늘어놓지는 않았을테고 그럼 이 모든 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다.




‘꿀벌은 곤충이다’ 이렇게 서두를 던진 저자는 19세기에 이르러 척추동물의 지위를 얻었다고 주장한다. “꿀벌 군락은 하나의 생물이다. 그것들은 척추동물이다. 일벌은 생명 유지와 소화를 담당하는 몸이고, 여왕벌은 여성의 생식기이며, 수벌은 남성의 생식기이다”(3쪽) 꿀벌 한 마리 한 마리를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꿀벌 군락을 쪼갤 수 없는 전체이자 하나의 생명체, 동물로 인식하고 그걸 ‘초개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럴 듯하다. 저자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꿀벌 군락은 ‘척추동물’일 뿐 아니라 ‘포유동물’이라고 주장한다. 그 증거들을 이후 10개의 장으로 나누어 자세하게 설명한다. 꿀벌의 탄생에 있어 유전자 분자의 복합적인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꿀벌의 낮은 번식률과 유충을 양육하기 위해 여왕벌이 로열젤리를 분비하는가하면 유충의 체온을 인간과 비슷한 35도로 유지하기 위한 난방벌의 노력, 벌집을 위협하는 침입자를 미이라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꿀벌의 학습능력이었는데 그동안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걸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꽃을 찾아낸 꿀벌이 동료에게 춤으로 꽃의 위치나 꿀의 정도를 알려주는 건 물론이고 좌우구별이나 같고 다름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한번 찾아서 꿀이 없는 꽃에는 특별한 화학적인 표지까지 남긴다고 하니 정말 놀랍다.




예전에 벌에 쏘인 적이 있어서 ‘벌’이 주변을 날아다니면 덜컥 겁부터 났다. 그런 좋지 않은 경험이 있어서 처음 이 책을 대할 땐 용기가 필요했다. 본문 속에서 만날 벌의 사진이 두려웠다. 하지만 책장이 조금씩 뒤로 넘어갈수록 꿀벌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정면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는듯한 표지사진도 더 이상 두렵거나 징그럽지 않았다.




“꿀벌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면, 인간은 그로부터 4년 정도밖에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꿀벌이 없으면 수분도 없고, 식물도 없고, 동물도 없고, 인간도 없다...” 325쪽.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이 말에서 언급된 4년이 지났는지, 아니면 진행 중인지 나로선 알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꿀벌에 대해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하나씩 알아나가는 것. 저자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닐까. 모처럼 나간 야외에서 벌이 날아다닌다고 성가신 불청객으로 취급할 게 아니라 이 지구에서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함께 살아나갈 생태계의 동료다. 작지만 그 속엔 엄청난 정보로 가득한 생명체, 꿀벌. 그들의  놀랍고 경이로운 세계로 초대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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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인간의 경제학 - 경제 행위 뒤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 탐구
이준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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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란 참 신기하다. 숫자와 문자가 같이 있을때 이상하게도 문자보다 숫자에 먼저 눈이 간다. <36.5℃ 인간의 경제학>이란 책을 봤을때도 그랬다. 분명 ‘경제학’이란 글자를 먼저 봤다면 틀림없이 머릿속에서 이 책이 어떤 책일지, 어려울지 쉬울지의 판단을 내리고 고심했을텐데, ‘36.5℃’가 먼저 눈에 띄면서 순식간에 결정이 내려졌다. ‘36.5℃? 인간의 적정체온을 나타내는 거 아냐, 왠지 쉬울 것 같은걸...아니, 재밌을 것 같아.’ 막상 책을 받아들고 나거야 내가 터무니없이 엉뚱한 결정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 쉽고 재밌는 경제학 책이 어딨냐?’ 하지만 책을 손에 들고 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엉뚱한 결정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이거 의외로 쉬운데!!’




<36.5℃ 인간의 경제학>의 저자 이준구 박사는 그동안 경제학 서적을 집필했는데 ‘경제학도라면 그의 책을 최소 한 권 이상 읽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제학계에 알려진 분이었다. 그런 저자가 최근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게 바로 ‘행태 경제 이론’이다. 사실 ‘행태 경제학’이란 단어를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은데 그 속을 조금 알고 보면 결코 어렵거나 골치 아픈 이론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인간이 취하는 모든 행동에는 인간의 심리가 숨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거기에 이 책은 곁가지 하나를 추가한다. 바로 ‘경제’의 개념이다. 즉,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관없이 인간이 하는 행동에 경제적인 이론이 숨어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전에 반드시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우리 인간은 생각만큼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주먹구구식으로 생각하고 결정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종이 한 장을 50번 접었을 때의 두께를 대충 ‘몇 센티 정도’라고 짐작하는데 책에서 알려주는 수치는 어마어마했다. 또 어떤 사람의 성격이나 특징에 대해 알려주고 그의 직업을 짐작할 때나 배우자를 고를때도 우린 어림짐작으로 판단하는 경향을 보여준다고 한다.




바로 그런 것들이 우리의 일상은 물론 경제활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경쟁관계에 있는 슈퍼마켓이나 대형마트에서 주로 써먹는 ‘미끼상품’이나 ‘묶음판매’가 구매자들로 하여금 충동구매를 부추기는 효과를 가져오는데도 우린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 그저 어떤 상품을 저렴하게 구입했다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똑같은 금액의 돈이라도 어떤 경로를 통해 자신에게 들어왔느냐에 따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대목은 정말 놀라웠다. 왠지 나의 어리석은 측면을 들킨듯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후회한다. 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일간지에 끼어 들어오는 대형마트 전단지를 볼 때 기저귀값이 얼마인지, 어디가 얼마나 싸게 판매하는지부터 체크했다. 딴에는 꼼꼼하게 구입한다고 낱개당 가격이 얼마인지 전자계산기로 두드리며 비교하는 알뜰함을 보였다고 여겼는데 그게 바로 미끼에 걸려들었던 격이라니...한심하기만하다.




‘소설처럼 재밌는 경제학 책’을 쓰고자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36.5℃ 인간의 경제학> 이 책이 내게 소설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설만큼 흥미로운 책이었다. 다른 경제관련 책에 비해 비교적 쉬웠다. 나의 일상과 행동, 심리에 어떤 경제적 논리와 이론이 숨어있는지 알고 싶은 이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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