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가 사는 집
나카무라 요시후미 지음, 정영희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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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언니에게서 몇 장의 사진이 톡으로 날아왔습니다. 중장비를 동원해서 땅을 파고 수도관을 묻는 사진에 ‘웬 공사장?’하고 의아했는데 언니 가족이 살 집을 짓기 시작한 거였습니다. 십여 년이 넘게 인도에서 생활한 언니 가족은 귀국하자마자 거창에 자리를 잡더군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처음엔 조금 걱정이 됐습니다. 일 년에 몇 번 한국을 드나들긴 했지만 최근 국내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를텐데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새로이 뿌리를 내리겠노라고, 귀농을 하겠다고 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형부의 소원은 농부가 되는 것이었고 언니는 그 뜻을 따라 농부의 아내가 되어 인생이모작을 시작했는데요. 그런 언니 가족에게 집을 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충분히 알 것 같았구요. 나도 언젠가는 우리 가족을 위한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습니다.

 

<건축가가 사는 집>은 제목에서 끌린 책입니다. 다른 이를 위해 집과 건물을 설계하고 짓는 건축가가 자신이 살 집은 짓는다면 어떻게 할까 궁금했거든요. 거기다 저자가 주택전문 건축가로 알려진 나카무리 요시후미. 집을 순례하고 집을 짓는 것에 대해 그가 쓴 몇 권의 책이 예전에 국내에서도 출간됐고 눈도장도 찍어둔 책이었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건축가가 집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절호의 기회가 왔구나 싶었습니다.

 

한창 젊은 무렵부터 주택 건축에 빠져서 살았던 저자가 쉰을 앞둔 나이에 문득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이 진정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심장을 두근대게 했고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동경했던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저자는 여행을 떠납니다. 20세기 주택의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 기념비적인 주택을 찾아 일본은 물론 미국과 대만, 네덜란드 등을 하나하나 순례해 나갑니다.

 

그래서 책의 구성도 정말 단순합니다. 모두 스물네 채의 집이 소개되어 있는데요. 저자는 그 곳의 거주자이자 설계를 했던 건축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건축가가 갖고 있는 집에 대한 생각, 신념은 무엇인지 자신이 살 집을 지을 때 어떤 것에 가장 중점을 두었는지를 풀어내는데요. 집의 설계도면과 내부 모습을 알 수 있는 사진과 함께 수록되어 있어서 건축가의 생각이나 인생관을 더욱 잘 느끼게 해줍니다.

 

스물네 채의 집을 둘러보는 것은 실로 순식간이었습니다. 건축가의 개성을 그대로 빼닮은 듯 스물네 채의 집은 모두 하나같이 독특했고 아름다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벽면과 더블 엑스 형태의 계단이 인상적이었던 ‘적층의 집’, 폐선 직전의 낡은 페리가 주택과 스튜디오로 탈바꿈한 ‘닐스의 페리보트 하우스’, 울창한 숲으로 전면 창을 내고 지그재그로 집을 펼쳐놓은 듯한 ‘지그하우스/재그하우스’, 둥근 지붕을 얹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카사ㅡK’, 외관이 독특한 ‘도그하우스’. 급경사인 대지의 특징을 살려서 폭이 좁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놓고 그 끝에 한순간에 열리는 공간과 아름다운 정경을 배치한 ‘보통의 집’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하야시 선생은 자신의 책을 통해 “설계는 내가 앉을 곳을 결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 코너를 ‘주방 겸 식당 겸 서재 겸 난로가 있는 라운지’라 칭하며 ‘옛 농가의 주인장이 머무는 화롯가 자리를 연상하면 딱 맞을 장소’라고 했지요. 그러니 이 집의 거주자가 될 하야시 쇼지 씨가 이 집의 설계자인 본인 스스로에게 ‘긴장을 풀고 릴렉스 할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의뢰해 탄생한 공간이라 말해도 좋을 겁니다. -243쪽.

 

도심의 아파트가 아닌 나의 집을 갖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에서 머물 뿐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조금씩 변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어떤 집을 지을까’ 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어딜까’를 찾는 것부터 해야된다면....전 아마 답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갑자기 가슴이 설레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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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배추 볶음에 바치다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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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도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 가면 ‘코코야’란 이름의 가게가 있습니다. 일본어를 모르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아기자기한 가게 이름만 보면 옷이나 액세서리 같은 작은 소품을 판매할 것 같은데. 아닙니다. 반찬 가게라고 하네요. 놀랍죠? 근데 더 놀라운 게 있습니다. 바로 가게의 주인장인데요. 나이가 ‘환갑’, 60세가 넘었습니다. 사장만 이 아니라 두 명의 점원 모두 60세를 넘겼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할머니’ 소리 들으며 손주들 재롱에 여생을 편히 보낼 때인 것 같은데 이 분들에게 그런 소리를 꺼냈다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꾸지람을 들을 것 같습니다.

 

‘코코야’의 세 여인, 사장인 코코와 마쓰코, 이쿠코를 보고 있으면 나이를 먹는다는 게 뭔가 의문이 듭니다. 나이 60을 넘기면 누구나가 그렇듯이 그네들 역시 말 못할 사연 하나씩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남편과 이혼했거나 첫사랑을 잊지 못하거나 남편과 사별하여 때로 외롭지만 그것으로 인해 어둡고 우울한 일상을 보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코코는 인생에서 ‘공격’을 최고의 모토로 삼을 정도로 활달하고 진취적이에요. 좋은 재료로 정성껏 밥을 짓고 맛깔 나는 반찬을 만들어 가게를 찾는 사람들에게 파는 것 자체를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시도 때도 없이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가하면 때론 감성에 젖어 추억에 잠기고 그러면서도 씩씩하게 가게를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면 이 사람들 나이가 정말 60세가 넘는 거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까요. 그들이 풀어놓는 살아온 이야기, 음식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래, 살아온 만큼 슬픔이나 아픔이 생기는 건 당연한 순리니까 거스르려고 하지 말고 지금부터 좋은 사람들과 좋은 추억으로 메우면 되지 뭐. 이런 생각도 듭니다.

 

얼마전 심한 감기몸살을 앓고 난 이후로 입맛을 잃었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고 무언가 먹고 싶은 것조차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싶어서 억지로라도 먹고 나면 속이 더 거북했습니다. 왜 이럴까 신경은 쓰였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어요. 오히려 저절로 다이어트가 되겠다고 속으론 웃었어요. 하지만 문제는 다른데서 생기더군요. 제가 입맛을 잃으면서 음식을 만드는 횟수도 줄어버린 거지요. 가족들의 식탁이 점점 초라해지던 어느날 보게 된 책이 바로 이 <양배추 볶음에 바치다>였습니다. 처음엔 표지에 그려진 갖가지 음식 재료를 보면서 그냥 만화<심야식당>처럼 음식을 이야기하는 책인가 보다 했는데요. 평범하게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누군가 맛있게 먹는 일상이 소중한 추억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끼게 됐습니다.

 

며칠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한 여배우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먹는 것 자체가 우리를 구성하고 만드는 것” “앞으로 뭘 먹느냐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직결된다고 생각한다.”고 말이지요. <양배추 볶음에 바치다>를 읽고 나서일까요? 그 말이 화악 와 닿더군요. 혹시 그 배우도 이 책을 읽은 걸까요?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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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빛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5
이누이 루카 지음, 추지나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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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와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을 즐기지만 호러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읽으면서 수시로 머리카락이 삐죽 서고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는다면 결코 유쾌한 경험이라고 할 수 없다. 거기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뒷덜미가 서늘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진다면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게 호러물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꽃샘추위로 날씨가 싸늘한 때는 더. 하지만 최근 읽은 <여름 빛>은 왠지 끌렸다. ‘호러 여왕의 강림’이라는 문구가 표지에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기이한 푸른빛을 발하는 아이의 서늘한 눈매에 이미 꽂혀 버렸으니까. 난 생각했다. 이건 결코 소름끼치는 공포가 아닐 거라고.

 

제목이자 표제작인 [여름 빛]은 전쟁발발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서 시골의 친척집에 머물게 되는 소년 데스히코의 이야기다. 물자가 부족한 때 타지에서 들어온 데스히코는 마을 아이들의 괴롭힘을 받는다. 하지만 데스히코는 친구 다카시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다카시는 한쪽 얼굴에 검은 반점이 있는데 그것을 두고 사람들은 다카시를 임신한 엄마가 바다에 떠밀려온 상괭이라는 물고기를 먹고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마을에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죽는 사람들이 생길 때마다 다카시가 생전에 그들과 눈을 맞추었기 때문이라면서 다카시를 불길한 아이로 매도해버린다. 그런 어느날 다카시는 데스히코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눈빛이 어느 순간 푸른 빛을 내는지. 그리고 데스히코가 엄마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며 어느 도시로 향하는데 그곳에서 다카시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강한 푸른 빛을 발하게 된다. 그 도시에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

 

[백 개의 불꽃]은 초라한 외모를 한 언니 기미가 아름다운 동생 마치를 시기 질투하여 벌어지는 이야기다. 귀 주위에 작은 구멍 ‘액상’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진다는 얘기를 들은 기미는 자신이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생을 액막이로 삼는다. 매일 하나씩 백일 동안 백 개의 양초를 켜서 그것이 모두 다 타면 소원 성취한다는 것이다. 일생에 한 번밖에 하지 못하는 강력한 저주라는 ‘백 개의 불꽃의 액갚음’을 해버린 기미는 곧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집에 화재가 나서 동생이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는 것. 그 바람에 동생은 혼담도 무산되어 버리지만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미에게 기모노를 선물한다. 그 과정에서 기미는 동생의 귀에서도 ‘액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선천성 이루공을 잘못 알고 오해함으로써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만 결국 자매는 서로의 진실된 마음을 알게 된다.

 

[이]에서 하세가와는 친구 구마노미도의 집에서 퇴원 기념 저녁을 한다. 회와 맥주, 버섯과 해물을 푸짐하게 넣은 해물탕을 다 먹고도 ‘먹고 싶다’는 생각에 끊이지 않는 것이 하세가와는 이상했다. 그 흰 살 생선 탓일까. 오른팔을 잃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원인이 ‘없어야 할 이빨에 당했’다는 건 또 뭘까. 궁금해 하는 하세가와에게 구마노미도는 말문을 연다. 삿포로 축제의 금붕어 낚시에서 건져 올린 화금붕어로 인해 시작되는 믿기 어려운 기이하고도 소름끼치는 일들을....

 

책은 1,2부로 나뉘어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1부와 2부의 분위기는 판이하게 다르다. 1부가 [여름 빛]을 비롯해서 [쏙독새의 아침] [백 개의 불빛]은 과거를 배경으로 기이하지만 그래도 온기가 느껴졌다면 2부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이] [Out of This World] [바람, 레몬, 겨울의 끝]을 통해 호러의 본모습, 잔인함과 잔혹함, 공포가 어떠한 것인지 확실하게 드러낸다. 거기에 약간의 여운까지....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엄청난 몰입감. 표지를 넘겨 덮을 때까지 쉼없이 내달렸다. 저자 이누이 루카는 <여름 빛>을 통해 처음 만났지만 그녀의 작품이라면 이후 언제라도 다시 만나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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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잊지 말아요 - 아들이 써내려간 1800일의 이별 노트
다비트 지베킹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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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트 지베킹. 저자의 이름은 낯설지만 그의 책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제목보다 ‘아들이 써내려간 1800일간의 이별 노트’라는 작은 글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자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에게 1800일은 어떤 날들이었을지 궁금했다.

 

 

책은 불길한 꿈으로 시작된다. 언어능력이 크게 떨어지고 기억을 잃어가는 저자의 엄마는 어느 날 저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고. 엄마 아들이라고 말하는 저자를 그녀는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녀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나는 다시 아기가 될 거야.”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는, 때론 남편과 결혼한 것마저 잊은 엄마의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다시 아기가 될 거라고. 아름답고 지적이었던 엄마가 다시 아기가 되어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저자는 조금씩 엄마의 과거를 마주한다. 부모님이 처음 만나 사랑이 싹트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조금 부족한 듯 검소함이 몸에 배인 생활, 조금씩 늘어가는 엄마의 메모들이 아버지의 은퇴를 전후로 엄마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빼곡하게 자리잡게 되는데...

 

 

엄마가 눈을 떴다. 엄마는 우리가 마지막 사진을 찍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을 감지했을까? 엄마의 시선이 공허해 보였다. 엄마는 사진작가가 뒤에 없는 카메라와도 같았다. - 324쪽.

 

 

치매 발병은 곧 가정의 위기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최악의 경우 가정이 해체되는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 치매라고. 일상의 수많은 추억과 기억을 잊어버리고 가족의 존재마저 잃어버리면서 급기야 사랑하던 가족들도 피폐하게 망가져버리는 게 치매라고 여겼는데 책에서 마주치는 광경은 그렇지 않았다. 무덤덤했던 말테 교수는 진실한 남편이 되어 아내를 간호했고 저자와 삼남매는 고통스러운 가운데에도 되도록 엄마와 함께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은 급작스럽게 다가오고야 만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인 저자가 치매를 앓는 엄마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해서 떠나보내기까지 1800일간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리고 당시의 영상은 <나의 어머니 그레텔>이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는데 몇 년 전 국내의 ‘국제 다큐 영화제’의 작품으로 소개되었다고 한다. 기회가 닿으면 그 다큐 영상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발코니의 새가 이제 엄마의 영혼을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상상을 했다. 이제 엄마는 자유로워졌다. 그르렁거림도, 끙끙대는 신음도, 슬픔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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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
솔로몬 노섭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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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텔레비전에서 <뿌리>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뒤이어 계속 이어지는 시리즈물이었는데요. 흑인을 잡아서 노예상인에게 팔아넘기려는 노예사냥꾼들로 인해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이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됩니다. 그 와중에 쿤타킨테(이름이 아직도 기억나는)라는 흑인 청년이 노예사냥꾼에게 잡히고 마는데요. 손이 쇠사슬에 묶였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온 몸으로 울부짓듯 거부하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성인이 되고 그 영화의 원작이 있다는 걸 알고 책을 구입했지만 아직도 읽지 못했어요. 지금까지 몇 번이고 책읽기를 시도하긴 했지만 표지를 넘기고 본문에 들어서는 순간 맞닥뜨릴, 자유를 빼앗긴 채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의 참혹하고 끔찍하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어떨지 알기에 선뜻 손이 안가더군요.

 

하지만 그 날은 예고없이 다가왔습니다. 계기는 얼마전 개최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노예 12년>이 작품상을 수상하면서부터였습니다. ‘노예수입이 금지된 184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뉴욕에서 납치돼 12년을 노예로 산 흑인 음악가 ‘솔로몬 노섭’의 실화‘를 영화화했다는 기사와 원작인 <노예12년>이 출간됐다는 소식이 접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날 제 손엔 어느새 책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물론 <뿌리>와 <노예12년>이 책제목도 저자도 다르긴 하지만 그건 크게 중요치 않았습니다. 줄곧 거리를 유지해왔던 서사, 이야기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제겐 더 큰 의미가 있었으니까요.

 

‘자유인으로 태어난 나는’으로 시작된 책은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솔로몬 노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웃마을의 처녀 앤과 결혼한 노섭은 운하보수공사를 시작으로 운송사업과 목재벌목, 농장, 마차의 마부로 일하면서 살아가는 세 아이의 아빠였어요. 풍족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아내와 보기만 해도 기쁨이 샘솟는 아이들이 있었기에 노섭은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섭의 삶에 갑작스런 전환점을 맞고 맙니다. 당시 노예장사로 벌어들이는 돈이 엄청났기에 흑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노예’의 위험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바로 거기에 노섭이 말려든 거지요. 서커스단의 공연에 바이올린 반주를 해주면 큰돈을 주겠다는 백인, 해밀턴과 브라운의 말에 속아 넘어가서 그들을 따라나서는데요. 가족의 곁을 떠나 워싱턴으로 간 노섭은 곧바로 납치되고 맙니다. 갑작스런 사태에 노섭은 자신이 자유인이며 가족도 있다고 몇 번이고 강조했지만 가혹한 고문과 학대는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악명 높은 노예상인에 의해 루이지애나로 팔려가고 마는데요. 자유인이었던 노섭이 노예 플랫이 되었다가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오기까지 자그마치 12년의 세월동안 그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예상했던 대로 <노예 12년>은 읽기가 무척 힘겨웠습니다. 예전에 비슷한 내용을 영화로 봤고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 결말이 어떠하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어서 덤덤하게 책읽기가 가능하리라 여겼는데요. 노예 수용소를 비롯해 목화밭, 사탕수수 밭...등의 장소에서 자유를 빼앗긴 노예들에게 자행되는 착취와 억압은 제 상상을 훨씬 벗어난 것이어서 자신의 삶 중에 추억하기조차 두려울 12년의 세월을 세세하게 글로 남긴 노섭이 더 대단하더군요.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오히려 생생하게 살려낼 수 있었다는 것이...

 

‘솔로몬 노섭이 플랫이 되기까지의 시간, 단 하루. 플랫이 솔로몬 노섭이 되기까지의 시간, 12년’ 뒷표지에 적혀 있는 글귀입니다. 솔로몬 노섭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참혹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게 합니다. 현재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에서 여전히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기에 <노예 12년>은 많은 이들이 꼭 읽어봐야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책의 판형이 작은 편인데다가 본문의 행간이 좁고 글자 크기도 작아서 중년의 독자가 읽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하지 않나 싶습니다. 개정판이 출간될 때는 이런 점들이 개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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