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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포스 Olympos
댄 시먼스 지음, 김수연 옮김 / 베가북스 / 2009년 9월
평점 :
재작년 가을이었다. 독서모임 때문에 찾은 대형서점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책이 있었다. 10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툼한 책. 서가에 꽂힌 다른 책 중에서 후광이 비친 듯 월등함을 자랑하던 책. 그건 바로 <일리움>이었다. 그 날 이후로 <일리움>은 한동안 날 괴롭혔다. 내 머릿속에서 두 명의 내가 끝없이 싸웠다. “두 눈 딱 감고 질러버려!” “아니, 그럼 안돼. 어떤 책인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잖아.” “질러버렷” “절대 안돼”...그러다 잊혀졌다. 아니, 포기해버렸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그러다 2009년 가을. 2년 만에 난 감격의 순간을 맞았다. <일리움>의 후속작이자 완결편인 <올림포스>를 드.디.어. 만난 것이다. 전편보다 더 두툼해진 위용을 자랑하는 책을 안고 얼마나 기뻤던지. 꿈에 그리던 연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일리움>을 읽지 않고 <올림포스>를 먼저 봐도 상관없을까? 두툼한 두께만큼 책에 실린 이야기도 장난아니게 복잡할텐데 그걸 몽땅 생략하고도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맛난 음식을 앞에 두고 무시하는 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일단 먹어야지....어디어디, 맛 좀 볼까?
책의 시작은 사뭇 도발적이다. 동트기 직전, 잠에서 깨어난 헬렌은 연인 호켄베리가 있었던 자리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아폴로와의 결투에서 목숨을 잃은 남편 파리스. 그토록 아름답던 파리스가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헬렌은 장례식을 앞두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한편 메넬라오스는 전부인이자 자신을 배신한 헬렌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미는 순간만을 노리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소동이 일어난다. 오이노네란 여인이 자신이야말로 파리스의 진정한 아내라고 주장하며 파리스를 죽인 것은 아폴로가 아니라 필록테테스가 쏜 치명적인 화살 때문이라고 폭로한 것이다.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혼란에 휩싸여 술렁이는 사이 오이노네는 파리스의 시신을 뒤덮은 화염 속으로 뛰어들고 마는데...
초반 극히 일부에 불과한 이야기를 읽고 일순 혼란에 빠졌다. 파리스가 죽었다? 아니, 죽은 건 파리스가 아니라 헥토르가 아니었나? 거기다 헬렌의 연인이라는 호켄베리는 누구고 오이노네는 또 누구야? QT는? 이거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한 거 아니었나?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얘기야? 그리스로마 신화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 조금은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그것과 미묘하게 어긋나는 이야기 전개에 적잖이 놀라고 당황했다. 책장을 덮고 표지부터 다시 찬찬하게 훑어보니 눈에 들어오는 한 줄의 문장이 있었다. ‘오래된 미래와 신화의 과거가 조우한 스페이스 판타지의 대단원’...그제서야 ‘아하!’ 무릎을 쳤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호메로스의 ‘일리어드’는 10년간 이어진 그리스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노래한 대서사시다. 그걸 저자 댄 시먼즈를 교묘하게 틀어놓았다. 거기에 그리스로마의 수많은 신들의 이야기까지 덧붙여서. 가장 큰 결정타는 이 소설이 역사팩션이 아니라 ‘SF'라는 점이다. 이쯤 되면 궁금증이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기 시작한다. 그리스의 신들을 지구도 아닌 우주로 데려다놓고 그들의 손에 과학문명을 쥐어주었다. 그런 다음 전쟁을 벌였던 그리스와 트로이가 힘을 합해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맞서도록 치밀한 전략을 세워놓은 거였다. 무수히 많은 그리스로마의 신들이 저자가 각본대로 움직이는 배우이자 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었고 그 이야기에 탄력과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모라벡이라던가 고전인류가 등장하고 호켄베리가 그들을 이어주는 중요한 인물로 나타난 것이었다.
솔직히 아흔다섯 개의 꼭지로 이뤄진 <올림포스>를 읽는 건 쉽지 않았다. 1087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무게로 인해 팔과 어깨가 묵직한 건 차치하고 난생 처음 듣는 인물과 용어로 본문 중간중간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되짚어 나오기 일쑤였다. 스타워즈 시리즈도 통달하지 못한 나였으니 오죽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나의 도전에 충분한 보상이 될 만큼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마지막 결말을 보고 나면 흥미가 떨어지는 여타소설과 달리 이 책은 완결편을 보고 나니 전편인 <일리움>이 더 궁금해진다. 이제 남은 건 시기뿐. 대체 언제 지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