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거대한 기차 - '칭짱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가려진 통일 제국을 향한 중국의 야망
아브라함 루스트가르텐 지음, 한정은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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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1일. ‘하늘 길’이 열렸다. 가장 높은 지점이 5천 미터가 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티벳의 고원에 칭짱 철도가 개통했다. 단지 이 사실만 놓고 보면 정말 굉장하다. 산소가 극히 희박한 지역이라 호흡하기도 어렵다는  그렇게 높은 곳에 철도를 놓는 일이 가능한가? 그걸 해냈으니 인간의 능력은 정말 무궁무진하구나 싶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자인 아브라항 루스트가르탠이 <중국의 거대한 기차>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칭짱 철도 건설’ 그 이면에 숨겨진 ‘무언가’였다.




‘금단의 땅’이라 불리던 티벳에 철도를 건설하기까지 중국은 50년간 치밀하게 조사하고 차근차근 준비과정을 밟았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영구동토층으로 이뤄진 땅. 지표 아래가 얼음으로 되어 있어서 온도가 올라가 얼음이 녹으면 거대한 탱크도 빠질 정도로 크고 깊은 모래지옥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곳에 어떻게 철도를 놓을 것인가. 이 문제를 놓고 중국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고심한다. ‘열 사이펀’이라는 특별한 냉각장치를 만들지만 그것 역시 티벳의 지형적 특성이나 위험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정부는 칭짱 철도의 건설을 서두른다. 대체 이유가 뭘까.




저자는 우선 티벳의 넓은 땅이 중국으로선 탐이 났을 거라고 말한다. 중국에서 여덟 번째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지만 2000년까지 동부와 철도로 연결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란 점은 중국으로 하여금 철도건설의 동기가 되었다. 인구나 경제성장 면에서 여러모로 중국과 경쟁대상인 인도와 네팔을 비롯한 주변국들을 경계하기 위해 국경이 인접한 티벳은 군사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충지였다. 거기다 티벳에 매장되어 있는 엄청난 규모의 지하자원까지! 중국은 예로부터 티벳을 ‘시짱’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서쪽은 보물창고’라는 의미인 것처럼 이렇게 몇 가지만 훑어보더라도 티벳은 중국에게 그야말로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사탕단지를 아이 손에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올려두면 아이는 의자나 사다리를 동원해 그 단지를 손에 넣으려고 한다. 그런 것처럼 중국은 자국의 필요에 의해 여러모로 탐나는 땅 티벳을 손에 넣기 위해 가장 먼저 철도건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중국 정부는 동부와 서부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철도건설을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칭짱 철도 건설이후 이득을 본 사람들은 한족이었고 티벳 사람들의 삶의 질은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의해 티벳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훼손되기 시작했고 전염병이 돌았으며 한족의 문화가 침투하면서 고유풍습과 문화가 사라지고 젊은이들은 티벳의 고유한 언어를 잃어가고 있었다.




얼마전 읽었던 티벳작가 아라이의 소설 <소년은 자란다>가 생각났다. 칭짱 철도 건설이 가져온 개발에 밀려 삶의 터전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소설 속 작은 마을 지촌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졌다. 작은 것에 감사하던 순박한 사람들이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조금씩 파괴되어 가다가 언젠가 내쳐질 걸 생각하니 갈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들의 모습은 20세기 초 일본 식민지하에서 신음하던 바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




사실 책의 구성이나 편집은 완벽하지 않다. 본문의 성격도 기행문인지 사회과학 분야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읽어볼만 하다. 위기에 처한 티벳의 아픔과 현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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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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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의 작품은 <핏빛 자오선>을 통해 처음 만났다. 인간의 잔인함과 광기가 불러온 끊임없는 살육으로 황무지가 피로 물들던 책을 읽고 마음이 극도로 불편했다. 스멀스멀 번지는 붉은 피에 나도 잠겨버릴 것 같아 한동안은 그의 책을 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또다시 코맥 매카시의 작품을 덥석 집을 줄이야....




<국경을 넘어>는 코맥 매카시의 <국경 3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작년 여름 국내에 출간된 <모두 다 예쁜 말들>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다. 첫 번째 작품을 읽지 않고 두 번째 작품을 읽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전작인 <모두 다 예쁜 말들>과 주인공이 다르다. 따라서 전작을 읽지 않고 바로 두 번째 이야기를 읽어도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풍요롭고 거친 땅. 울타리도 없는 국경선을 지나 멕시코로 갈 수 있는 곳 히달고 카운티의 어느 겨울밤. 늑대 소리에 소년이 잠을 깨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을의 목장에서 기르는 소가 늑대에게 연이어 당하자 빌리와 아버지는 늑대를 잡기 위해 덫을 놓는다. 늑대의 가죽을 팔아서 돈을 벌던 시기여서 미국의 늑대는 이미 멸종된 상태. 멕시코에서 넘어온 것이 분명한 그 늑대는 빌리와 아버지가 설치한 덫을 교묘히 파헤쳐놓기까지 한다. 그러던 어느날 빌리는 덫에 걸린 늑대를 발견하지만 새끼를 밴 늑대가 다리까지 다친 걸 보자 살려줘야겠다고 마음먹고 멕시코로 돌려보내기 위해 국경을 넘는다. 그러나 늑대를 풀어주기 위해 도착한 멕시코에서 늑대는 오히려 천막에 갇혀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투견장에 보내져서 개를 상대로 싸움을 하게 된다. 친구들이 있는 산으로 돌려보내주겠다는 늑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년은 국경을 넘었지만 결국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다는 걸 깨달은 소년은 늑대의 피투성이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늑대를 뱃속의 새끼들과 함께 돌무더기 땅에 묻고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곧 끔찍한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소년의 가족들이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아 부모님이 죽고 달아난 동생 보이드만 간신히 살았다는 거였다. 소년은 인디언들이 훔쳐간 말을 찾기 위해 동생 보이드와 함께 멕시코 국경을 향해 길을 나선다. 그 길이 자신을 잔인하고 냉혹한 절망속으로 몰아넣게 될 줄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역시나. 코맥 매카시의 글은 만만하지 않았다. 주제 사라마구처럼 따옴표가 없는 글을 읽으며 이게 대화인지 혼잣말인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해야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스페인어도 책의 몰입하는 속도를 더디게 했다. 6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툼한 책을 여느 때보다 천천히 읽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국경’이 가진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거였다. 단순히 나라와 나라를 구분 짓는 경계가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그 이면에 숨은 의미는 무엇일까. 초반 늑대에 매료되어 마음을 나누던 순수한 소년이 마지막에 가서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개에게 파이프를 휘두르며 꺼지라고 소리친다. 무엇이 소년을 그토록 변하게 만든 걸까. 소년이 앞으로 걸어갈 삶의 여정은 어떤 길일까.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리지만 그럼에도 그 다음이 궁금해지는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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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포스 Olympos
댄 시먼스 지음, 김수연 옮김 / 베가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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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가을이었다. 독서모임 때문에 찾은 대형서점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책이 있었다. 10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툼한 책. 서가에 꽂힌 다른 책 중에서 후광이 비친 듯 월등함을 자랑하던 책. 그건 바로 <일리움>이었다. 그 날 이후로 <일리움>은 한동안 날 괴롭혔다. 내 머릿속에서 두 명의 내가 끝없이 싸웠다. “두 눈 딱 감고 질러버려!” “아니, 그럼 안돼. 어떤 책인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잖아.” “질러버렷” “절대 안돼”...그러다 잊혀졌다. 아니, 포기해버렸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그러다 2009년 가을. 2년 만에 난 감격의 순간을 맞았다. <일리움>의 후속작이자 완결편인 <올림포스>를 드.디.어. 만난 것이다. 전편보다 더 두툼해진 위용을 자랑하는 책을 안고 얼마나 기뻤던지. 꿈에 그리던 연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일리움>을 읽지 않고 <올림포스>를 먼저 봐도 상관없을까? 두툼한 두께만큼 책에 실린 이야기도 장난아니게 복잡할텐데 그걸 몽땅 생략하고도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맛난 음식을 앞에 두고 무시하는 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일단 먹어야지....어디어디, 맛 좀 볼까?




책의 시작은 사뭇 도발적이다. 동트기 직전, 잠에서 깨어난 헬렌은 연인 호켄베리가 있었던 자리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아폴로와의 결투에서 목숨을 잃은 남편 파리스. 그토록 아름답던 파리스가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헬렌은 장례식을 앞두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한편 메넬라오스는 전부인이자 자신을 배신한 헬렌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미는 순간만을 노리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소동이 일어난다. 오이노네란 여인이 자신이야말로 파리스의 진정한 아내라고 주장하며 파리스를 죽인 것은 아폴로가 아니라 필록테테스가 쏜 치명적인 화살 때문이라고 폭로한 것이다.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혼란에 휩싸여 술렁이는 사이 오이노네는 파리스의 시신을 뒤덮은 화염 속으로 뛰어들고 마는데...




초반 극히 일부에 불과한 이야기를 읽고 일순 혼란에 빠졌다. 파리스가 죽었다? 아니, 죽은 건 파리스가 아니라 헥토르가 아니었나? 거기다 헬렌의 연인이라는 호켄베리는 누구고 오이노네는 또 누구야? QT는? 이거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한 거 아니었나?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얘기야? 그리스로마 신화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 조금은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그것과 미묘하게 어긋나는 이야기 전개에 적잖이 놀라고 당황했다. 책장을 덮고 표지부터 다시 찬찬하게 훑어보니 눈에 들어오는 한 줄의 문장이 있었다. ‘오래된 미래와 신화의 과거가 조우한 스페이스 판타지의 대단원’...그제서야 ‘아하!’ 무릎을 쳤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호메로스의 ‘일리어드’는 10년간 이어진 그리스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노래한 대서사시다. 그걸 저자 댄 시먼즈를 교묘하게 틀어놓았다. 거기에 그리스로마의 수많은 신들의 이야기까지 덧붙여서. 가장 큰 결정타는 이 소설이 역사팩션이 아니라 ‘SF'라는 점이다. 이쯤 되면 궁금증이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기 시작한다. 그리스의 신들을 지구도 아닌 우주로 데려다놓고 그들의 손에 과학문명을 쥐어주었다. 그런 다음 전쟁을 벌였던 그리스와 트로이가 힘을 합해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맞서도록 치밀한 전략을 세워놓은 거였다. 무수히 많은 그리스로마의 신들이 저자가 각본대로 움직이는 배우이자 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었고 그 이야기에 탄력과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모라벡이라던가 고전인류가 등장하고 호켄베리가 그들을 이어주는 중요한 인물로 나타난 것이었다.




솔직히 아흔다섯 개의 꼭지로 이뤄진 <올림포스>를 읽는 건 쉽지 않았다. 1087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무게로 인해 팔과 어깨가 묵직한 건 차치하고 난생 처음 듣는 인물과 용어로 본문 중간중간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되짚어 나오기 일쑤였다. 스타워즈 시리즈도 통달하지 못한 나였으니 오죽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나의 도전에 충분한 보상이 될 만큼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마지막 결말을 보고 나면 흥미가 떨어지는 여타소설과 달리 이 책은 완결편을 보고 나니 전편인 <일리움>이 더 궁금해진다. 이제 남은 건 시기뿐. 대체 언제 지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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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책쟁이들 - 대한민국 책 고수들의 비범한 독서 편력
임종업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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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하는 분이세요?” 책이 담긴 택배상자가 일주일에 평균 3~4번 집에 오는데 택배 기사분이 간혹 질문을 한다. 그때마다 내 대답은 뻔하다. “뭐하긴요. 그냥 아줌마죠” 집안의 가구 배치를 바꾸기 위해 피아노를 옮겼다. 크고 무거운 피아노를 남편 혼자 옮길 수 없어서 불렀던 이삿짐센터 아저씨는 이담에 이사 갈 때 자기네들 절대 부르지 말라 한다. 이유는 저 많은 책 옮기다 골병든다는 것. 문제는 그렇게 말한 이삿짐센터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거다......ㅡㅅㅡa;; . 




도서관 자원봉사 때 작은 아이를 봐주시기 위해 집에 오시는 친정엄마는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하시는 말씀. “집이 이게 머꼬?” 방방마다 쌓여있는 책을 둘러보고 혀를 끌끌 차며 “이건 사람 사는 집이 아니다.”, “이러다 집 내려앉겠다”고 하고 곁에 머쓱하게 서있는 사위에게 “책만 자꾸 사들이는 각시 어째 데리고 사노. 야단 좀 치라.”고 하신다. 친정엄마는 알뜰살뜰 살림사는 것보다 책 읽고 모으는 재미에 푹 빠져있는 딸이 답답하고 못 마땅하신 거다. 허나 어쩌겠는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걸.




<한국의 책쟁이들>에는 우리나라에서 책에 관한한 내노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한마디로 책 고수 중의 고수들이 털어놓는 일편단심 책사랑 이야기다.  집안일 하다 잠깐 짬이 나서 이 책을 들었는데 초반부터 빠져들고 말았다. 조선시대 이름난 간서치 이덕무의 일화를 시작으로 책 때문에 방고래가 꺼진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파트가 무너질까봐 걱정하는 사람, 오랫동안 애지중지 모아온 책으로 책 박물관을 개관하거나 아예 부부가 북카페를 차리는 사람, 독서모임에서 평생의 반쪽을 만나 결혼한 사람들... 그들에게 있어 헌책방 나들이는  성지순례였고 가장 큰 슬픔은 책을 공간이 없다는 거였으며 책을 버릴 때마다 가슴 한 켠이 무너지는 아픔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눈만 뜨면 출근도장이라도 찍듯이 서점으로 달려가서 바리바리 책을 안고 들어오는 그들의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틈만 나면 책 살 궁리만 하지만 그나마 술이나 도박, 사치를 안 하니까 같이 사는 거라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펼치는 좌충우돌 책 애정론에 쿡쿡 웃음을 터뜨리는가 하면 때론 고개를 끄덕였고 회사에서 책 구입비를 준다는 대목은 부러워서 샘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병영도서관에 관한 대목이었다. “군인이 총만 잘 쏘면 됐지 뭐가 필요한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창 젊은 시기에, 어떤 분야든 열정적으로 몰두할 시기의 젊은이들에게 그저 너희들은 병역의무만 다하라고 하는 건 올바른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병역을 다하는 동안 꾸준히 교양을 쌓아 올바른 가치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부대에는 병영도서관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아니, 12개의 기지 도서관에 15만 9천여 권이 넘는 장서를 갖추고 있는 미군에 비하면 우리 군 도서관은 아예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고 싶어서 안달하던 어린 시절에 비해 지금의 나는 읽을 책을 쌓아두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어린 시절에 비해 더 안달을 한다. 책을 많이 못 읽는다고 책을 더 못 갖는다고 불평을 했다. 많이 읽고 많이 갖고 있는 게 제일이라고 여겼던 거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고 자만에 빠진 자의 모습이란 걸 알 수 있었을텐데, 그렇지 못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간다면 내겐 미래가 없다.




<한국의 책쟁이들>을 만나 다행이었다. 이 책을 통해 책에 목말라하던 과거의 나와 책에 빠져사는 현재의 나를 만났다.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내 미래의 모습을 그리는 계기를 갖게 됐다. 나만의 작은 도서관을 가꾸기 전에 모두를 위한 도서관을 일궈나가자고. 마침 군복무 중인 조카가 군대에서 도서관을 꾸민다며 내게 도움을 청해왔다. 절묘한 순간의 포착.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는걸까. 희미하던 내 미래가 조금씩 뚜렷한 형체를 찾아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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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본능 - 법의곤충학자가 들려주는 살인자 추적기
마크 베네케 지음, 김희상 옮김 / 알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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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전이었다. 지인이 며칠 여행하고 돌아오니 집에 도둑이 들었더란다. 인근의 다른 집도 빈집털이범 때문에 소소하게 잃어버린 게 많았던 모양이다. 파출소에 신고하니 경찰 몇 명이 와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지인의 가족에게 질문도 했다는데. 주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웃집 아저씨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근데, 족적은 떴습니까?” 지인을 통해 그런 얘길 듣는 순간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핫, 그 아저씨, 텔레비전 너무 많이 보셨다”하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CSI나 본즈 같은 미국 드라마를 통해 처음 만나게 된 과학수사대. 사건현장에 남겨진 작은 단서 하나만으로도 미궁에 빠졌던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그들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다. 놀랍고 눈부셨다. 텔레비전이 아닌 실제 과학수사대는 어떨까. 궁금했다. 마르크 베네케의 <살인본능>을 통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법의곤충학자가 들려주는 살인자 추적기’란 부제만으로도 길 그리썸의 카리스마와 포스가 느껴진다.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연쇄살인범의 고백>에 이어 저자의 범죄 3부작이자 완결편인 <살인본능>은 그야말로 엽기적이고 참혹한 사건들이 총집합된 책이었다. 토막살인의 전말을 밝히는 과정으로 시작한 책은 요즘의 사건수사에서 필수적으로 행해지는 지문감식이나 유전자 감식이 수사기법으로 도입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간혹 숲이나 인적이 뜸한 장소에서 뼈가 발견됐다는 뉴스를 접하는데 그런 사건의 경우 발견된 뼈나 사체를 통해 사건의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보디 팜’을 설립했다고 한다. ‘보디 팜’은 시체의 부패가 진행되는 과정은 물론 곤충들이 서식하는 양상을 관찰하는 연구소인데 그 장소가 대학교의 축구장 지하에 자리잡고 있다는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또 부패가 진행되는 사체의 사진 한 장이 수록되어 있는데 본문의 내용을 읽기 전에는 모형일거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나중에 보니 실제 사진이란 걸 알게 됐다. 그 순간의 오싹함이란....




이후 책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건들에 대해 얘기한다. 희대의 납치극 찰스 린드버그 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여인들을 잔혹하게 유린했던 연쇄강간범 폴 베르나르도와 칼라 호몰카, 살해 후 인육을 먹은 뎅케, OJ심슨사건 등 그동안 책이나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접했던 수많은 살인사건들보다 몇 배 더 잔인하고 참혹하게 다가왔다. 그 중에서도 동네의 어린 소년들을 사귄 다음 그들을 집으로 유인해 잔인하게 살인했던 제프리 다머는 정말 소름이 끼쳤다. 17명을 살해한 잔혹하고 엽기적인 범행보다 더 경악했던 건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정도로 순진하고 선량해 보이는 얼굴의 그가 그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다니. 그는 법정의 최후진술에서 말했다. “무엇이 저를 그토록 잔혹하고 흉악한 놈으로 만들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 아들을 지켜보던 부모의 사진이 오래도록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흥미진진하고 스릴 넘치는 과학수사대의 이야기를 만나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손에 들었던 책이다. CSI시리즈의 출연배우들의 원본이자 실제 현실의 모습을 볼 거라 여겼는데,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선 날카로운 경종이 울렸다. 저자는 서두에서 말했다. ‘현실은 그 어떤 판타지 소설보다도 스릴이 넘친다’고. 그 말이 진실이었다. 연이어 계속되는 범죄와 살인,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범인, 사건해결을 위해 개인적인 일상을 포기하는 수사관들. 그건 더 이상 소설도, 드라마도, 영화도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들. 착한 얼굴의 탈을 쓰고 우리 가족을 호시탐탐 노리는 잔인한 사람이 이웃에 없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책제목처럼 우리의 내면엔 정말로 ‘살인본능’이 존재하는 걸까. 결코 열면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마냥 묵직함으로 다가온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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