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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이 베스파
박형동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중학교 1학년, 혹은 2학년 여름. 바람을 타고 싶어서 자건거 페달을 힘주어 열심히 놀렸다. 곧이어 내리막길. 살짝 바람을 탔다. 쓰윽~. 그런데 착지장소를 잘못 택했다. 작지만 톡 튀어나온 돌이 있었는데, 어두운 밤이라 보지 못했다.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한 나와 자전거는 넘어지면서 함께 굴렀다. 청바지에 뻥 하니 뚫린 구멍 속으로 사정없이 깨진 무릎팍이 보였다. 다쳐서 피가 흐르는 다리보다 엄마에게 야단맞을 일이 더 걱정이었다. 여기저기 부서진 자전거를 끌고 들어서는 내 모습을 보고 놀란 엄마에게 서둘러 변명처럼 이런 말을 했다. “어~엄마...이제 다신 빨리 안 달릴게. 절대루...”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인가. 파랑과 하양. 파랑도 그냥 파랑이 아니다. 이름을 모르는 몇 가지의 파랑,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파랑에서 바닥이 훤히 비춰 보일듯한 옅은 파랑이 솜털같은 하양을 만났다. 거기로 한 대의 빨간 스쿠터. 마치 파도를 뛰어 넘으려는 듯하다. 휙~하니 뒤로 나부끼는 흰색셔츠와 목에 질끈 묶은 스카프에서 바람이 느껴진다. 기분 좋고 시원한 바람이....지그시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면 나도 바람을 탈 수 있을까.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까.
<바이바이 베스파>. 이 책에는 짧막한 만화 다섯편이 실려있다. 서랍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몇 장의 사진에서 서툴기만 했던 옛사랑을 떠올리기도 하고(톰과 제리의 사랑), 함께 했던 시간이 오히려 상처가 되어 헤어지게 된 연인이 병든 고양이로 인해 갈등하는 모습(스노우 라이딩), 자신을 밍키라고 믿는 소녀가 마법의 시간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본모습에 당당해지기도 하며(밍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소녀), 무리에서 따돌림을 받던 소녀가 수족관을 찾아 깊은 잠을 빠지기도 하고(그랜드마마 피시), 목술걸고 락밴드 했던 주인공이 기타를 그만두고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애정결핍의 여자친구와도 헤어진다. 전재산을 털어 산 스쿠터 베스파도 팔아버린다. 갑작스레 변해버린 그의 모습이 혼란스러운 친구에게 그는 뭔가 딴 게 돼서 돌아오겠다고 말한다.(바이바이 베스파)
책을 펼치고 채 한시간도 안돼서 다 읽었지만 느낌은 반대로 오래 남았다. 특히 다섯 번째 이야기인 ‘바이바이 베스타’에서 주인공과 친구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난 끈을 하나 잡고 있었어. 그걸 놓치면 보통 사람이 되어버리는 그런 끈이야. 이걸 놓으면 내 의미가 없어지니까 안간힘을 쓰며 끈을 잡고 있는거야....”
“끈들을 전부 놓을거야?”
“응”
“난 좀 혼란스러울 것 같군. 그렇게 되면 내가 아는 네 특징들이 모두 없어져버리니까...”
만약 내 가족이나 주변사람이 주인공처럼 목숨걸고 하던 록밴드를 그만두고 스쿠터를 팔았다면 난 분명 이렇게 말할거다. “그래, 정말 잘했다. 니가 이제야 겨우 철이 드나보네...” 당사자의 마음이 어떨지, 얼마나 굳은 결심을 했을지 생각조차 안했을 게 틀림없다.
“혹시 어른이 되려는 거니?”
사람은 그냥 있어도 늙어간다. 애써 늙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다. 어느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유아 시절의 세월은 기어가고, 어린이 시절에는 걸어가고 청년기에는 뛰어가고 성인기에는 달려가고 노년기가 되면 덧없이 날라 간다."
꼭 쥔 손을 놓아버리면 보통 사람이 되어버리는 끈. 내게도 그런 끈이 있을까. 지금의 난 그 끈을 쥐고 있는건지, 아님 예전에 이미 놓아버린걸까.
어린 아이가 소년(소녀)이 되고 어른이 되는....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겼던 과정을 <바이바이 베스파> 이 책으로 인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제부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스쿠터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조금은 따스해지지 않을까...그나저나 이렇게 다양한 스쿠터가 있을 줄이야...처음 알았다. 새로이 알게 된 세상, 하나 추가요!!